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불한당들의 시대
그림소설 <불한당들의 시대> 제1부 이야기의 서막➈
2019.06.08 00:39:43
<9> 불한당들의 시대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10. 아막성 전투

원광법사가 서라벌을 향하고 있을 즈음, 사도태후가 있는 영흥사(永興寺)로 검은 휘장을 덮은 가마들이 소리 없이 모여들었다. 휘장이 걷히자, 가면을 쓴 자들이 태후의 처소인 고두(庫頭)로 황급히 들어갔다. 그들의 움직임은 다급하였으나 주변을 살피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긴 하였으나 그 의관과 품행을 보아 황룡사의 상인(上人:원로 승려)임에 틀림이 없었다.


"원광이 백고좌회를 황룡사에서 거행할 것이라 합니다."

태후를 향해 엎드린 상인들이 긴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가면에 부딪혀 변조되며 울렸다.

"어림도 없는 소리! 원광이 백정(白淨:진평왕의 아명)의 편에 서겠다는 것인가? 이런 배은망덕한 일이 있나!"

태후의 역정에 몸을 사리던 다른 상인이 말을 이었다.

"속단하기엔 이릅니다. 아직 원광이 직접 의사를 밝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수나라 사신 왕세의가 법사 주변을 지키고 있어 암통(暗通)조차 어렵습니다만, 원광의 말을 들어본 이후에 움직여야..."

상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태후는 노여움을 드러냈다.

"꼭 들어야 알 수 있는 것인가? 내가 베푼 은혜를 생각한다면 원광이 자네들을 문전박대해서는 아니 되지!"

"왕세의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왕과 밀통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겠습니다. 법사는 오직 왕세의와 의논할 뿐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 화랑들이 법사를 만났다고 하는데..."

"화랑? 그들이 누군지는 알아보셨소?"

"워낙 경황없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 자초지종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시자들의 말에 의하면 법사의 묵서를 감지덕지하며 받아 갔다는데, 그 태도로 보아 왕의 밀정 같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심려할 일은 아닐 것이옵니다."

태후는 상인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원광을 가상히 여겼거늘, 이제 와서 내가 베푼 은덕을 모른 척 하겠다? 이런 고약한 화상을 봤나!”

"너무 심려치 마옵소서. 내일이면 남악(南岳:남산)을 지나 포석사(鮑石祠)에 다다릅니다. 포석사 신전(神殿)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수나라와 왕 사이에 모종의 결탁이 있다 한들, 원광이 신전의 옥진궁주(玉珍宮主)님을 참배하는 순간 국인들은 모두 원광이 태후마마의 사람이라 여길 것이옵니다. 그리되면 왕을 지지하는 황룡사의 화상(和尙:고위 승려)들도 마마의 편에 설 것이고, 국인들의 지지를 잃은 왕은 혼란에 빠질 것이옵니다."

듣고 있던 사도태후는 불에 그을려 일그러진 얼굴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암~ 그래야지! 그러나, 백정의 사악한 속내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소. 살모사 같은 세치에 속아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원광을 이용하여 왕을 처단하지 않는다면 나와 그대들의 앞날은 기약할 수 없소. 무엇보다, 황룡사 화상들을 단속하는데 한 치의 허술함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아시겠소?"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이 기회에 반드시 무도한 왕을 척결하여 태후(太后) 마마의 한을 풀고 대원신통(大元神統:왕비 또는 후궁을 배출하는 모계혈통)의 맥을 되살릴 것이옵니다. 너무 심려치 마옵소서."

"그대들이 열과 성을 다한다면 궁주 어머님께서도 감응하실 것이오. 대원신통을 세우시고 그 적통을 물려주셨거늘 여식이 신통치 못하여 꿈에서도 뵐 낯이 없소. 불효가 막심하오. 그런데, 듣자 하니 백정이 포석사의 전각을 새로 짓는다 들었소. 어찌 된 영문이오?"

"낙뢰가 떨어져 훼손된 지 이태나 지났사온데, 이제야 보수를 한다고 오두방정을 떨고 있사옵니다. 쯧쯧!"

안심이 되었다는 듯, 일그러진 태후 얼굴의 경련이 조금 진정되었다.

"원광이 포석사에 들지 못하도록 백정이 방해할 수도 있으니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아서는 아니 될 것이오. 다들 아시겠소?"

"마마께서는 저희들을 믿고 편히 주무십시오. 내일이면 저 오만한 왕의 낯빛이 사색이 될 것이옵니다. 하하하!"

밤이 깊어지자 검은 장막으로 뒤덮인 가마들이 하나 둘 영흥사를 황급히 빠져나갔다. 가마가 사라진 영흥사엔 다시 칠흑과 같은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다만, 고두를 감싼 천경림(天鏡林)에선 소쩍새 울음소리가 어느 순간 끊겼고, 무언가에 놀란 산새들이 검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남악을 지나 서라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이르자 원광은 행렬을 멈추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기와지붕 사이로 남천(南川)과 서천(西川)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월성 뒤로 주작대로와 북궁의 전각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원광은 이십 오세의 젊은 나이로 혈혈단신 금릉으로 향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이제 노구의 몸으로 그때 뒤돌아 봤던 언덕에 다시 서 있는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남악 봉우리마다 형형색색의 석상과 불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천축(天竺)을 방불케 하는 장관이라 법사는 내심 뿌듯해했다. 저 멀리 서라벌을 관통하는 남천을 따라 월정교와 춘양교가 불쑥하고, 강가를 따라 드문드문 생겨난 모래더미에는 개구쟁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원광은 장탄식과 함께 저도 모르게 시구를 읊었다.  

