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불한당들의 시대
그림소설 <불한당들의 시대> 제1부 이야기의 서막 ⑧
2019.05.25 11:36:17
<8> 불한당들의 시대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9. 원광법사의 환국(還國)


원광법사는 일찍이 ‘계림제일문장(鷄林第一文章)’이라 불렸다. 그의 명성은 삼한(三韓:한반도)을 넘어 왜(倭)와 옛 오월(吳越:양자강 유역의 남중국)의 땅까지 널리 퍼졌다. 그는 현학(玄學:위진시대 노자와 장자를 위시한 도가학을 위주로 유학을 합친 철학)과 명교(名敎:명분과 교화를 중심으로 한 유교)는 물론이요, 제자서(諸子書:춘추전국시대 여러 사상가들의 저서)와 역사서 등을 폭넓게 섭렵하여 그 문장의 광의(廣義)와 간세(簡細)한 바는 신라에서 따를 자가 없었다. 그의 문재(文才)를 눈여겨본 사도태후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를 국자(國子:국비유학생)로 뽑아 당시 가장 번성했던 금릉(金陵:현재의 난징)에서 유학하게 하였다. 

진(陳)나라의 금릉에 도착하여 장엄사(莊嚴寺)에서 수학했던 법사는 우연히 불교의 강론을 듣고 큰 충격에 빠진다. 지금까지의 공부는 썩은 동아줄을 잡고 벼랑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법사는 지체 없이 진왕(陳王)에게 글을 올려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한다. 이에 왕은 칙명으로 윤허했다. 진나라는 외국인의 수계식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으나, 원광의 명성을 높이 산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후 원광은 옛 오나라 지역의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정념(定念:참 지혜로 사념이 없는 것)과 정정(正定:참 지혜로 흔들리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에 매진하니, 사람들은 법사가 머무르는 곳을 임천(林泉)이라 일컬으며 성역(聖域)처럼 여겼다. 하여, 법사의 임천엔 뜻을 구하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난세에 접어들어, 수(隋)나라의 군대가 호구산에 난입했다. 무도한 병사들이 진국(陳國)의 비구들을 소탕하며 원광을 목탑에 포박한 채 불태우려 하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법사를 수나라 대주장(大主將:사령관)이 높이 받드니, 그 인연으로 원광은 처음으로 주진(周秦:황하강 유역의 중국 중원)의 땅에 이르게 되었다. 수나라의 수도인 대흥성(大興城:현재의 시안)에서도 원광의 글은 빛을 발했다. 법사의 아름다운 문장이 널리 유행하여, 급기야 황제가 친히 불러 그 오묘한 가르침을 간구(干求)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법사는 누리고 있던 모든 지위와 명망을 훌훌 벗어던지고 호구산으로 돌아갔다. 다시 용맹정진하여 사아함경(四阿含經:네 가지 아함경)을 깊이 읽고 팔정(八正:깨달음과 열반에 다다르는 여덟 가지 수행방법)을 바로 세우니 그 깨우친 바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원광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자, 호구산에 일궈놓은 자신의 임천에서 일생을 마칠 것을 다짐하며 세상의 인연을 멀리하고 제자들에게 강설(講說)하는 것에만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를 건너온 자들이 법사의 임천에 다다랐다. 그들은 비밀리에 사도태후의 서찰을 전달했다. 서찰에는 그간 서라벌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들이 낱낱이 적혀있었다. 현재의 왕이 할머니 사도 태후로부터 어떻게 권력을 빼앗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패륜을 저질렀는지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손자가 고의로 지른 불길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할머니의 원한이 구구절절 맺혀 있었다. 법사는 태후를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서학(西學:중국에서의 유학)을 허락하며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태후는 지금의 법사를 있게 한 은인이기도 했고, 법사가 승려가 될 수 있도록 진왕에게 간곡한 부탁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태후였다. 이국의 땅에서 유일한 신라인으로 오직 불법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사도태후의 배려와 후원 덕분이었던 것이다. 법사는 태후가 내민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또다시 바다를 건너온 신라인들이 임천에 나타났다. 자신들을 화랑이라 밝히며 쫓기고 있으니 숨겨 달라고 했다. 그들은 태후가 보낸 상자를 들고 있었다. 이윽고 수나라의 관원들이 들이닥치며 일대 소란이 일어나자, 화랑들은 법사의 침소로 숨어들었다. 관원들은 이국의 수상한 자들을 쫓고 있으니 수색을 허락할 것을 요구했다. 법사는 버럭 화를 내며 이들을 내쫓았다. 조정(朝廷)의 관원이라 한들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법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날 밤, 화랑들이 가져온 상자에는 일찍이 보지 못한 말로만 전해 듣던 왕가의 보물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천사옥대(天賜玉帶)였다. 법사는 어안이 벙벙하여 말문이 막혔다. 

