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비극적 현실 속 기댈 수 있는 버팀목
[기고] 백기완 선생님의 <버선발 이야기>
백기완, 비극적 현실 속 기댈 수 있는 버팀목

백기완 선생님을 아시는지요. 아주 잘 아는 분들도 계실 테고, 요즘 들어 조금 낯설게 느끼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조금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학대받던 아픈 영혼 제제에게 참된 사랑을 주었던 '포르투가'를 기억하시는지요. 혹시 <해리 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가 두려워했던 유일한 인물인 ‘덤블도어 교수’는 어떻습니까. 모든 종족을 이끌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간달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떠올리면 수렴하게 되는 몇 몇 단어가 있습니다. 사랑과 지혜, 통합, 그리고 위대함. 모두 우리 사회를 고귀하게 만드는 데 꼭 필요한 덕목들입니다. 백기완 선생님은 그런 덕목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큰 어른입니다.

제가 감히 백기완 선생님을 말하자면 그는 민중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야기꾼이자, 썩고 낡은 세상을 질타하는 혁명가이고, 인간다운 아름다운 삶을 그려내는 예술가입니다. 그런 까닭에 식민통치와 분단, 독재처럼 비인간적이고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선생님의 말과 삶은 언제나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었습니다. 사람냄새 나는 세상을 위해 한 치의 용기를 더 낼 수 있었던 원천이기도 합니다.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프레시안(최형락)


백기완의 말

심상정 : 요즘 스케줄이 너무 많아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백기완 : 에헤~ 심 대표 아무리 바쁘더라도 ‘일정’을 제대로 챙기는 게 좋지 않을까?”

언젠가 선생님께 인사 갔을 때였습니다. 이러니 선생님 앞에서는 항상 긴장을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외래어가 튀어나올지 몰라서입니다.

백 선생님은 그 자체로 우리말 백과사전이자 문화재입니다. 만일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우리는 ‘달동네’, ‘새내기’, ‘모꼬지’, ‘동아리’와 같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쓰지 못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선생님을 잘 아시는 분이라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계실 것입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백기완 선생님의 ‘묏비나리’입니다. 그는 80년 광주의 선연했던 핏자국 앞에서 민중들의 마음을 그렇게 위로했습니다. 이 시는 이제 대한민국이 겪는 아픔마다 모두가 함께 읊조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백기완 선생님의 말과 노래로 이름 없이 죽어간 광주의 영령들을, 박종철 열사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세월호 학생들을, 백남기를, 김용균을 추도하고 함께 기억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말은 이 땅의 수많은 핍박받는 민중에 대한 사랑입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의 아픈 질곡마다 새하얗게 서려 있는 위로의 노래입니다.

백기완의 자리

우리가 그의 말에만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백기완 선생님과 그의 새하얀 두루마기는 이 땅 모든 민중들이 일어선 자리마다 서 있습니다. 평생을 민주화에 투신하다 혹독한 고문으로 반쪽이 된 몸을 이끌고도 온갖 시위 현장에서, 기자회견장에서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한편으로는 든든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늘 송구스럽고 죄스런 마음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제가 집회에 참석하면 누구보다 먼저 찾는 것이 선생님의 자리입니다. 얼마 전 크게 다치셔서 홀로 죽음과 맞서 싸울 때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하고 마음만 졸였던 터라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자리를 그에게 빚졌습니다. 그리나 그 빚을 여전히 갚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물로 그리워하는 북녘 고향 땅에 그는 아직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불평등, 양극화로 이야기되는 민중의 고달픈 현실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백 선생님은 여전히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 '노나메기 세상'을 향한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있고, 여전히 새하얀 기백으로 우리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함께 있어도 그립고 애틋한 감정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늘 그의 자리에 사랑을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백기완의 버선발

백 선생님의 말은 이야기가 되고, 그 생생한 민중의 이야기는 한 편의 민족 대서사시가 되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 백기완 선생님이 펴내신 <버선발 이야기>입니다.

우선 이 <버선발 이야기>는 당혹스럽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한자어나 외래어를 단 한 글자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당혹스러움은 이내 놀라움이 되리라 장담합니다. 순우리말과 힘찬 문장으로 완성된 한 판 대서사시가 머릿속에 생생히 펼쳐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백 선생님께서는 이 책을 ‘찬찬히 한 글자 한 글자 빈 땅에 콩을 심듯 새겨서 읽어 주시’라 당부했는데, 저는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단숨에 글을 모두 읽어버렸습니다. 이미 많은 분께서 이 책을 추천하셨지만, 아름다운 우리말로 된 이야기를 꼭 읽어보시길 여러분께 권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자그마치 여든 해가 넘도록 내 속에서 홀로 눈물 젖어온 것임을 털어놓고 싶다.'

<버선발의 이야기>는 백기완이라는 인물의 삶과 사상, 민중예술관을 집대성한 실체입니다. 아름다운 우리말의 보고(寶庫)이자 휘모리장단처럼 몰아치는 민중의 파란만장한 삶의 대서사시입니다. 이 책이 동화책, 영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동시대는 물론 후대까지 멀리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그가 베푼 커다란 사랑에 작게나마 보답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에게 새로운 말과 자리와 글을 청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큰 행운일지도 모릅니다. 백기완이라는 어른과 동시대에 살아가는 행운이 <버선발 이야기>와 함께 여러분에게도 가닿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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