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생존자, UN 인권심포지엄서 증언
[언론 네트워크] "지금도 옴팡밧을 지날 때마다 시체더미가 떠오릅니다"
제주4.3 생존자, UN 인권심포지엄서 증언
고완순 할머니는 4.3이 일어난 1948년 당시 아홉 살이었다. 제주4.3을 알린 대표적 문학작품인 현기영 소설 <순이삼촌>의 작품배경이 됐던 조천읍 북촌리가 그녀의 고향이다. 그가 4.3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질기게 살아남은 기억을 70여년이 지난 2019년 6월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증언할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국제적인 인권문제 권위자들은 물론 심포지엄 참석자 200여명은 그녀가 겪은 제주4.3 증언에 예외 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훔쳤다. 북미민주포럼과 제주4.3평화재단의 도움으로 고 할머니의 증언 영상을 구했다. 고 할머니의 증언 요지와 풀영상을 소개한다. 편집자


아홉살 소녀는 어느덧 팔순의 할머니가 됐다.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군인의 몽둥이질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간 코흘리개 남동생을 가슴에 묻은 지 근 70년. 그녀의 아픔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꽃다운 나이에 군 트럭에 실려 간 후 함덕리 바닷가 모래사장 구덩이에서 유방도 국부도 난도질당한 이모의 처참한 시신을 고사리 손으로 거둬야 했다.

일본 동경대에서 유학할 만큼 엘리트였던 외삼촌은 제주중학교에서 수학교사로 교편을 잡았던 집안의 기둥이자 자랑이었다. 그러나 4.3사건으로 마을에서 군인들에게 잡혀간 후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 역시 70년 세월동안 가슴에 묻고 살고 있다.

팔순을 맞은 아홉 살 소녀, 고완순(80, 북촌리4.3유족회장) 할머니의 이야기다.

▲ 고완순 할머니(사진 오른쪽 첫번째)가 제주4.3 당시 민간인 학살 과정을 증언하고 있다. 사진, 북미 민주포럼·제주4.3평화재단 제공


고완순 할머니가 2019년 6월20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의 세계UN본부서 열린 '제주4·3의 진실, 책임 그리고 화해'라는 제목의 인권 심포지엄(The UN Symposium on Human Rights and Jeju 4.3)에서 나지막이 떨리는 목소리로 호소했다. 미군정 체제에서 제주도민들에게 가해졌던 참혹한 4.3당시의 인권유린과 학살에 대해 미국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했다. 미국은 물론 UN을 향한 처절한 절규에 다름 아니었다.

"아홉살 소녀가 팔십 넘은 할머니가 되어버린 제게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UN의 설립 취지에 맞게, 미국이 4.3진실 해결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저의 간절한 마지막 소망입니다."

주 대한민국 유엔대표부(대사 조태열)가 주최하고, 제주특별자치도, 강창일 국회의원실,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 공동주관, 그 외 국내‧외 38개 협력단체가 참여해 이날 뉴욕 유엔본부 11호 컨퍼런스룸에서 4.3을 주제로 열린 인권심포지엄 자리에서다.

제주 4.3의 진실, 책임 그리고 화해 정신을 공론화함으로써 과거사 청산의 세계적 모델을 지향하고, 국내외 연구자의 발표와 토론, 4.3 피해자의 증언을 통해 진상규명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지지와 연대 확보를 위해 마련됐다. 제주 4.3심포지엄이 유엔에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9살에 제주4.3을 겪은 고 할머니의 고향은 제주 조천읍 북촌리다. 북촌초등학교 1회 졸업생인 고 할머니는 북촌마을 안에 외가와 친가가 다 있었다. 해방 후 미군정 체제의 혼란스러웠던 1946년 말부터 마을이 뒤숭숭했다고 증언했다.

"외삼촌이 제주중학교에서 수학선생님으로 있었는데 언니를 따라 반찬을 몇 번 가져다 줬습니다. 제주경찰서가 있었던 관덕정과 가까운 곳이었는데 신탁통치 반대 행진도 봤고, 3.1절 행사에서 어린애가 죽고 사람들이 다쳤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 유엔본부에서 열린 4.3인권심포지엄에 참석한 존 메릴 전 미국무부 동북아실장,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 대학교 석좌교수, 강우일 천주교 주교(사진 왼쪽부터 차례로)가 이날 4.3인권심포지엄에 앞서 제주4.3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을 올리고 있다. 사진, 북미 민주포럼·제주4.3평화재단 제공


▲ 고완순 할머니가 이날 증언 중 4.3학살 과정의 기억을 떠올리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북미 민주포럼·제주4.3평화재단 제공


고 할머니뿐만 아니라 4.3을 겪은 생존자들의 증언에선 하루가 머다 하고 총 끝에 칼을 꽂은 경찰과 군인들이 마을을 뒤졌다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하루는 순경이 오고, 하루는 군인이 온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경찰이 오면 검은개, 군인이 오면 누렁개가 왔다고 불렀다. 밤에는 산에서 내려와 삐라를 붙이거나 음식을 챙겨가는 무장대를 폭도라고 불렀다.

"한바탕 기관총 난사를 끝낸 군인들은 이번에는 끈으로 가운데를 묶은 긴 장대를 들고 와서는 '제주읍으로 갈 사람은 따라 나와!'라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운동장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 다퉈 군인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군인들은 들고 있던 장대로 38선을 긋듯이 운동장을 동과 서로 갈랐습니다. 우리 가족은 동쪽에 앉게 됐는데, 그때는 어느 쪽이 사는 건지를 몰랐습니다. 사람들에 떠밀려 가족들이 서로 떨어지게 된 경우에는 서로의 가족을 찾아가려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군인들의 무자비한 몽둥이질이 시작됐습니다. 저는 언니와 어머니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꼭 붙잡았습니다.