'내고(內庫:왕실 직속 창고)에 있어야 할 보물이 어찌 여기 있는가?'

화랑들은 태후께서 천사옥대를 법사에게 전달하고, 그 이후의 일은 법사의 지시를 따르라 명했다고 했다. 법사는 얼른 상자를 닫고 뒤로 물렸다. 어리둥절해하는 화랑들을 향해 법사가 입을 열었다. 수나라 관원들의 협박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법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 일은 너희들과 나만 알고 있는 일이다. 더 이상 발설하다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알겠느냐?"

다짐을 받은 법사는 심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들이 가담한 일이 어떤 일인지는 아느냐?"

스스로 구칠이라 밝힌 자가 입을 열었다.

"모를 리야 있겠사옵니까? 무도한 왕을 몰아내고 태후마마를 다시 옹위하는데 소인들은 목숨을 걸었습니다."

법사는 씁쓸하게 웃으며 눈길을 구칠 옆에 앉은 대세에게 돌렸다.

"혈기는 갸륵하다만, 그것이 네가 힘쓴다고 될 일이겠느냐? 만약 너희들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어쩔 것이냐? 너는 내물왕의 후손이고 이찬 동대의 아들이라는데, 너 때문에 너의 구족(九族)이 몰살당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느냐? 너 하나로 인해 말이다."

 대세는 눈을 말똥말똥 빛내며 입을 열었다.

"소인 어려서부터 방외(方外:세속을 벗어난 곳)에 뜻을 두었던 바, 그런 세속의 정에 연연하여 어찌 신선(神仙:도를 닦아 자연과 벗하며 고통이나 질병도 없이 영생을 누리는 것)을 배울 것이며, 또한 표연히 훌쩍 바람을 타고 공허(空虛)한 상공으로 날아갈 수 있겠사옵니까?"

대세의 말을 듣다못한 법사는 버럭 화를 냈다.

"도대체 너의 말은 종잡을 수가 없구나. 방외지사께서 어찌 역모지사가 되었는고? 가소롭고 어이없구나!"

법사는 혀를 끌끌 차며 구칠에게 다시 눈길을 돌렸다.

"보아하니 네가 주동한 듯한데, 너희들은 상상치도 못할 가공할 일에 휘말리고 말았어. 알고는 있는 것이겠지? 철부지 어린애가 아니고서야 설마 아무런 판단이 없지는 않겠지?"

화랑들의 멀뚱한 표정을 보며 법사는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화랑들을 숙소로 물리고 법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저들을 신라로 되돌려 보내면 이후에 벌어질 일은 자명했다. 왕은 저들은 물론 저들의 집안을 몰살시키고야 말 것이다. 내물왕의 후손이라 한들 역모에서 살아남을 길은 없어 보였다. 사도태후와 황룡사는 저들을 모른다고 발뺌할 것이고, 무엇보다 국보를 훔친 것만으로도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그렇다고 저들을 품는다면, 역모에 대놓고 개입하는 꼴이 된다. 수나라의 관원들이 뒤쫓아 온 마당에 저들을 계속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법사는 진퇴양난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고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도태후가 파놓은 수렁에 부지불식간에 걸려들고야 만 것이었다.

"지난날의 은혜를 갚으라는 것인가? 그 대가는 역모? 흐흐흐." 

법사는 촛불에 아른거리는 허공을 바라보며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금릉으로 향하는 배의 뱃머리에 서서 창해의 거친 파도에도 전혀 두렵지 않았던 그때, 무엇보다도 금릉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며 스스로 감격하였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저들처럼, 그때 나도 철부지였던가?' 

법사는 씁쓸한 헛웃음을 지었다.

"태후께서 관을 짜 놓고 기다리는 형국이 되었으니 피할 도리가 없겠군, 어쩔 수 없겠어."

법사는 화랑들이 가져온 상자를 다시 열었다. 영롱한 빛을 발하며 천사옥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금빛과 옥빛이 뒤섞이며 어두운 방안을 밝혔다. 

한동안 빛에 취해 꿈쩍도 않던 법사가 읊조리듯 말했다.

"이 물건은... 본디 있던 곳으로. 나 또한 본디 있어야 할 곳으로..."