'산천은 의구하나 젊은이는 늙은이가 되었네. 아이들이 쫓아오며 웬 화상인지 물을 것이 분명 하네~’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수나라 사신 왕세의가 어느새 법사 곁으로 다가왔다. 

"오래된 기억입니다만... 유년의 기억이란 늙을수록 더욱 또렷해지는군요. 허허."

"이해가 됩니다. 저는 벌써 대흥성(수나라의 수도)이 그리워 밤마다 꿈을 꾸는걸요."

법사와 왕세의가 서로 담소를 나누는데 황룡사의 승려들이 긴장된 얼굴로 다가왔다.

"이제 곧 포석사에 다다를 것이 온데, 신궁에 참배할 계획이신지..."

법사는 잠시 머뭇거리며 왕세의를 바라봤으나, 그는 그저 웃으며 자신의 가마로 걸어갔다.

"이 나라를 처음으로 법(法:부처의 교리)의 나라로 만드신 법흥성왕께 당연히 예를 올려야지! 어서들 가자!"

법사는 주변으로 모여든 국인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법사의 말이 끝나자 황룡사의 비구들이 반색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원안은 스승의 표정을 낱낱이 살피며 불안한 마음에 두 손을 꼭 모을 뿐이었다. 언덕을 내려서자 포석사의 누대가 손에 잡힐 듯 시야에 들어왔다. 흰 장막으로 가려진 누대가 무성한 대나무 숲과 대조되며 더욱 선명했다. 

원광법사가 포석사 남문에 다다르자, 하얀 도포와 백건(帛巾)으로 치장한 신관들이 마중을 나왔다. 법사는 눈을 들어 포석사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포석사는 사도태후가 법흥성왕(法興聖王:불교를 국교로 선포한 신라 제23대 왕)의 신주(神主)를 모시기 위해 설치한 신궁(神宮)으로, 오월(吳越:양자강 유역의 중국 남방)의 건축을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었다. 남문으로 들어서자 낮게 드리운 장랑(長廊)이 길게 이어졌다. 참배하는 이들이 저절로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장랑의 끝에는 월(越)나라의 수도였던 소흥(紹興)의 절경을 그대로 옮긴 정원이 있었다. 특히, 소흥에서 명승(名勝)으로 이름난 섬계(剡溪)의 조아강(曹娥江)과 천암십구봉(穿岩十九峯)을 표현한 기암괴석 사이의 물줄기는 장대한 규모는 아니었으나 그 세밀하고 교묘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신관들이 천암십구봉 위에서 나뭇잎 모양의 배 위에 황금 술잔을 띄웠다. 조아강 물줄기를 따라 술잔을 실은 조막 배가 떠내려 왔다. 소흥의 난정(蘭亭)에서 비롯된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예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술잔이 원광 앞에 다다르자 신관이 잔을 건져 법사를 향해 받들었다. 흐르는 물과 신성한 술로서 부정과 악을 씻어내는 의식으로 신궁 참배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의례였다. 원광이 잔을 비우자 신관들이 법사의 앞으로 도열하여 걸음을 이끌었다. 육중한 문이 열리며 신전의 내부가 드러났다. 원광과 원안, 그리고 왕세의는 신관을 따라 어둑한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침향(沈香)이 짙게 배어 있는 복도를 지나자 본당(本堂)의 문이 열렸다. 신관들이 향초에 불을 붙였다. 중앙에 우뚝 솟은 보좌(寶座)의 장막을 걷어내자, 법흥왕의 성상(聖像)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성상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원광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 했다. 법흥왕의 성상! 그것은 옥진궁주의 몸과 서로 뒤엉켜있는 남녀교합상(男女交合像)이었다. 법흥왕의 성체(聖體:임금의 몸)를 백옥처럼 하얗게 빛나는 옥진궁주의 몸이 뱀처럼 온통 휘감고 있었던 것이었다. 더더욱 법사를 당혹케 하였던 것은 시선이었다. 옥진궁주는 고개를 꺾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은 참배자를 또렷이 주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법사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신관이 날카로운 소리를 길게 뽑으며 박(拍:박달나무를 엮어서 만든 타악기)을 쳤다. 박소리에 맞추어 원광법사는 신관의 동작에 따라 오체투지 하듯 바닥에 엎드렸다. 원안과 왕세의도 주춤하더니 머리를 땅에 붙이며 몸을 굽혔다. 이것은 예경(禮敬) 방식 중 최상의 공경을 표하는 것으로, 황제나 부처를 경배하는 것과 같았다. 당황한 원광은 고개를 들어 화상을 올려다보았다. 옥진궁주의 눈이 조롱하듯 내려다보고 있었고, 붉은 입술 사이로 뱀처럼 혀를 날름거릴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황금빛 머릿결이라니, 이것은 현실에 있을 법한 옥진궁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반면, 법흥왕은 초점 잃은 눈으로 마치 목석처럼 굳어버린 듯 했다. 그제야 원광은 포석사의 주신(主神)은 법흥성왕이 아니라 대원신통의 옥진궁주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것은 함정이나 다름없다! 이 순간 이후로 나는 법흥성왕께 예를 올린 것이 아니라, 옥진궁주에게 굴종한 것으로 알려질 것이고, 사도태후는 이를 이용하려들 것이 분명하다!'

