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라 아베! 아임 우치난추"
[언론 네트워크] 오키나와 사진작가 히가 토요미츠 초대전에 부쳐
"돌아가라 아베! 아임 우치난추"
"아임 낫 야마톤추, 아임 우치난추(나는 일본인이 아니다. 나는 오키나와인이다)."

2000년경 오키나와에서 택시기사 아저씨께 처음 들었던 말이다. 이 말은 그 택시기사 아저씨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런 인식을 대부분 지니고 있으며, 이 말을 서슴없이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 오키나와 사진작가 히가 토요미츠. 갤러리 '포지션 민 제주'에서 8월15일부터 히가 토요미츠 작가 초청전시가 열린다.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히가 토요미츠(比嘉豊光, Toyomitsu Higa), 작은 체구의 오키나와 사진작가다. 이 작가 역시 "아 임 우치난추"를 먼저 이야기하는 작가다.

히가는 오키나와 현대사를 고스란히 앵글에 담아 온 근성 있는 사진작가이자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히가는 1950년 오키나와 본섬의 중부지역 ‘요미탄촌 소베’에서 태어났다. 어쩌면 그가 태어난 고향이 그의 카메라 시선을 운명적으로 이어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그가 태어난 고향이 바로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에 처음으로 미군이 상륙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1945년 3월 오키나와 섬 주변에 약 1500척의 미군 함대가 집결했다. 25일에는 일제히 포격이 시작됐다. 이때 들이닥친 미군은 지상 전투부대만 18만 명이 되었고, 해군부대와 후방보급부대가지 합치면 54만 명에 달했다. 4월 1일 미군은 오키나와 섬 동해안의 요미탄(讀谷)촌으로부터 자탄(北谷)정에 이르는 지점에 상륙했다. 미군은 이곳으로 상륙한 뒤 본섬의 남부와 북부로 전선을 나누고 오키나와 주둔 일본군을 공략했다.

그가 태어난 곳이 바로 비극의 오키나와전이 시작된 곳이며, 오키나와전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기도 했다. 이 전쟁의 트라우마는 현재까지도 오키나와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는 성장하여 류큐대학 미술대 공예과에 진학한다. 도자기 공부를 하면서 그는 사진서클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학부시절은 오키나와 미군정이 끝나고 본토 반환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오키나와는 일본 내에서 가장 늦게까지 미군정이 이루어지다가 1972년에 일본에 반환되었다. 이 시기부터 히가의 카메라는 오키나와의 현장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히가의 사진들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투쟁의 현장들이며 삶의 모습이다. 기록하는 사진가의 직무에 충실하다. 특히 전후세대인 그이지만, 전전시대에서 전후세대까지 이어지는 브릿지 세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오키나와는 전전에는 식민지였다. 근세까지 독립왕국이었던 오키나와 왕조가 메이지정부에 의해 일본의 한 현으로 강제 병합되면서 오키나와의 운명은 철저히 일본 본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내부 식민지라는 비극적 시대를 맞이한다. 일본국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면서도 실제로는 식민 통치를 당한다. 2등 국민으로 취급 당한다. 오키나와 전쟁 전에는 일본으로의 동화정책으로 인해 오키나와어의 사용이 금지되고, 두발과 복장 등을 제한했으며, 오키나와 전통문화는 말살당해야 했다. 아이들에게는 강력한 군국주의 교육이 시행되었다. 또한, 오키나와에 미군 상륙이 기정사실화되어 방어진지를 구축하는데 강도 높은 강제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미군의 상륙으로 오키나와 전쟁이 시작되자 주민들은 일본군에 의해 총알받이로 내몰렸고, 끝내는 옥쇄작전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러한 오키나와인의 삶은 전후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일본의 안보를 볼모로 한 미군에 기지의 섬으로 남겨진다. 최근의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투쟁까지 오키나와인들의 현대사는 일본 본토 정부와 미군과의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의 삶은 이러한 오키나와 현대사의 시간대 속에 있다. 그의 카메라는 그가 대학시절 카메라를 잡은 이후 현재까지 이 역사적 현장들을 놓치는 일이 없었다. 이제 칠순의 나이인 그의 삶 중 50여 년의 삶이 오키나와 현대사 기록의 삶인 셈이다.

이번에 초대된 사진들은 그가 추구해 온 오키나와의 현대사와 오키나와 문화를 담았던 다양한 사진작품들 중 오키나와 현대사에서 중요한 두 사건, '코자폭동'과 '전군노-오키나와 투쟁'을 다룬 작품들이다.