알 듯 모를 듯 한 말을 되뇌며 법사는 제자 원안(圓安)을 불렀다. 원안은 신라 출신의 상좌(上佐:스승의 대를 이을 수제자)였다. 그는 스승의 표정과 손짓만으로도 그 뜻을 능히 헤아릴 수 있는 제자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이어졌고, 귀뚜라미 소리에 묻힐 정도로 은밀했다. 원안은 간곡한 표정과 손짓으로 스승과의 대화를 이어갔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날이 밝자 원안은 신라에서 온 화랑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그들은 새벽안개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다음 날, 수나라의 관원들과 함께 신라에서 온 조빙사(朝聘使)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법사의 환국을 수종(隨從:따라다니며 곁에서 시중을 들다)할 것이라고 했다. 조빙사들과 법사가 서로 덕담을 나누는 사이 관원들은 임천의 곳곳을 뒤졌다. 수나라 관원들 중 왕세의(王世儀)라는 자가 법사에게 읍을 하며 예를 표했다. 자신은 법사의 환국을 살피라는 황제의 명을 받았다고 했다. 법사 스스로 환국을 공표한 일이 없는 데도 신라의 조빙사와 수나라의 관원들은 환국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수나라의 조정(朝廷)과 신라의 왕실 사이에 모종의 결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법사는 제자들에게 환국 채비를 명했다. 이번 일은 사도태후가 파놓은 수렁 정도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수나라 황제도 가담한 역사적 소용돌이, 아니 해일이 몰아치듯 대격변이 일어날 조짐이었다.

수나라의 문황제(文皇帝:수나라의 초대 황제, 양견)는 법사의 환국을 허락하지 않다가, 수차례의 간청 끝에 윤허했다. 이미 수종 할 관원들을 파견한 이후였는데도 환국을 불허하며 신라의 애를 태우는 것은 분명 외교적 전략일 것이었다. 사백여년 간의 혼란기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국가의 주도면밀함을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수나라 조정은 법사의 환국을 통해 신라의 왕과 태후 중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가늠하는 것으로 보였다. 문황제가 환국을 허락한 것이 왕의 편인지, 태후의 편을 든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사신 왕세의를 직접 딸려 법사를 수행케 한 것은 분명 수나라도 모종의 계획을 준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환국 일자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제자 원안이 돌아온 것은 환국 일이 임박해서였다. 원안은 환국 준비를 진두지휘했다. 상좌로서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스승은 그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고,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환국 일의 아침이 밝자 법사는 임천 곳곳을 둘러보았다. 제자들이 그를 따랐고, 동고동락했던 수나라의 승려와 관리들이 나와 법사를 배웅했다. 황제는 이별을 아쉬워한다는 조서와 함께 무용수와 낙타 등에 올라탄 악사들을 보내왔다. 법사의 환국 행렬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원광법사를 실은 수나라의 군선(軍船)이 모습을 드러내자 국인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본 적 없는 거대한 군선이었다. 해안의 모래톱에서 기다리고 있던 쪽배들이 앞 다투어 나아갔다. 이들은 한시라도 빨리 법사를 보기 위해 바다 위에서 아우성을 쳤다.

이윽고, 법사가 갑판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법사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이자, 대중들의 환호소리가 더욱 고조되었다. 법사는 작은 배로 갈아타고 항구를 향했다. 제자들이 앞장서며 경전을 암송했다. 독경 소리는 모여든 대중들 속으로 밀물처럼 퍼져나갔다. 대중들은 합장을 하며 다가오는 배를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바닥이 평평한 배들이 모래톱 위로 사뿐히 내려앉자, 황룡사의 승려들이 붉은 주단을 펼쳐 길을 만들었다. 이윽고 낙타 등에 올라탄 악사들의 음악 소리와 함께 주단 위로 내려 선 무희들이 춤을 추었다. 이국적인 가락에 맞추어 무희들이 앞으로 나아가며 몸을 흔들었다. 머리와 얼굴을 가린 홍금(紅錦:주홍색 비단) 사이로 짙고 파란 눈이 빛났고, 손끝에 달린 붉은 비단이 간간이 파란 하늘 위로 펼쳐질 때면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법사가 타고 있는 배가 해안에 다다랐다. 법사의 제자들이 큰소리로 경전을 읊자 무희들이 뒤로 물러났다. 군중들이 붉은 주단 곁으로 밀려들었으나, 황룡사의 시자(侍者)들이 무작스럽게 밀쳐냈다. 승려들이 일산(日傘)과 가마를 높이 쳐들고 배와 주단 사이를 연결한 판때기를 밟으며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원광법사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몰려드는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법사는 진언(眞言)이 그려진 커다란 관을 쓰고 반짝이는 자줏빛 비단 가사를 입고 있었다. 법사는 일대 난장판에도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았고, 황금관과 가사는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찬란했다. 그 거룩한 빛에 몇몇 아낙네들이 감정을 주체 못 해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마치 생불(生佛:살아있는 부처)이 현현한 것과 같은 분위기였다.

황룡사의 상인(上人:원로 승려)들과 상대등 수을부가 법사를 영접했다. 원광은 가마 위에서 이들을 굽어보며 일일이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기품이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무희들을 앞세운 법사의 행렬은 다시 길게 늘어섰다. 황룡사의 시자들이 벽제 소리로 길을 텄다. 행렬은 서라벌을 향했다.