원광은 당혹감에 얼굴이 상기되었다.

'법흥성왕이 누구신가! 이 나라의 기틀을 확립한 성군이 아니시던가! 율령(律令:신라 최초의 성문법)을 세우시고, 불법(佛法:불교의 교리)을 국교로 받드시고, 군대(軍隊)를 정비하여 금관가야를 정복하시고, 공복(公服:관리들의 복식)을 제정하시어 신하와 군주의 위계를 확립하셨던 만세(萬世)의 성군(聖君)이 아니시던가! 그런데, 어이하여 한낱 궁주(宮主:주로 왕의 잠자리를 보살피는 후궁)에게 농락당하는 모습이라니!'

원광의 혼란은 이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어졌다.

"무도(無道)하도다! 무참(無慘)하도다! 대원신통의 기광(氣狂)스러움이여~"

원광은 어질한 정신으로 겨우 몸을 일으켜 황급히 본당을 빠져나왔으나, 신전 앞에서는 또 다른 소란으로 웅성이고 있었다. 마당엔 황룡사의 비구들과 포석사의 신관들이 비형랑의 무리들을 막으며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는 원광은 두 무리 사이에 승강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황룡사의 상인들이 비형랑을 둘러싸고 신궁 앞에서 예를 표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비형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관들을 밀치며 자신은 왕명을 수행하고 있으니 길을 비키라고 고함을 질렀다. 소란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원광은 마당으로 내려섰다. 걱정이 된 원안이 소매를 붙잡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법흥성왕을 모신 신궁에서 웬 소란이냐!"

쩌렁쩌렁 울리는 법사의 호통 소리에 소란은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원안이었다. 수십 년 동안 모셨던 스승이 이토록 역정을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곳은 법흥성왕 전하의 영혼이 잠드신 곳이거늘, 대관절 무슨 일로 난동을 부리는 것이냐!"

법사의 추궁에 주저하는 신관들을 뿌리치고 비형랑이 앞으로 나섰다.

"저들이 성상(聖像)의 개막을 이유 없이 막고 있습니다!"

비형랑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다. 법사는 신전 맞은편의 흰 장막으로 눈길을 돌렸다.

"개막? 장막 뒤에 성상이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오늘 법사께서 포석사에 오시는 것에 맞추어 왕께서 직접 하사한 성상입니다!"

"그래? 누구의 성상이란 말이냐?"

비형랑이 뒤를 돌아보자, 신관들과 몸싸움을 벌이던 화랑들이 흰 장막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여전히 신관들과 황룡사의 비구들은 길을 비키지 않았다. 또다시 법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왕께서 하사한 것이라 하지 않느냐~ 너희들은 왕명을 거역할 샘이더냐?"

법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랑들이 신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흰 장막에 연결된 끈을 잡아당겼다. 장막이 땅으로 떨어지자, 누대를 가린 큰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검(長劍)을 쥐고 있는 무사(武士)의 상이었다. 

"저 무사는 대관절 누구이더냐?"

법사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비형랑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호국선도(護國仙徒)의 수장, 국선(國仙) 문노(文弩)이시옵니다!"

"문노?"

"그렇습니다. 풍월주 문노께서는 직접 호국 검법을 창안하시어 화랑들을 가르치셨고, 화랑도의 기틀을 세우시고 몸소 실천하셨던 분입니다. 하여 모든 화랑들이 정신적 어버이로 풍월주님을 따르고 있사온데, 이를 가상히 여기신 왕께서 포석사에 신주를 모셔 만고의 지표로 삼으라는 명을 내리셨사온데..."

듣고 있던 포석사 신관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끊었다.

"이곳은 법흥성왕 전하와 옥진궁주님의 신전이오. 풍월주이기는 하나 어찌 일개 화랑 따위를 끌어들인단 말이오?"

신관의 대구에 비형랑이 발끈했다.

"그 무슨 망발이오! 문노께서는 호국선으로 화랑도를 정립하시어 나라의 근간을 세우신 분이오. 일개 화랑 따위라니! 그 말은 화랑도 전체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사도태후께서 이 포석사를 세우실 때는 두 분만을 위한 신전이었소. 다른 이해와 목적은 가당치 않소. 문노의 신주는 불가하오! 나는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핏발 선 신관의 절규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비형랑은 호기로운 웃음을 내지르며 신관들 앞에 우뚝 섰다.

