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안희정 전 지사,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 유죄 대법원 확정
2019.09.09 14:31:34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554일의 긴 법정 싸움,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채 5초를 넘지 않았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9일 '수행비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모든 상고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안 전 지사는 징역 3년 6개월 실형이 확정됐다.

대법원은 안 전 지사의 상고를 기각하며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적이고 모순된 부분이 없으며 허위로 진술할 동기가 없어 신빙성이 있고", "성범죄를 심리할 때는 성인지감수성에 따라 양성평등을 실현해야 하며" 무엇보다 "안 전 지사의 사회적 지위나 권세는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라고 판단한 2심을 확정했다. 

앞서 1심은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2심은 유죄를 선고해 대법원의 판단에 이목이 쏠렸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위력'이 성폭력에도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정한 것으로 의미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9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 성폭력' 대법원 판결 후 변호인단과 여성단체가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김지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판결 후 대법원 앞에서 열린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서는 남성아 천주교성폭력상담소 활동가가 피해자 김지은 씨의 입장을 대독했다.
 
"세상에 안희정의 범죄사실을 알리고 554일이 지난 오늘, 법의 최종 판결을 받았습니다. 마땅한 결과를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아파하며 지냈는지 모릅니다. 진실이 권력과 거짓에 의해 묻혀 버리는 일이 또 다시 일어날까 너무나도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증거와 사실관계를 꼼꼼히 파악해주신 재판부의 공명하고 정의로운 판단을 통해 진실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신 재판부께 감사드립니다. 고통스러운 순간순간마다 함께해주신 변호사님들, 활동가 선생님들, 그리고 여러 압력과 어려운 속에서도 진실을 증언해주신 증인들께 깊은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2차 가해로 거리에 나뒹구는 온갖 거짓들을 정리하고, 평범한 노동자의 삶으로 정말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발 이제는 거짓의 비난에서 저를 놓아주십시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세상 곳곳에서 숨죽여 살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분들의 곁에 서겠습니다. 그분들의 용기에 함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동대책위원회는 이번 판결을 두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에 대한 입법취지를 반영하였고 '위력의 행사와 자유의사 제압이 없더라도 무형적 권세의 존재만으로 위력이 인정된다'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였다는 점에서 환영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면서 "'폭행·협박'이 극심할 때만 강간으로 인정해온 법원의 오랜 판례태도는 위력이라는 형태의 폭력을 외면해왔다"며 "이번 사건으로 우리 사회는 위력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수많은 권력형 성폭력 범죄 피해자들에게 용기가 되길"

정혜선 피해자 변호사는 "피고인에게 적용된 범죄 성립 요건인 '위력'이 어떤 식으로 공기처럼 작용해 피해자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방해하고 왜곡할 수 있는지 이 사건이 단적으로 보여줬다"며 "일상의 숱한 권력 속에서 운신의 폭이 좁은 약자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과 위험 부담을 인정한 법률의 취지에 부합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이 판결이 그동안 자신의 피해를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수많은 권력형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들에게 용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경숙 용인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안태근 검사의 성폭력사건을 시작으로 연극연출가 이윤택, 시인 고은, 극작가 오태석, 배우 조민기, 조재현, 영화감독 김기덕, 빙상코치 조재범, 그리고 안희정 전 지사까지, 위력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성폭력 사건들이 있었다"며 "위력은 보이지 않고 일상의 전체에 무형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힘없는 자들 위에서 잔인하게 그 힘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성폭력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요원하다"며 "여전히 사건의 발생 탓을 피해자에게 돌리고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의 정체성을 요구하고 꽃뱀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밖으로 말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고 지적했다.

"안전하고 평등한 일터가 될 수 있기를"

서울여성노동자회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여성노동자회 평등의전화에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상담은 지난해에만 819건이었다. 가해자의 78%가 사장 등 상사이며 피해자 중 53%가 해고와 같은 불이익 조치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2016년 성폭력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추적조사에서는 사건 발생 후 해당 직장에 재직 중인 피해자는 28%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손영주 서울여성노동자회 회장은 "많은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일상적으로 자신에게 업무지시를 내리고 업무를 평가하며 심지어 해고까지 할 수 있는 업무상 위력을 가진 당사자임을 알기에 가해가 계속돼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며 "가해자들도 이것을 알기에 업무상 위력을 이용해 성폭력을 저지른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이번 판결이 여성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모든 일터가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희롱 성폭력을 넘어 안전하고 평등한 일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9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 성폭력' 대법원 판결 후 변호인단과 여성단체가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9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 성폭력' 대법원 판결 후 변호인단과 여성단체가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9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 성폭력' 대법원 판결 후 변호인단과 여성단체가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조성은 기자 p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쫌만 더 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