비형랑은 군중 속에 숨어 법사와 그 일행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삿갓과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거추장스럽게 달고 다니던 큰 코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삿갓의 틈으로 원광법사를 주시했다. 천사옥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법사가 쓰고 있는 높고 커다란 관이 영롱한 빛을 발산하고 있을 뿐이었다. 

왕은 항구로 떠나는 비형랑에게 이렇게 말했다.

"법사가 천사옥대를 차고 국인들 앞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새로운 왕이 당도했음을 만방에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왕의 표정과 목소리는 잔뜩 굳어 있었다. 

"국인들이란 불안하고 불만에 차있기 마련이니 새 왕을 더욱 바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구경거리를 찾아다니지. 더군다나 태후할미께서 새 왕으로 원광을 내세운다면 일순간에 신라 땅이 정토(淨土: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가 될 것이라 믿을 것이야. 정작 두려운 것은 태후와 황룡사가 아니다. 그것은 화풀이 대상을 찾는 국인들의 마음이다."

듣고 있던 비형랑이 소매 품에서 작은 호로병을 꺼내 들었다.

"무엇인가, 그것은?"

왕이 물었다.

"오래전 땅꾼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맹독입니다. 한 방울 만으로도 피가 굳고 뼈가 삭을 것입니다."

왕은 다음 말을 재촉했다.

"국인들의 마음이야 어찌되었든, 근심의 원인은 법사입니다. 살려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야밤을 틈타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겠습니다."

잔뜩 굳어있던 왕은 그제서야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왕은 반듯하게 접혀있는 지편을 건넸다. 지도였다. 남해의 항구에서 서라벌까지의 길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정방형으로 접혀있어 거리도 예측할 수 있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도를 펼쳐 든 비형랑에게 왕은 다시 물었다.

"뱀독은 먹어서는 쓸모가 없다던데 어쩌려고?" 

"뱀독과 어독을 썩은 것입니다. 혀끝에 닿기만 해도 죽습니다. 경각을 넘기지 않습니다."

왕은 굳은 표정을 풀고 오래간만에 호방하게 웃었다.

"섣불리 움직이지는 말아라. 아직 할미태후와 법사 간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너는 그 이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이니, 감시만 하고 있으면 될 것이다. 황룡사에서 경계를 엄중히 할 텐데 들켜서는 아니 되고, 특히 너는 누구도 알 법한 코를 달고 있으니 이내 발각될까 걱정이구나. 크하하하!"

월성의 남문을 빠져나올 때까지 왕의 웃음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형랑은 그 웃음의 의미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왕의 말은 알 듯 모를 듯했고, 이번에도 왕의 진심은 말소리가 아니라 웃음소리에서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분명 왕의 저 태연자약하거나 호방하기까지 한 웃음은 비형랑이 모르는 다른 무엇이 숨겨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남해로 가는 말 위에서도 비형랑의 고민은 법사의 암살이 아니었다. 요동치는 말 등 위에서 세상은 흔들리며 흐려졌으나 왕의 웃음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울렸다.


법사를 따르는 행렬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운문산 가슬갑사(嘉瑟岬寺)에 다다랐다. 끝없이 이어진 횃불과 등롱(燈籠)이 장관을 이루었다. 국인들은 사찰 마당이나 노지에 아무렇게나 여장을 풀었다. 승려들이 대증(大甑)이라 불리는 거대한 무쇠 시루 바닥에 대나무를 펴서 그 위에 쌀을 채워 넣은 다음 불을 지폈다. 이내 밥 짓는 냄새가 진동했다. 고단한 여정이었음에도 국인들의 표정은 밝고 활기찼다. 곳곳에서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제 문을 닫아라. 벌레들이 극성이구나.”

국인들의 왁자한 광경을 바라보던 법사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자 원안(圓安)이 시자들을 물리며 문을 닫았다.  

"너도 이제 그만 쉬어라."

멀뚱히 서있는 원안에게 말했다.

"비형랑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소승이 불침번을 서겠나이다."

"국인들이 저렇게 많은데 별일 있을라고? 왕은 섣불리 행동할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만에 하나..."

그때 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화랑 두 명이 법사를 직접 알현하겠다며 문지기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밤이 늦은데 웬 소란이냐?"

원안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문지기들이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틈을 타 화랑들이 원안 앞으로 다투어 나아갔다.

"소인들의 청을 들어주소서. 법사님을 꼭 뵐 수 있도록 허락하여주시옵소서.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꼭 법사님을 뵈어야겠습니다!"

화랑들이 막무가내로 들이밀자 원안도 어쩔 수 없었다. 원광법사 또한 곧 전장에 출전할 화랑들을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우성 소리에 국인들이 울타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화랑들이 법사 앞으로 나아가 오체투지를 했다.

"곧 전장으로 출발한다고?"

"아막성(阿莫城:현재의 남원 운봉면)으로 출병하라는 명을 받았사옵니다."