"하하하! 그대는 지금 왕명을 거역하는가? 포석사는 반왕(反王)을 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가?"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관들은 서로의 팔을 바싹 끼고 비형랑과 화랑들에게 맞섰다. 그 와중에 신관이 흥분을 주체 못하고 대뜸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단 한발 짝도 물러설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태후마마의 명을 따를 뿐이다!"

격해진 상황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신관들이 비형랑과 화랑들을 업신여기기 위해 뱉어낸 말이었으나, 비형랑은 꼬투리 물듯 계속 따져 들었다.

"오호라~ 이제야 너희들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지금 그 말은 태후마마와 왕을 이간질 하려는 것이렸다? 태후께서 비구니(여자승려)가 되어 속세의 연을 끊은 지가 오래거늘, 그런 마마를 앞세워 너희들 마음대로 흉악한 말을 입에 담는구나! 이것은 필시 네놈들의 사사로운 뜻임이 분명하다. 신관으로서 왕의 뜻을 받들어도 부족할 판에 왕명을 거역하려들다니, 너희들은 역도다! 낭도들아~ 이놈들을 당장 포박하라!"

비형랑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랑들이 신관들과 멱살 다짐을 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일대 난장판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화랑들은 육박전의 고수들이었다. 신관들은 여지없이 고꾸라지거나 내동댕이쳐졌다. 신관들이 결사적으로 대항해본들 별무소용이었다.

소란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원안은 원광을 남문으로 이끌었다. 원광도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제자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나라 사신 왕세의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원안은 서둘러 스승을 가마에 태우고 포석사를 벗어났다. 요란하게 흔들리는 수레 안에서 원광은 참담한 심정을 가눌 길 없었다. 더 이상 포석사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원광은 수레를 멈추게 했다. 원광이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며 서편 하늘의 능선을 따라 의미 없는 시선을 두고 있을 즈음, 왕세의가 헛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참으로 대단합니다.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대국의 사신에게 못 볼꼴을 보였습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농이시오 아님 비웃는 것이오? 신라의 속살을 보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긴 하오만, 면전에서 조롱할 것까지야 없지 않겠소?"

법사가 얼굴을 붉히자 왕세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좀 전의 난리법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라의 왕 말입니다. 신라왕의 치밀한 계획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난동으로 모든 우려를 잠재웠어요. 참으로 대단합니다. 허허허~"

왕세의는 법사의 심사를 모두 꿰뚫고 있다는 듯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당혹해하시는 법사의 태도도 물론 좋았습니다. 선명해지기 전까진 어느 편도 아니라는... 아주 능수능란하셨습니다. 물론 법사보다 신라왕이 한 수 위인 것 같습니다만. 아니 몇 수 위일지도 모르지요. 허허허~"

왕세의는 법사가 응답할 틈도 없이 뒷짐을 지고 자신의 가마 쪽으로 걸어갔다. 법사는 우두커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왕세의의 모습 뒤로 석양이 유난히 붉어지고 있었다. 발걸음을 서둘러야만 했다. 땅거미가 낮게 깔리고 나서야 법사의 일행은 황룡사에 다다랐다. 법사를 맞이하는 국인들이 거대한 인왕상(仁王像)이 있는 남문(南門) 앞으로 무리 지어 있었다. 횃불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황룡사의 담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법사는 원안의 부축을 받으며 수레에서 내렸다. 황룡사의 승려들이 법사에게 몰려와 합장하며 통성명을 했다. 황룡사뿐 아니라 각처의 사찰에서 온 승려들도 법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법사와 인사를 나누려는 승려들의 줄이 밤늦도록 이어졌다.


날이 밝자마자 수나라 사신 왕세의가 법사의 처소를 찾았다. 왕세의는 대뜸 백고좌회를 서두를 것을 요구했다. 문황제(文皇帝:수나라의 초대 황제 양견)의 명을 조속히 받들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지켜볼 일도 기다릴 일도 없다고 말했다. 각처의 승려들이 집결해 있는 이때가 최상의 적기라고 했다. 

왕세의는 더 이상 자신의 뜻을 숨기지 않았다. 포석사의 일로 자신의 입장은 분명해졌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포석사에서의 소란은 하룻밤 사이에 서라벌에 파다하게 퍼졌다. 국인들은 주로  문노의 이야기만 하였다. 문노가 새롭게 포석사의 주신(主神)으로 배향(配享)되었다는 소문만 무성하였고, 원광법사가 옥진궁주를 참배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회자되지 못했다.

왕세의의 독촉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수나라 문황제의 명을 홀로 받들고 있는 사신(使臣)이 아닌가! 그러나, 황룡사의 상인(上人:고위급 승려)들은 마냥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그들이 계속 뭉그적거린 다면 백고좌회는 물 건너가는 것이다. 왕세의는 조급증이 났는지 법사와 황룡사 상인들의 회의에 나타났다. 황룡사의 상인들은 가뭄 때문에 민심이 흉흉한 마당에 막대한 경비와 인력을 들여 백고좌회를 여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법사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머뭇거렸고, 왕세의는 지루하게 이어지는 승려들의 말을 묵묵히 경청하기만 했다.

승려들이 물러나자 왕세의는 법사와 독대했다.

"저들의 반대가 완강하군요! 놀랐습니다. 이 정도일 줄은..."