코자폭동(コザ暴動) - 지도자도 없고 조직도 없었던 민중의 봉기

1970년 12월 20일 미명, 현재 오키나와 최대의 공군기지인 가데나 기지에 인접한 코자 시(현 오키나와 시)의 중심가로에서 미군병사가 일으킨 자동차 사고가 계기가 되어 발생한 사건으로 미군병사와 군정당국의 처분에 흥분한 주민들이 폭발한 사건으로 순식간에 수천 명의 주민이 80대의 미군차량을 전복시키고 불을 질렀다.

▲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히 우연히 발생한 이 한 건의 교통사고 사후처리에 대한 분노로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1945년 미군 점령과 함께 시작된 미군정의 통치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던 사건과 사고들의 처리에 있어서 그 책임이 미군 측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무죄 방면되는 부조리한 처사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이 교통사고를 계기로 폭발했다. 오래 묵은 불평등한 지배에 대한 시민의 격한 분노가 한꺼번에 분출한 것이다.

이 폭동이 있기 전날에 19일 코자 시 가까이에서는 비밀리에 보관되어 있던 독가스의 철거를 요구하는 1만인 현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코자폭동은 강한 휘발성을 띠고 폭발한 것이다.

▲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당시 카메라를 메고 현장에 있었던 히가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대학 사진 써클의 친구와 함께 현민 대회를 촬영했다. 다음날 새벽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고 바로 달려갔다. 눈앞에는 미군 차량이 불타고 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차량을 불태우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카메라로 담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전군노(全軍労) 오키나와 투쟁 - 일본과 미국 정부에 대한 저항과 존엄을 위한 투쟁

이번 전시의 또 다른 테마인 '전군노'의 투쟁사진들 역시 오키나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다룬 것이다.

'전군노'는 '전오키나와군노동조합(全沖縄軍労働組合)'의 약칭이다. 이 사진들은 바로 이 오키나와 미군기지 노동자들 투쟁의 나날들을 기록한 사진들이다.

당시 학생이었던 히가는 1971년 2월부터 4월까지 2개월간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기록을 남겼다.

▲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1945년 종전 후 오키나와는 1972년까지 27년간 미군이 직접 통치하는 미군정의 지배하에 있었다. 미군은 토지를 수탈하고 오키나와 전체를 기지화 했다. 기지가 늘어날수록 기지와 오키나와인들의 삶은 경제적으로도 긴밀해져 갈 수밖에 없었다. 미군기지로 변해버려 더 이상 농사지을 수 없었던 오키나와인들은 생활을 위해 기지의 종업원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곳곳에서 미군들이 저지른 사건과 사고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베트남전쟁 기간에는 B-52 추락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기지로 인해 먹고 살지만, 기지로 인해 전쟁의 공포를 기억해야 했고, 언제나 불안에 떨어야 했기에 그에 대한 반감을 동시에 안고 갈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키나와는 본토에 반환될 상황에 놓인 것이다. 본토에 반환되는 것 역시 오키나와는 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봉착한다. 일본으로 귀속할 것인가? 독자적으로 독립할 것인가의 논쟁도 있었지만 미군기지의 철수에 대한 한 가닥 희망으로 결국 본토반환으로 의견이 모였지만, 이미 1969년 일본과 미국 정부는 오키나와에 기지를 그대로 존속시키고 오키나와를 반환한다는 데에 합의했다. 오키나와인들은 다시 일본 본토를 위해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오키나와인들의 분노는 컸다. 특히 이 합의 직후 미군은 기지 종업원 2400명의 해고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는 또다시 오키나와인들의 투쟁을 촉발하게 되었다. 이것이 전군노의 오키나와 투쟁이다.

▲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전군노'는 "머리를 자르려면 기지를 없애라"라며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일본으로의 본토 복귀를 우선시 하던 류큐정부 등과 괴리가 생기면서 B-52 추락 사고에 맞추어 계획되던 70년의 2‧4총파업은 좌절했다. 이를 극복하고자 새롭게 일어난 운동이 기지 종업원 청년들을 중심으로 베트남 반대운동과 연동하는 '해고 철회 운동'이었다. 운동을 주도한 것은 미군 마키미나토보급기지에서 일하는 청년노동자들의 조직 '마키청(牧青)'이었다. 미군과의 충돌을 불사하면서 격렬한 투쟁을 이어나갔다. 히가는 1971년 2월부터 4월까지 마키청과 침식을 함께하면서 미군과 대치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히가의 부친 역시 미군기지의 종업원이었다.

