美 CES서 확인된 삼성의 앞날
이건희 경영 복귀ㆍ이학수 건재ㆍ3세 승계구도 본격화
2010.01.11 16:10:00
美 CES서 확인된 삼성의 앞날
이 한 장의 사진. 지난 9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 2010' 현장에서 연출된 아버지 이건희와 두 딸 이부진, 이서현 씨가 손을 꼭 잡은 모습은 삼성그룹의 앞날과 관련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건희 전 회장은 현장에 모여든 기자들 앞에서 "우리 딸들 광고 좀 해야겠다"며 두 딸을 불러 손을 꼭 잡고 행사장을 함께 걸어 다녔다고 한다. '자식들이 든든하지 않냐'는 질문에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아직 어린애들"이라고 말했다.

이 전 회장과 행동을 같이했던 두 딸, 이부진 신라호텔 및 에버랜드 전무와 이서현 제일모직 및 제일기획 전무와 달리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은 독자 행보를 했다. 맏이라서 두 딸에 비해서는 아버지가 손잡고 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미 아버지가 손을 잡고 광고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의 경영 승계는 밑바닥 작업이 어느 정도 돼 있다.

▲ 왼쪽부터 이부진 전무, 이건희 전 회장, 이서현 전무, 홍라희 씨. 이 전 회장은 이날 의도적으로 두 딸을 불러 행사장에서 손을 꼭 잡고 다녔다. ⓒ뉴시스

이건희 방미, 경영 복귀 무대…'평창올림픽 유치'는 뒷전으로

이건희 전 회장의 CES 방문은 지난해 연말 단독 대통령 특사 이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언론들은 이 전 회장 단독 특사의 중요한 이유였던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의 행보는 이런 기대와 달랐다.

이 전 회장은 평창 올림픽 유치에 대해 "그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면서 "국민, 정부 다 힘을 합쳐서 한 쪽을 보고 열심히 뛰어야한다"고 말했다. "솔직히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고도 했다. 이 전회장이 사면되지 않으면 평창 올림픽 유치가 물 건너갈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정.재계와 일부 언론들은 할 말이 없게 됐다. 만약 평창 올림픽 유치가 실패한다면 "국민들이 합심하지 못 해서"가 그 이유로 남게 됐다.

이 전 회장은 이처럼 평창 올림픽 유치는 일찌감치 자신의 책임에서 내려놓고 대신 첫 공식석상을 사실상 삼성 최고 책임자로서 재승인받는데 진력했다. 그는 삼성전자 뿐 아니라 LG전자, 일본 파나소닉과 샤프, 소니, 중국 하이얼 등 국내외 경쟁업체들의 전시장을 둘러보며 자신을 수행하는 삼성 경영진들에게 다양한 주문을 쏟아냈다고 한다.

이 전 회장은 자신의 경영 복귀 질문에 "아직 멀었다"고 답했지만 절대 복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복귀 시기' 뿐이다.

이 전 회장은 "삼성도 까딱 잘못하면 10년 전 구멍가게로 돌아간다. 삼성그룹의 10년 후 준비는 턱도 없다. 아직 멀었다"며 지금의 계열사 자율 경영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 삼성의 장기적인 비전의 부재를 언급하며 이 전 회장의 복귀를 주문하는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 등의 주장과 맞아 떨어진다. 이 전 회장은 "모든 분야가 정신차려야 한다"는 대국민 메시지도 잊지 않았고, 대다수 언론은 이 전 회장의 '쓴 소리'에 공감하며 그의 탁월한 식견에 찬사를 보냈다.

이번 CES는 사실상 이 전 회장의 경영 복귀를 공식화하는 자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딸의 부각, 재용-부진-서현 경쟁 본격화

이 전 회장의 이번 방문에는 온 가족이 함께 했다. 부인 홍라희 씨 뿐 아니라 아들, 딸, 사위들이 모두 총출동했다. 총수 일가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행보로도 읽힌다.