원광법사는 화랑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기골이 장대한 건아들인 줄 알았으나, 실재 그들은 아직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었다. 얼굴에 소년의 앳된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귀산(貴山)이라 밝힌 화랑이 법사 앞으로 나아갔다.

"소감(少監:초년 장교) 귀산, 아간(阿干:여섯 번째 품위의 관등으로 아찬이라고도 한다) 무은(武殷)의 아들이옵니다."

"그래, 나를 보고자 한 연유는 무엇인고?"

"소인들은 대대로 무사 집안의 자식들이라 전장의 사정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막상 첫 출전을 앞두고 나니... 백제의 군력이 아막성으로 모이고 있어 이번에는 큰 싸움이 있을 것입니다."

귀산은 하던 말을 멈추고,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얼마 전 황룡사 장륙삼세불 앞에 나아가 마음의 평안을 빌었사오나, 출전일이 다가올수록 불안한 마음 떨칠 길 없습니다. 이런 상태로 어찌 군사들을 이끌겠습니까? 간청 드리오니, 저희들이 마음을 다잡고 평안을 이룰 수 있도록 거룩한 말씀을 내려주십시오. 죽는 순간까지 그 말씀을 믿고 따르겠나이다."

귀산은 말을 마치고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렸다. 뒤에 있던 추항도 따라 했다. 법사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허허허! 두려움이 어찌 너희들의 불찰이겠느냐. 네 아버지들도 첫 출전을 앞두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랬던 아버지를 믿고 따른 다면 두려움도 사라질 터. 그래, 사친이효(事親以孝)가 알맞겠구나. 무엇보다 너희 둘은 서로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둘도 없는 사이이니 둘 사이의 믿음이 오죽할까 한다. 그러니, 교우이신(交友以信)도 너희들이 의지할 수 있는 말이겠구나. 어떠하냐? 너희들에게 위로와 의지처가 되겠느냐?"

귀산과 추항에 감동을 받은 법사는 지필묵을 준비하게 하여 직접 글씨를 써 하사했다. 화랑들은 감지덕지하며 글씨를 받들었고, 연이어 오체투지를 하며 물러났다.

"저들이 가상하구나. 아직 어린 나이인데 전장에 나선다니..."

흐뭇한 미소를 짓던 법사는 불현듯 표정이 굳어지며 제자 원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호구산으로 찾아왔던 화랑들은 어찌 되었느냐?"

제자 원안의 표정도 싸늘하게 굳어졌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법사께서는 아니 만난 것으로, 소승이 내쫓은 것으로 말했습니다. 필시 태후와 황룡사 측에서 그들의 행방을 탐문할 것이 온데... 소승이 원만히 처리하겠나이다."

법사가 원안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너도 처소로 돌아가거라. 황룡사 도반들과 국인들이 사방에 가득 지키고들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느냐. 너에게 많은 시름을 떠넘겨 내 마음이 편치 못하구나."

원안은 스승이 침상에 몸을 눕히는 것을 확인한 후 촛불을 끄고 물러났다. 그때, 법사의 처소 용마루 위로 잽싸게 날아든 검은 그림자가 있었으니... 그림자는 나무를 타고 법사의 처소 지붕에 올라가 있었다. 그는 기와를 걷어내고 그 틈으로 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고, 불이 꺼지자 어둠 속으로 이내 사라졌다.


날이 밝자, 비형랑은 왕에게 법사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낱낱이 보고하였다.

"항구에서부터 침소에 들기까지 모든 일은 전해드린 그대로이옵니다."

"'사친이효' 하고 '교우이신'이라? 이것이 법사의 첫 일성이라고?"

"그렇사옵니다. 대중들을 향해 미소와 손을 흔들 뿐 어떤 말도 없었사옵니다. 천사옥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빙사들의 전언에 의하면 태후가 보낸 구칠과 대세 또한 목격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원안이라는 자가 법사의 곁에 붙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변이 소란하여 자세히 듣지는 못했나이다."

"구칠과 대세를 어서 찾아라. 그들이 법사의 품 안에 있다면 그때 네가 준비한 물건의 사용처가 비로소 분명해질 것이다. 그 이전에는 경거망동하면 안 되느니라. 적군인지 아군인지 명백하지 않나니, 법사의 의중이 드러나기 까지는 신중해야 할 것이다."

비형랑이 물러나자, 왕은 아간 무은을 불러들였다. 

"네 아들이 법사를 찾았다고?"

"그러하옵니다.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비형랑으로부터 보고는 받았느니라. 네 아들이 전하는 바는 무엇이더냐?"

"이찬어른(2품위의 관등으로, 여기서는 비형랑을 가리킨다)의 말을 본의 아니게 들었습니다만, 이찬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법사의 표정이 매우 처량하였다 합니다."