"나의 아버지도 미군기지 종업원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미군이 기지건설을 위해 토지를 접수하고 마을을 집단 이주시킨 요미탄 마을 주변이다. 주에 한번 대학이 있던 슈리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타고 있던 버스의 차창에서 일상 풍경이 되어버린 기지와의 투쟁 풍경을 촬영했다.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되었다. 그러나 광대한 미군기지는 그대로였고, 새로운 헤노코미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고 있다. 부친이 돌아가신 다음 미군기지는 나를 반전지주로 만들었다. 일본과 미국의 양국 정부에 의해 오키나와는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우리들의 손으로 우리들의 토지와 존엄을 되찾는 반기지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제 일흔의 나이에 이른 히가의 사진들은 사진가의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기록하는 자'로서의 사진가의 책무 같은 것 말이다. 이제 50여 년이 지난 '코자폭동'이나 '전군노의 투쟁'을 기억하는 이들은 오키나와에서도 드물다. 그 투쟁에 참여했던 노인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그것들은 역사책에 실리지도 못한다. 지역사에서도 한 줄 언급될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묻히고 잊힌 사건과 사람들은 이제 히가의 사진들을 통해 세계와 만난다. 오키나와는 물론 타국의 타 지역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기억에서 생생한 기록의 이미지로 오키나와인들의 간난신고의 삶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아베의 폭주로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깊어지고 달라지고 있는 지금, 그의 사진들은 일본 속의 또 다른 속살을 보여준다. 일본 집권 자민당을 정점으로 하는 군국주의세력이 책임지지 못하는 것은 후쿠시마뿐만 아니다. 그들의 오랜 환부인 오키나와가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매년 치러지는 오키나와 위령의 날, 오키나와 종전일인 6월 23일, 우리의 4.3추념식처럼 오키나와 마부니의 평화공원에서는 추모제가 열린다. 그리고 일본 수상인 아베는 매년 이곳을 찾아 추념사를 한다. 그때마다 면전에서 유족들과 주민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돌아가라! 아베!!!"

흔치 않은 전시다. 마침 광복절에 전시 개막을 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시대를 겪었던 동아시아. 그 속에서 섬들의 역사는 더욱 처절하다. 오키나와와 비슷한 내부식민지의 역사를 공유하는 제주섬. 더욱 모질게 살아 온 오키나와 사람들의 눈물의 역사에 제주4.3의 섬사람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시간을 내어 발품을 팔아도 충분히 본전은 건질만 한 전시다. 가급적 많은 분들이 보았으면 한다. 

■ 전시기간 : 2019년 8월 15일(목)~8월 27일(화)
■ 오프닝 : 8월 15일 오후 5시, 전시장 내
■ 전시장소 : 포지션 민 제주(중앙로 삼도2동 주민센터 옆 자양삼계탕 2층)
■ 문의 : 064-725-4410

▲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 히가 토요미츠 약력

1950년생 요미탄촌 소베에 태어나다.
1975년 : 류큐 대학 미술 공예가 졸업
1976년 : 사진 광장 아ー마은 자주 갤러리에 참여
1997년 : 류큐 호를 기록하는 모임 시작
2004년 : <영속하는 순간-오키나와와 한국 안에 있는 광경> 합동전(PSI현대 미술 센터 미국 뉴욕)
2005년 : <섬 크토우바에서 말해전용 집단 자결 편> 상영(한국·서울대)
2006년 : <나나 무이> 상영(모스크바 국제 영상 인류학 영화제 모스크바 대학)
2007년 : 현립 미술관 개관 기념전 <오키나와 문화의 궤적> 참가
2009년 : <섬 크토우바에서 말해전용> 상영(한국 영상 자료 인 서울), <제4회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 트리엔날레> 참가(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2010년 : <뼈의 전용>(사 희진 미술관)
2012년 : 복귀 40년의 궤적 <때의 눈 ― 오키나와> 두 사람 전(우라소에시 미술관)
2014년 : 오키나와·전군 노총 투쟁(광주 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 초대 출품)
2014년 : <뼈는 달을 본다>(화랑 오키나와)
2015년~ : 마부니 피스 프로젝트 참여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gakgak@empal.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