법사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저들은 분명 사도태후의 명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시간을 끌어 서라벌로 모여든 승려들이 각각의 말사(末寺)로 되돌아가면 백고좌회는 다시 기약하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황룡사의 다른 승려들도 저들의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쉽지 않겠습니다."

왕세의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걱정이긴 합니다만, 저들을 제쳐놓고서라도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당장 시작하십시오. 백고좌회는 황룡사가 아니라 법사께서 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반발을 무릅쓰고라도 말입니다. 흐흐흐~"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왕세의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법사께서도 왕이 먼저 나서기를 기다리고 있으십니까? 저처럼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왕은 보고 있거나 듣고 있을 것입니다... 아주 은밀하게 말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왕세의의 갑작스런 말에 법사는 잠시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왕세의는 눈을 들어 건물의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신라 제일의 사찰답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건물이라니요! 천정이 까마득하게 높군요. 겹겹의 대들보를 보십시오. 대단합니다. 허허허!"

왕세의의 말에 법사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군요. 양상군자(梁上君子)가 숨어들어도 전혀 모를 지경입니다. 하하하! "


한식경이 지난 시각, 왕과 비형랑이 서로 대면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더냐?"

"왕께서 먼저 나서서 일을 꾸미실 거라 하였습니다."

"네가 들으라고 한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뜸을 들이던 왕이 비형랑에게 물었다.

"이참에서 정리를 해야겠지?"

"분부만 내려 주시옵소서."

"결국 모든 의심은 내게로 쏠리지 않겠느냐? 그래도 짐의 할마마마 아니겠느냐. 왕이 패륜하면 국인들이 새로운 왕을 찾을 것이다."

"우연한 사고로 가장할 것입니다. 왕께서 곤궁해지면 소신이 나설 것입니다."

왕이 비형랑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너에게도 할미가 아니더냐?"

"아바마마의 원수일 뿐이옵니다. 왕의 적은 곧 저의 적이기도 합니다."

왕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런 것이냐? 하하하!"

읍(揖)을 하며 뒤로 물러나는 비형랑을 향해 왕이 말했다.

"충신이다. 짐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충신! 내 잊지 않으마... 네가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하하~"

비형랑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왕은 입가의 미소를 풀었다. 비형랑은 왕의 웃음소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호탕한 웃음소리에는 비형랑에 대한 의심을 숨기고 있다고, 그 의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웃는 것이라고 비형랑은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황룡사에서는 해괴한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상인(上人:도력이 뛰어난 고승)들이 앉은 자세로 입적(入寂)했던 것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나 오랜 굶주림으로 피골이 상접한 부처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바짝 마르며 검붉게 변한 피부와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인들의 시신을 두고 몇몇 승려들은 죽음이 석연치 않다고도 하였으나, 좌탈입망(坐脫入亡:앉아서 해탈한 채로 죽음을 맞이함)의 소문은 서라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국인들은 장차 나라에 서기(瑞氣)가 깃들 징조라고 여겼다. 어떤 이들은 모로 누워 열반에 든 부처를 예로 들며, 좌탈입망한 황룡사의 상인들이 더욱 대단한 공력의 소지자들이라며 입에 침을 튀기며 찬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황룡사 내부에선 흉흉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왕이 사도태후와 밀통하고 있던 상인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었다. 이후로 계속해서 황룡사의 상인들이 좌탈입망에 들자, 저잣거리의 소문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라벌의 민심이 황룡사의 일로 흉흉해질 즈음, 국경으로부터 전쟁의 소식이 들려왔다. 아막성(阿莫城)에서 오는 파발마의 발굽소리가 서라벌을 뒤흔들었고, 일찍이 없던 큰 싸움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황룡사에서는 상인들의 죽음이 계속 이어졌지만, 전쟁의 소식에 묻히거나 지워졌다. 전쟁의 기운은 서라벌을 숨죽이게 만들었고, 거리에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임박한 전쟁은 모든 의심과 소문을 집어삼켰다.


세차게 휘날리는 군기(軍旗)들이 줄을 지어 월성(月城)을 향했다. 까마득하게 늘어선 병장기와 갑주(甲胄)가 햇살에 눈부시게 빛났고, 군사들은 짐승처럼 거친 입김을 토해냈다. 왕은 존예문(尊禮門)의 단상에 올라 군사들을 굽어보았다. 왕의 거대한 몸은 그날따라 더욱 까마득해 보였다. 왕은 파진찬 건품(乾品)에게 부월(斧鉞:전장에 나서는 군사령관에게 왕이 직접 하사하는 쌍도끼)을 내려 군사를 총괄케 하였고, 부관으로 아간(阿干) 무은(武殷)과 비리야(比梨耶)등을 임명했다. 귀산도 아버지 무은 휘하의 소감(少監:초급장교)으로 배치되었고 추항도 함께 했다.