군인들은 '제주읍으로 간다'며 사람들을 수십 명씩 운동장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가고 조금 있으니까 총소리가 '다다닥! 다다닥!' 나고, 또 사람들이 나가자 총소리가 '다다닥! 다다닥!'나고. 그렇게 수차례 반복되자, 우리 언니가 하는 말이 '어멍, 암만 해도 이거 죽여 부는거 닮수다. 우리 밖으로 나가믄 안되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젠 사람들이 다시 운동장 안으로 들어오려고 난리가 났습니다. 들어오려는 사람들과 끌려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떠밀려 다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옴팡밧으로 끌려갔습니다.

나는 지금도 옴팡밧 앞을 지날 때 마다 죽은 사람들의 시체더미가 떠오릅니다. 엎어져 죽은 사람, 사타구니에 들어가 있던 머리, 입에 들어가 있던 발, 은비녀가 꽂혀 있는 머리를 잡고 엉켜있던 시신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얼마나 못 견뎠으면, 그렇게 몸이 뒤틀려 죽어 있던 걸까요? 생각할수록 속이 상하고 눈물만 납니다. 그런데 더 야속한 기억이 있습니다. 겨울이어서 그랬는지 해가 구름에 들어갔다 어느 순간 반짝 나오고, 또 구름에 들어갔다 반짝 나오고 그랬습니다. 그때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으로 스며들어..., 점점 검붉게 물들었던 옴팡밧 흙이..., 햇빛에 반사되어 유리알처럼 반짝거렸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눈부시게 반짝거렸던 붉은 피가...,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 옴팡밧 전경. 옴팡밧은 4.3당시 북촌리 주민들이 집단 학살된 장소로 고완순 할머니도 이곳에서 극적으로 살아났다. 오목하게 들어간 밭이라는 뜻의 제주지명이다. 현재 이곳에는 4.3희생자를 추모하는 비가 서있다. ⓒ장태욱


▲ 4.3당시 마을주민들이 희생됐던 북촌초등학교 운동장 현재 전경. ⓒ장태욱


"군인들은 우리를 쭉 앉혀놓고는, 등 뒤에서 총을 장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철커덕 철커덕' 쇳소리가 들리고 어머니는 저와 언니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습니다. '마지막이구나!' 체념의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사격중지!'의 외침. '이 간나 새끼들, 파리 새끼보다 목숨이 더 기네.' 어린 가슴에 박힌 군인들의 욕지거리. 죽음의 문턱에서 그렇게 살아났습니다. 나는 지금... 파리 새끼보다 긴 목숨을 살고 있는 걸까요?

그 날... 1949년 1월 17일 단 하루. 북촌국민학교와 인근 밭에서 학살당한 북촌 마을 주민은 300여명에 달합니다.

운동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마다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겨울이었는데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불타버린 집. 집과 함께 불타던 시신들. 집에서 뛰쳐나온 소와 돼지가 날뛰던 모습까지... 이제 그만 70년의 세월과 함께 잊혀도 좋으련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지옥 같던 그날의 모습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4·3이 다 끝났다고 말했지만,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불타버린 집 대신 가마니 움막에서 친족들과 모여 살아야 했고, 먹을 양식이 없어 바다의 해초와 산의 풀을 뜯어 먹어야 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남의 집 밥을 훔쳐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공부를 너무나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 마음껏 배우지 못한 게, 지금도 한이 됩니다. 더 배울 수 있었다면 그 많았던 꿈 중에 하나쯤은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요?8살 어린소녀가 80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긴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내 꿈이 가엽기만 합니다. 할머니가 되어버린 제게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더 남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과 옴팡밧에서의 마을주민 집단학살 기억을 회복할 수 없는 흉터처럼 가슴팍에 새겨 살아온 고 할머니는 이날 UN과 미 당국 관계자들을 향해 "제주4.3은 미군정 체제에서 제주도민들에게 가해진 인권유린이자 학살사건"이라고 또박또박 밝혔다.

고 할머니가 이들을 향해 떨리지만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마지막 생각을 읊조렸다.

"오늘 이 자리에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유엔(UN)은 세계평화와 인권을 위해서 설립된 국제기구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 제 증언을 들으셨듯이 저의 마지막 소망입니다. UN의 설립취지에 맞게 미국이 4.3의 진실해결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주시기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저의 마지막 소망입니다."

▲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사건을 집중 보도한 공로로 퓰리처상 수상자인 찰스 핸리 전 AP통신 편집부국장도 이날 심포지엄에 참석해 미군정 당시의 한국상황에 대해 증언했다. 사진, 북미 민주포럼·제주4.3평화재단 제공


실제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참석자들의 토론을 통해 4·3 참상의 진실과 미국 책임문제를 다루기 위한 국제위원회 발족 등 연대의 필요성과 유엔 기록보관소의 자료 검색, 워싱턴DC에서의 4·3심포지엄 개최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약 10분에 걸친 고 할머니의 증언이 끝나자 바로 왼쪽에 함께 앉아 있던 벽안의 노인이 고 할머니에게 귀엣말로 무어라 전하며 위로하는 모습이 참가자들 눈에 띄었다. 한국전쟁(6.25전쟁)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집중 보도한 공로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찰스 핸리 전 AP통신 편집부국장이었다.

4.3과 비슷한 시기 벌어진 한국전쟁의 참상과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을 잘 아는 찰스 핸리 전 기자는 고 할머니의 증언에 때때로 눈시울을 붉혔단다. 그가 고 할머니에게 전한 말은 "오늘 연설 감동이었습니다"라는 후문이다. 진실이 감동으로 통했다. 진실은 그런 거다.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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