"호오~ 그래? 그렇다면 네 아들이 한 번 더 수고를 해야겠다. 어떡하든 법사의 의중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사군이충'과 '교우이신' 만으로는 법사의 속내를 파악할 길이 없다. 법사의 그 문구는 단지 노사구(魯司寇:공자)의 말을 되풀이한 것일 뿐, 그의 속내는 드러나지 않았다. 반드시 법사의 입장을 확인해야 다음을 도모할 수 있나니, 네 아들에게 단단히 일러라!"

무운이 총총히 사라지는 모습을 왕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 시각,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는 법사의 처소를 찾았다. 왕세의는 황제의 하문(下問)을 전한다며 황금실로 자수된 양탄자를 폈다. 원광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의 질문은 이와 같았다

”황제께서 ‘서라벌에 도착하면 월성을 향할 것이냐 황룡사로 향할 것이냐?’라고 하문하시었소.”

황제의 질문을 전하는 왕세의는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법사를 살폈으나, 원광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뜸을 들이던 법사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곳 가슬갑사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소승은 이미 오래전 신라를 떠나 불국(佛國)에 귀의한 지라 세속의 정리(情理)에 휩쓸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법사의 답변이 끝나기 무섭게 왕세의가 말했다.
 
"황제의 명(命)도 세속의 정리에 속하는 것입니까?"

"그... 그것은..."

법사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황제의 의중에 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법사의 입장이 신라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왕세의가 당황하는 법사의 표정을 살피며 황금 양탄자를 거두었다.

"무방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습니다만, 법사께서는 황제의 땅에 살며 그곳의 물과 풀을 먹고살았으니, 그 값을 치뤄야 할 것입니다."

완곡하였으나 엄포를 놓는 말투였다. 법사는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허~ 그렇습니까? 소승, 황제께서 베풀어 주신 성은을 가벼이 여긴 적 없습니다. 저 또한 신라의 왕과 사도태후의 속내를 파악 중입니다. 그 전에는 어떤 말도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황제께서 내린 어지(御旨)를 거스를 수야 있겠습니까? 통촉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왕세의는 대국의 사신답게 신중하면서도 황제의 요지를 전달하는데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이었다. 왕세의는 그저 소리 내어 웃기만 할 뿐이었다. 법사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깊은 밤, 두 사람의 알 수 없는 웃음소리만이 서늘한 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다음 날 아침, 원안은 법사가 당분간 가슬갑사에 머물 것이라 공표했다. 법사를 따라나섰던 국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상기된 황룡사 승려들이 분산을 떨었고, 이내 황룡사의 상인(上人)들이 황급히 가슬갑사를 향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들은 분명 사도태후의 전령들일 것이었다. 법석을 떠는 국인들 사이로 얼굴을 가린 비형랑이 있었고,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도 국인들의 반응을 살피며 이리저리 배회했다. 

오후가 되자 황룡사의 상인들이 나타났다. 금빛과 자줏빛이 번쩍이는 거추장한 비단 가사를 휘날리며 문을 두드렸다. 그들의 행색만으로도 충분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국인들이 법사의 처소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법사는 문을 열지 않았다. 상인들은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주변으로 국인들이 모여들자 상인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 시각, 법사의 처소에는 귀산과 추항이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고, 밖이 소란한데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귀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들을 굽어 살피옵소서. 노사구의 말은 이미 들어 알고 있은 지 오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말로 저희들의 의지처를 삼을 수는 없사옵니다. 신라의 성인이신 법사께서 직접 깨우치신 바를 글로 하사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으로 저희들의 길을 밝힐 것입니다. 그 이전엔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듣고 있던 추항도 거들고 나섰다.

"저는 어려서부터 불법을 믿고 따르고 있사온데, 불살생(不殺生)하라는 부처의 말씀이 언제나 저를 괴롭힙니다. 병기를 잡은 손이 불도(佛徒)로서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 두렵사옵니다. 오늘 법사께 꼭 여쭙고자 하는 것이 있사온데 허락해 주실 런지요?"

문 두드리는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로 밖은 소란했다. 원안은 안절부절못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그러나, 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자한 표정으로 추항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외람되오나... 왕의 명(命)이 먼저이옵니까, 부처의 명(命)이 먼저이옵니까?"

귀산과 추항은 눈을 들어 법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순간, 화랑들의 얼굴에서 더 이상 앳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법사는 그들의 시선을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원안은 밖의 사정에 신경 쓰느라 화랑들과 법사 간의 긴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법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 너의 말은 봄비를 맞은 푸른 꽃 같더니, 오늘은 가시가 돋아난 엉겅퀴와 같구나. 너의 말은 마치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듯한데, 진정 그러한 것인고?"

귀산과 추항은 주춤했다. 자신들의 배후에 왕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법사의 속내를 알아차리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귀산과 추항은 손사래를 치며 오해라고 항변하였으나, 법사는 곧이듣지 않고 원안에게 하명했다.