무왕(武王:백제의 제30대 왕)은 아막성을 기필코 점령해야만 했다. 아막성의 신라군은 백제의 왕경(王京)을 언제라도 기습할 수 있는, 말하자면 인후(咽喉)에 들이댄 창검과 같았다. 하여, 백제군이 아막성을 공격하리라는 것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고, 신라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무왕이 군사를 일으켰다. 아막성을 몇 겹으로 에워쌀 수 있는 대군이었다. 무왕의 전략은 아막성의 신라군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봉쇄작전이었다. 외부의 지원을 막아버리면 신라군은 고사되어 자멸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 위해선 신라의 지원군을 차단해야 했다. 그것이 아막성 전투의 성공을 가늠 하는 열쇠였다. 

백제의 총사령관 좌평(佐平) 해수(解讐)는 곳곳에 복병을 매복시켰다. 신라군이 진군할 법한 모든 길목을 차단하는 전략이었다. 이에 맞서 신라군은 군대를 분산시켜 각자 이동하는 전략을 세웠다. 사령관 건품은 아막성에서 집결하는 시일을 정해 장수들에게 전달했고, 그에 따라 부대별로 아막성을 향했다.

아간 무은은 본진과 떨어져 후위를 맡았다. 선발대에는 비리야의 부대가, 본진은 사령관 건품이 직접 통솔했다. 백제의 매복병은 신라군의 배후를 노릴 것이 분명했다. 선발대와 본진의 무사(無事)를 위해서는 무은의 부대가 백제의 기습을 막아내거나 버텨 내야만 했다. 백제군은 신라의 선발대와 본진과의 전투에서 북소리와 함께 함성만 지르고 물러갔다. 결전의 분위기만 돋우고 줄행랑을 쳤던 것이었다. 꽁무니를 빼는 백제군을 우습게 본 신라군은 개별적으로 이동하던 행로를 변경하여 지름길인 천산(泉山)을 넘어가기로 하였다.

함정이었다. 백제군은 천산 주변으로 산재한 못과 웅덩이에 매복하고 있었고,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하였다. 선두에 선 군마와 뒤따르는 수레바퀴 소리를 따라 잔뜩 긴장한 신라군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났다. 짙은 안개 탓에 언제 어디서 백제군의 습격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은은 아군과 적군의 구분을 위해 망토를 뒤집어 빨간 속피를 드러내도록 했다.

척후병들이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 전방이 무사하다는 신호였다. 안절부절못하는 말을 진정시키며 무은은 조심스럽게 군사들을 전진시켰다. 척후병들이 앞으로 나아가 사주경계를 하면 뒤이어 본진의 군사들이 나아가는 방식이었다. 무은은 극도의 긴장을 숨길 수가 없었다. 백제군이 기습을 노리기에 너무나도 적기(適期)이자 적소(適所)였다. 그러나, 백제군은 보이지 않았다. 다소 안심이 된 무은은 군사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말을 멈추고 독려했다. 후미를 맡은 귀산과 추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들의 늠름한 모습에 무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였다. 덤불로 위장하고 있던 백제군들이 일제히 일어나 무은이 타고 있는 말을 향해 돌격했다. 사방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며 신라군의 갑주를 뚫었다. 식별을 위해 붉은 속피를 드러냈던 것이 오히려 실책이었다. 백제 궁수들은 안개 속에서도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었다. 양치류 덤불로 온 몸을 위장 한 백제군은 마치 숲 속의 곰이 미쳐 날뛰는 것과 같았다. 어느새 곰들이 내던진 갈고리가 무은의 갑옷을 꿰뚫었다. 무은은 말 등에서 내동댕이쳐졌다. 곰들이 칼을 뽑아 들고 무은을 향해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귀산이 말을 몰았다. 추항이 귀산의 배후로 달려드는 백제군을 구겸창(鉤鎌槍:갈고리 모양의 가지가 달려있는 창)으로 제압하며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 아버지~"

무은은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의식을 잃었다. 귀산은 아버지 무은을 일으켜 세우고 호위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버님을 데리고 천산을 벗어나라. 안개 속에서 대항해 본들 이길 도리가 없다. 서둘러 여기를 빠져나가라! 어서!"  

귀산은 무은의 몸을 말 등에 걸쳐 올렸다. 엉덩짝을 세차게 때리자 말이 놀라 앞으로 튀어나갔다. 군사들은 무은의 말을 쫓아가기에 바빴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막으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귀산은 호각을 세차게 불었다. 뿔뿔이 흩어졌던 군사들이 호각 소리에 모여들었다. 군사들이 진(陣)을 짜고 방어 준비를 끝내자 귀산은 절규하듯이 외쳤다.

"우리가 여기서 버텨야 다른 군사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 이곳이 우리의 죽을 자리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자! 원광법사께서 우리들을 위해 내려준 말씀이 있다. 임전무퇴! 그렇다! 신라의 군사들은 전장에서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군사들은 모두 귀산의 연설에 감동되는 바가 있었다. 진(陣)을 완료한 신라군들은 모두 칼을 뽑고 창을 세워 안개 속의 곰, 즉 백제군과의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그때, 누가 먼저 외친 소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의 병사들은 똑같은 말을 연호하고 있었다.

"임전무퇴! 임전무퇴! 임전무퇴!"