특히 이 전 회장이 이번 행사를 자신의 경영 복귀 뿐 아니라 두 딸의 '데뷔 무대'로 삼았다. 이 전 회장은 일부러 딸들을 자신의 양 옆에 세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했다. "딸들 광고 좀 해야겠다"며 그 의도를 숨기지도 않았다. 아들 뿐 아니라 두 딸들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넘겨주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현재 삼성의 '3세 경영' 구도와 관련해 그룹의 핵심인 전자-금융 계열사는 재용 씨에게, 호텔신라와 에버랜드 부문은 부진 씨에게, 제일모직과 제일기획은 서현 씨에게 경영권이 승계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 전 회장의 이날 의도된 행동은 두 딸의 입지를 좀 더 확고히 함에 따라 재용-부진-서현 3남매의 경쟁 구도를 형성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외아들인 재용 씨의 '이혼 사건'을 계기로 맏딸이자 평소 야망이 큰 것으로 알려졌던 부진 씨가 급부상했다. 여기에 서현 씨까지 가세하는 모양새가 된 셈이다. 지난 연말 인사에서 재용 씨는 부사장, 서현 씨는 전무로 승진했다. 부진 씨는 지난해 9월부터 호텔신라와 에버랜드의 전무를 맡고 있다.

이학수 건재 확인…<서울경제> "이학수 수행" 기사 자진 삭제

이번 CES 행사에서 또 한 명 주목해야 될 사람이 있다. 바로 이학수 전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장이었다. 그는 가족도 아니고 삼성전자 사장단도 아닌 유일한 일행이었다.

<서울경제>는 지난 7일 오후 집행유예 중인 이학수 전 실장이 이 전 회장의 미국 방문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가 기사를 삭제했다. 8일자 지면 초판에도 실렸던 이 기사가 삭제된 이유에 대해 <서울경제>는 "해당 기사에 대한 사실 확인이 되지 않았고, 삼성 측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해 기사를 내렸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9일 CES 행사장에 이학수 전 실장은 분명히 있었고, 이 전 회장을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바로 다음 날이면 드러날 일임에도 불구하고 언론보도를 통제할 만큼 이학수 전 실장의 행보는 삼성그룹에 민감한 문제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미 언론에서는 이 전 회장의 경영 복귀와 함께 전략기획실이 부활될 것이란 얘기가 나오고 있다. 지난달 15일 정기 사장단 인사를 통해 발족된 '삼성전자 신사업추진단'을 놓고 사실상 전략기획실의 부활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이번 CES 행사에서 삼성그룹이 현재 안고 있는 3가지 지배구조의 문제가 다 드러났다"고 분석했다.

첫째, 이건희 전 회장의 경영 복귀 여부와 시기, 둘째, 이학수 전 실장을 중심으로 하는 이건희 가신그룹의 건재와 전략기획실 부활 가능성, 셋째, 재용-부진-서현 3세들 사이의 경영권 승계 및 계열 분리 구도.

김 교수는 "9일 행사를 통해 이건희 전 회장이 사실상 경영에 복귀했다는 것이 확인됐고 이학수 전 실장의 '그림자 수행'으로 삼성 내외부에 이학수를 중심으로 하는 전략기획실 파워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 전 회장이 아들 못지 않게 두 딸의 역할을 강조하고 선전한 것 역시 향후 경영권 승계 및 계열사 분리 과정에서 세 자녀의 경쟁 구도를 본격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그룹의 문화를 본다면 이건희 회장이 살아있는 한 3세 승계가 완전히 마무리 되지는 않을 것 같다"며 "자녀들 사이의 경쟁관계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이들의 능력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문제는 총수 일가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이 세 가지 지배구조의 문제가 글로벌 기업 삼성으로서는 위험 요인이기도 하다는 점. 이건희 전 회장과 참모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폐쇄적 의사결정구조는 글로벌 기업 삼성에게는 걸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구조다. 삼성전자가 이 전 회장이 '대노'했다고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려 불량률을 줄이기엔 이미 너무 큰 조직이 됐다는 지적이다. 또 삼성 재판을 통해 확인된 총수 일가의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천문학적 비용은 논외로 치더라도 삼성자동차 등 이 전 회장의 '잘못된 판단'이 그룹에 큰 손해를 가져온 사례도 이미 존재한다. 이 전 회장 일가가 소유한 삼성그룹 계열사 지분은 주식수 기준으로는 1% 미만, 시가기준으로는 3% 정도에 불과하다.

김상조 교수는 "현재 삼성에 불리한 보도는 거의 완벽히 통제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전 회장의 경영 복귀와 3세 경영 승계에 대한 문제제기가 공론의 장에서 사라져버렸다"며 "하지만 비판적 여론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삼성 지배구조가 갖고 있는 문제마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지금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억누르고 역행하는 것이 오히려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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