"지필묵을 준비하거라. 이들에게... 아니 왕에게 밝혀야 할 글이 있나니!"


아간 무은이 왕 앞으로 나아가 묵서첩(墨書帖)을 받들어 올렸다. 무은의 뒤로 귀산과 추항이 엎드려 있었다. 왕은 묵서를 펼쳤다.

"들키고 말았다고? 그런데도 내치지 않고 묵서를 보냈다? 어디 보자... "

법사가 보낸 묵서첩은 총 세 개였다. 왕은 차례로 묵서첩을 펼쳐 글씨를 찬찬히 살폈다. 

"임전무퇴(臨戰無退)라~"

묵서를 보는 왕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제야 법사가 마음을 정했나 보구나. 허허허!"

왕은 다른 묵서첩을 서둘러 펼쳤다. '살생유택(殺生有擇)'이라 적혀있었다.

"호오~ 괴이한 지고! 이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축건은 인도의 별칭으로 인도의 태자, 즉 부처를 가리킨다)의 종지(宗旨: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를 거스르는 말이구나. 허허허! 파격이다 파격!"

왕의 표정은 이내 밝아졌다. 추항이 고무되어 입을 열었다.

"그에 대해선 법사께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육재일(六齋日:한 달 가운데서 몸을 조심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여섯 날)과 봄, 여름철에는 살생치 아니하여야 한다. 이것은 때를 택하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을 죽이지 않는 것이며, 또 미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다. 가축과 미물을 죽이지 않는 것은 물건을 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직 그 소용되는 것에 있어 많이 죽이지 아니할 것이니, 이것이 가히 세속의 계율이라 할 것이다'라고 전하셨습니다."

“하나마나한 소리! 그것은 말로써 말을 감추는 것이다.”

법사의 말을 전하는 추항이 머쓱해질 정도로 가볍게 일축한 왕은 마지막 서첩을 펼쳤다. 순간 왕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왕의 호쾌한 웃음에 어리둥절해진 무은이 물었다. 

"저희들이 소임을 다한 것입니까? 왕께서 웃으시니 저희들도 기쁘기 한량없습니다만, 어떤 연유로 웃으시는지 궁금하옵니다."

"하하하! 소임을 다하다마다. 이것으로 법사의 뜻은 명확해졌나니, 너희들의 공이 크다."

무은과 귀산, 추항이 물러가자 왕은 비형랑을 불렀다.

"이것이 법사가 전한 마지막 글이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비형랑은 왕이 펼쳐 든 서첩의 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이것으로 법사는 왕의 편이라 밝힌 것으로 봐도 무방할지요?"

"그렇다. 단정 짓기엔 섣부르다만, 이제 법사의 입장을 알만하다. 한시름 놓았어. 크하하하!"

왕의 웃음이 잦아지자 비형랑이 물었다.

"그럼, 이 시각부터 법사의 감시를 거두어도 될는지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 곧 가슬갑사로 출발해야 합니다."

"하하하! 네가 수고가 많다. 허나, 감시를 풀기엔 아직 이르다. 법사와 태후의 인연은 깊고 오래되었다. 말과 글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수나라의 사신은 법사에게 다음의 질문을 할 것이다. 그 답변마저도 확인한 후에 감시를 풀어야 할 것이야. 법사가 자신의 뜻을 밝혔더라도 다음 행보가 뒤따라야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이후에라야 네가 준비한 그 물건도 사용처가 드러날 것이다."

"호로병 안에 든 것 말씀이오니까?"

"새삼 물어서 뭣하려고? 크하하하!"

오랜만에 왕의 웃음소리가 월성(月城)의 담을 넘어 퍼지고 있을 즈음, 가슬갑사에 눌러앉은 원광법사는 왕세의와 대면하고 있었다. 왕세의는 다시 황금 양탄자를 펼치며 황제의 하문을 법사에게 전달했다.

“황제께서 법사에게 내리는 마지막 질문이오. ‘백고좌회는 마땅히 누구를 위한 것인가?’하고 물으시었소."

법사는 백고좌회(百高座會)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백고좌회’란 지역을 대표하는 전국 각처의 고승들을 모두 불러들여 거국적인 법회를 여는 것이다. 백여 명의 고승들이 빠짐없이 참석해야만 법회가 성립했고, 한 명의 고승이라도 불참하면 열릴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법사가 지역을 대표하는 모든 고승들이 왕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이끌어내야 했고, 그 좌장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라에 불교가 유래된 이래로 처음 있는 거대 법회를 왕을 위해 개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룡사의 상인들과 사도태후가 가만히 있을 리 없고, 각처의 고승들이 모두 왕을 옹호할리도 없었다. 법사의 긴장한 표정을 읽었음인지 왕세의는 말꼬리를 돌렸다.