독기 서린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귀산의 어깨를 툭 치는 이가 있었다. 추항이었다. 추항을 확인하는 순간, 귀산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맺혔다. 추항이 귀산의 어깨를 다독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법사께서 임전무퇴만 이야기했는가? 교우이신도 말씀하셨지. 자네의 저승길은 외롭지 않을 것이네. 내가 길동무해줄 터이니..." 


귀산과 추항은 칼과 창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병사들은 귀산의 호각소리에 맞춰 진(陣)을 유지하며 백제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끊임없이 달려드는 백제군을 감당해낼 수는 없었다. 신라군이 하나 둘 쓰러지면서 단단하게 구축된 진(陣)은 무너져갔다. 사방에서 날아든 화살이 귀산과 추항의 몸에 박혔다. 귀산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숲 속의 곰처럼 양치식물의 덤불로 교묘하게 위장한 백제 병사들이 귀산과 추항을 향해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칼과 도끼의 예리한 날이 갑주를 뚫고 귀산과 추항의 살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곰들의 마지막 공격은 심장과 목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도끼와 칼의 틈으로 붉은 선혈이 뜨거운 김을 뿜으며 철철 쏟아졌다. 

결국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박힌 시신 주변으로 최후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신라군의 주검들이 쌓여만 갔다.

귀산과 추항이 백제군의 습격을 지연시킨 덕분에, 무은은 아막성에 무사히 입성했다. 사령관 건품과 비리야의 군대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성문이 열리며 무은의 군대가 아막성내로 들어가자 사방에서 환호소리가 터져 나왔다. 병사들은 발을 구르거나 창과 방패를 두드려 소리를 냈다. 다만, 무은은 계속 뒤를 돌아보며 주춤주춤 했다. 육중한 성문이 닫힐 때까지 무은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끝내 아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전에 앞서, 백제의 총사령관 좌평(佐平) 해수(解讐)는 아막성을 향해 고함쳤다. 소리꾼이 확성기에 대고 그대로 옮겼다. 

"너희들의 왕이 국경을 함부로 허물고 성을 쌓더니, 이제는 군사를 보내 싸움을 일으키는구나. 그 무도함이 도를 저버리니 우리 왕께서 걱정하고 염려하시기 오래되었도다. 오늘, 마땅히 너희들에게 큰 가르침을 내리고자 하니 죽음으로 뉘우침을 달게 받으라~ "

아막성을 포위한 사만 여의 병사들이 깔깔 웃으며 야료했다. 야료 소리는 북소리에 맞추어 함성으로 증폭되었다.

아막성 망루에 사령관 건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연설 또한 소리꾼들에 의해 사방으로 퍼졌다.

“이미 너희들의 기습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보아라! 별 탈 없이 신라의 증원군이 모두 입성했다. 뉘우치고 물러간다면 너희들의 퇴로는 안전할 것이다. 네 놈들처럼 매복으로 후위를 노리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해수가 격분하며 말했다.

“안될 소리를 하는구나. 누가 누굴 보고 물러가라는 것이냐? 우리의 땅을 침범한 것은 너희들이다! 물러가도 너희들이 물러갈 일이거늘...”

분에 겨워 말끝을 흐린 해수가 팔을 들어 올리자, 장대에 꽨 시체가 높다랗게 올려졌다. 귀산과 추항의 시신이었다.

“똑똑히 잘들 보아라! 너희들도 곧 이런 신세가 될 터인즉, 저항해 본 들 소용없다. 하하하!”

백제의 군영에서는 키득거리며 비웃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으나, 아막성의 신라 진영에서는 무서울 정도의 침묵이 퍼져나갔다. 괴산과 추항을 창끝에 꾀어 시신을 농락한 건 실책이었다. 두려움을 심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신라군의 분노를 일으키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아막성에 정적이 감돌자 해수가 목을 빼고 신라군의 동태를 살폈다. 그때였다. 매복해 있던 신라군들의 해수를 호위한 본진으로 달려들었다. 이들은 백제군이 그랬던 것처럼 양치식물의 넝쿨로 온몸을 위장하고 있었다. 완벽한 역습이었다. 혼비백산한 백제군은 사분오열되어 진영이 흐트러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아막성문이 열리며 무은을 필두로 기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해수 이놈~ 내 아들의 시신을 농락하다니! 네 놈이 그러고도 무사하기를 바라느냐! 네놈의 몸뚱이도 대창에 꾀어 사지를 찢어발길 것이다. 해수 이놈~ ”

무은 뿐만이 아니었다. 후방을 집중 공략했던 백제군을 어린 장수 두 명이 죽음으로 막아내자, 그 영웅적인 행위의 감명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의 좌평 해수가 두 장수의 시체를 농락했던 것이었으니, 신라군은 치를 떨며 백제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세는 급격하게 신라 측으로 기울었다. 백제군이 했던 매복 공격을 그대로 되갚아 준 것은 주효했다. 백제군은 성문 밖에 복병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만 여명의 백제군은 혼비백산하듯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하여, 아막성 주변으로는 백제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피가 강을 이루었다. 백제의 총사령관 해수와 몇몇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달아날 수 있었다.

신라의 대승이었고, 승전보는 이내 서라벌로 전해졌다.

수일 후, 왕은 아나(阿那) 들판으로 행차했다. 왕을 따라 대신들과 승려들의 화려한 옷이 들판의 거센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원광법사 또한 왕의 옆에 자리했다. 대승을 거둔 건품의 군대를 맞이하는 것이기에 모두 들떠있었다. 저 멀리 깃발과 함께 승장(勝將)의 행군을 알리는 권마성이 울려 퍼졌다. 환한 표정의 건품이 달려와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엄한 명을 받자와 무도한 백제놈들을 섬멸하고 왔나이다.”

“고생이 많았소. 파진찬의 노고로 이제 백제가 함부로 거병하지는 못할 것이오.”

"모든 것이 왕께서 보살펴준 덕분이옵니다. 여기 그들의 시신이옵니다."

건품은 수레에 실린 관의 뚜껑을 열었다. 귀산과 추항이었다. 왕은 수레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웬일인가! 어린 화랑들이 주검으로 돌아오다니. 아직 짐은 그대들의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나니..."

왕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목 놓아 울었다. '아이고~ 아이고~'하는 여염집에나 있을 법한 곡소리로 왕은 슬피 울었다. 대신들과 승려들도 앞다투어 곡소리와 염불 소리를 냈다. 그 광경에 눈시울이 붉어진 모든 국인들과 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왕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이들이 있어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이다. 짐은 이들에게 예를 다하고자 하니, 아간 어딨는가? 아간~”

왕은 귀산의 아버지 아간 무은을 불렀다. 무은이 헐레벌떡 왕 앞으로 달려와 엎드렸다.

"이들의 마지막이 어떠하였는고? 짐은 그들의 장렬한 죽음을 여기 모인 국인들에게 들려주고 싶도다."

무은은 슬픔을 참으며 이와 같이 말했다.

"잠복한 적들의 공격을 받아 소신이 말에서 떨어졌사온데, 귀산과 추항이 쏜살같이 달려와 저를 구했나이다. 곰처럼 위장한 적들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맞서 싸우며 이 말을 남겼나이다."

"호오 그래? 그들이 남긴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는고?"

무은은 자못 비장한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하였다.

"임전무퇴 이옵니다. 전장에 임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왕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무은에게 물었다.

"임전무퇴, 임전무퇴라? 그 말에 어떤 연유가 있는 것인가?"

"아들놈이 전장에 나가기 전, 원광법사를 찾아뵈었사온데 그때 법사께서 직접 내려주신 말씀이옵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냐? 귀산과 추항이 그 말에 따라 죽음을 불사하고 적들을 상대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추항도 귀산의 둘도 없는 동무였사온데, 법사께서 교우이신(交友以信)하라 하셨다며 도망하지 않고 귀산의 곁을 지켰나이다."

왕은 무은의 말을 다시 곱씹었다.

"친우를 믿음으로서 사귄다..."

왕은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며 원광법사를 찾았다. 황룡사의 상인들과 함께 있던 법사가 왕의 곁으로 나아갔다.

"지금 무은이 한 말이 사실이오? 귀산과 추항에게 두 가지 말을 내려준 것이 맞소?"

법사는 머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그들의 간청에 다섯 개의 글을 전하였사옵니다."

"다섯 가지? 나머지는 무엇이오?"

"살생유택, 사친이효, 그리고 사군이충이옵니다."

원광의 말을 듣고 왕은 몸을 세우며 엎드려 있는 대신과 국인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이와 같이 말했다.

"지금부터 법사의 다섯 가지 계를 나라의 기강으로 삼겠다. 두 화랑이 목숨을 걸고 지킨 계율이다. 모든 신하와 승려, 국인들은 앞으로 이 다섯 가지 계율을 목숨처럼 여겨야 할 것이다. 더불어, 원광법사를 국사(國師)로 추존할 것이니 황룡사에서는 예법으로 국사를 받들라. 앞으로 귀산과 추항이 목숨을 바쳐 지켜낸 오계를 저버리는 자가 있다면 결단코 용서치 않을 것이니라. 알겠느냐?"

이후, 국인들은 이를 일러 '세속오계(世俗五戒)'라 이름 하였다. 세속오계가 공표되자, '임전무퇴'와 '사군이충', '교우이신'의 계율은 화랑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군령(軍令)이 되었다. 귀산과 추항 이후로 신라의 화랑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유래가 있었던 것이었다. 

서라벌 전역이 모두 승전의 기쁨과 젊은 화랑들의 이야기로 꽃을 피울 때, 황룡사 상인들의 죽음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좌선한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은 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죽었다. 

국인들은 황룡사 상인들이 좌탈입망(坐脫入亡)한 덕분으로 백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하며 그들의 입적(入寂)에 손을 모았고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급기야, 곧 신라의 땅에 전륜성왕이 출현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미륵불이 하생(下生)할 것이란 예언도 파다해졌다. 게 중엔 전륜성왕이 올 것인지 미래불이 올 것인지 서로 내기를 하기도 하였고, 그게 그것이라며 일축하는 자들도 있었으니...

어찌되었건, 국운이 융성하고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노래하는 자들이 나날이 늘어나기만 하였다.


계속...

글 그림 : 노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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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이우학교 미술교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