"황룡사의 상인들을 문전박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먼 길을 다투어 온 늙은이들을 헛수고하게 하다니요. 흐흐흐."

왕세의의 의뭉한 웃음소리에 법사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괜한 만남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듯하여 그리하였습니다. 황룡사의 상인들이나 사도태후와 직접 만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소승은 그저 쓰임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황제께서 하명하시는 쓰임을요..."

"흐흐흐. 이제 그 쓰임이 명확해지셨습니까? 소신은 오랜 이국 생활이 고달프기만 하는군요."

"그래야겠지요. 황제께서 소승의 행보에 일일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데 지체되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왕세의가 흐뭇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황제께서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시는 일입니다. 백고좌회를 통해 신라의 왕과 돈독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소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법사는 더 이상 말을 잊지 않고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왕세의가 돌아가자, 법사는 제자 원안을 불렀다. 법사는 왕세의의 말을 남김없이 원안에게 전했다. 

"모든 책임을 법사께서 지시라는 말이군요! 수나라 황제의 뜻은..."

"그리되었구나. 이제 외면할 길이 없다. 황제께서 신라의 왕을 두둔하니 더 이상의 고민도 필요 없겠다. 황제의 명을 따를 수밖에..."

"신라의 왕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그럴 것이다. 왕이 황제에게 어떤 제안을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을 왕은 아니다. 아주 영리하고 민첩해! 생각 이상으로 말이다."

지체없이 원안은 백고좌회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사도태후와 황룡사 상인들의 반발을 어떻게 무마시키느냐가 최대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오랜 외국 생활로 원광이든 원안이든 신라 땅에서 수족같이 부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엄중하고 극비의 사안에 대해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날 밤, 법사의 처소 위로 또다시 검은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소리 없이 용마루 위로 내려앉은 검은 그림자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기왓장을 들추었다. 

법사가 고개를 들었다. 비형랑이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는 동작이었다.

"비형랑이라고 들었소만, 이리 내려오시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원안이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고, 법사의 처소 주변을 지키던 황룡사의 승려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원안은 비형랑에게 자리를 내어준 후 바로 문을 닫았다. 처소엔 원광법사와 비형랑만 남게 되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법사였다.

"익히 들어 알고 있었소. 비형랑? 코가 아주 크신 분이라 들었소만..."

비형랑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건을 벗었다. 움푹하게 패인 코가 드러나자 법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순탄한 삶은 아니었던 게로군. 그건 그렇고, 화랑들이 전한 글에 대하여 왕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이오?"

비형랑은 품속에 숨기고 있던 조그마한 호로병을 꺼내 법사에게 보였다.

"그건 무엇이관데 들어 보이는 것이오?"

"맹독이오이다. 스치기만 해도 죽소."

"호오~ 그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이오?"

"왕께서 법사의 손과 발이 되어주라 이르셨소. 이 조그만 것이 그 손과 발이오."

"불법을 따르는 비구에게 너무 가혹한 부담이구려!"

"왕께서 ‘살생유택’이란 묵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하라 하시었소."

다음 날 아침, 원안은 대웅전 앞마당의 범종을 울렸다. 가슬갑사와 황룡사의 비구들이 황급하게 대웅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국인들도 잠이 덜 깬 낯빛으로 꾸역꾸역 그 뒤를 따랐다. 원안은 모여든 대중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원광법사께서는 오늘 황룡사로 행차하실 것이오. 그곳에서 나라의 안위와 시름을 타개하기 위한 법회를 열 것이니, 모든 비구들과 국인들은 법사님의 뜻을 받드시오. 법회는 백고좌회로 거행될 것이니, 이 모든 준비는 황룡사에서 주관할 것이오. 행차는 재(齋:정오 즈음의 식사)를 마친 즉 출발할 것이니 비구들은 준비를 서두르시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룡사의 비구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법사의 황룡사 행을 알리는 파발마가 거친 발굽 소리를 내며 서라벌을 향해 내달렸다. 국인들은 풀었던 짐을 다시 꾸리기에 부산하였고, 가슬갑사의 승려들은 일산(日傘)과 가마를 꺼내 재정비하였다. 정오가 되어선 상대등 수을부가 왕의 직속 경호부대인 시위삼도와 함께 나타났다. 왕은 모든 일을 훤히 들여다보듯 했고, 아침 일찍 상대등을 서둘러 출발시켰다. 

해가 중천에 이르자 법사가 가마에 올라탔다. 햇빛을 가리는 일산이 활짝 펴졌다. 법사가 쓴 황금색 관이 다시 눈부시게 빛났다. 낙타 등에 올라탄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고, 그에 맞추어 무희들이 춤을 추며 행렬을 이끌었다.

행렬은 다시 법사의 뒤를 따르며 장관을 이루었고, 거리마다 국인들이 마중 나와 큰절을 올렸다.

계속...

글 그림 : 노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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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이우학교 미술교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