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 아닙니다, '폭력'입니다"
학생선수 인권의 현주소 : 스포츠분야 (성)폭력 판례분석 토론회
2019.11.08 22:15:48
"'교육'이 아닙니다, '폭력'입니다"
#초등학교 배드민턴부 코치 A는 학교 체육관 등에서 자신이 가르치던 당시 만 10세에서 12세에 불과한 피해자들을 추행해왔다. 추행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뤄졌다. 처음 코치와 제자라는 인적인 신뢰관계를 이용한 A는 피해자들을 유인해 추행한 뒤 이를 사진으로 찍었다. 폭행과 강요에 의한 추행은 아이들이 보호받아야 할 학교 현장에서도 수개월간 지속됐다.

#태권도 관장 B는 자신이 가르치는 14세 아동을 불러 근력을 잡는 것을 알려주겠다며 스트레칭 자세를 잡아보라고 한 후 자세가 잘 보이지 않는다면서 티셔츠와 바지를 벗도록 했다. 피해자가 태권도를 장래 진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B는 피곤하니 숙소로 돌아가겠다는 피해자의 완곡한 거부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에게 탈의를 강요하고 추행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이하 특조단)이 공개한 성폭력 판례 중 일부다. 특조단이 분석한 내용에 따르면 스포츠계의 성폭력은 주로 학생선수의 진로를 무기로 이뤄졌다. 전문체육의 경우 교육자의 지위가 진로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선수 인권의 현주소' 토론회가 7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렸다. ⓒ프레시안(조성은)


위계적인 구조, 몸을 매개로 하는 활동, 지도자 중심의 폐쇄성

국가인권위원회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이하 특조단)은 7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학생선수 인권의 현주소-인권실태 전수조사와 스포츠분야 (성)폭력 판례분석 결과 발표 토론회'를 열고 이같은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결과 발표는 지난 달 24일 '합숙소 앞에 멈춘 인권 : 학생선수 기숙사 실태 조사 결과 발표 토론회'에 이어 두 번째 실태조사 결과 발표에 이어 두 번째다.

'조재범 사건'과 같이 스포츠 지도자와 선수 사이에 성폭력은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다른 분야의 성폭력과는 달리 선수와 지도자 간의 위계적인 구조, 몸을 매개로 하는 활동이라는 특성 등으로 인해 일상성, 지속성,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엘리트 스포츠 정책과 폐쇄적인 체육계의 문화 등으로 말미암아 성폭력 사건은 쉽게 은폐되고 침묵이 강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조단은 "조사 결과 이러한 스포츠계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미성년자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큰 문제"라며 "어린시절부터 지속적, 일상적으로 겪은 성폭력은 큰 트라우마를 남기고 스포츠를 그만두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특조단이 분석한 1997년부터 2019년 9월까지 스포츠 관련 판례 264건 중, 성폭력 사건은 84건이 있었으며 특조단은 이중 71건을 실태분석에 사용했다.

선처 탄원해줘서... 합의해줘서... 가해자가 연금에서 불이익을 겪어서 감형?

그러나 특조단은 합당하지 않은 이유로 가해자에게 감형을 해주는 사실을 해준 몇몇 사례를 공개하며 "법원의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조단이 공개한 감형 사유는 △가해자가 주변인들에게 탄원서를 받아 제출해서 감형되거나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이유로 감형되거나 △가해자가 퇴직 후 연금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을 고려해 정상참작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특조단은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과는 별개의 사실로 감형이 이뤄지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하며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를 이뤄 감형이 된 것을 두고도 "지도자와 선수간의 관계에서 합의가 진실한 것인지 세밀하고 신중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특조단은 스포츠계의 특성을 고려해 특별양형가중요소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특조단은 "스포츠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 그 자체를 넘어 스포츠분야에서 자신의 꿈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며 "이러한 특수 상황을 적극적으로 양형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피해자가 가해자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다거나 정식으로 사귀었다는 정황이 있어도 '그루밍'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루밍은 성착취를 수월하게 하고 범죄의 폭로를 막으려는 목적을 갖고 신뢰를 쌓거나, 성적 가해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대인관계 및 사회적 환경이 취약한 대상에게 다양한 통제 및 조종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스포츠 특성상 지도자인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정신적, 정서적인 위계관계가 형성되고 이에 따라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그루밍’이 일어나기 쉽다는 것이 특조단의 설명이다.

'판례가 되지 못한' 성폭력 사건은 '현재 진행 중'

스포츠계 성폭력 사건이 '판례'가 되기까지는 피해자의 고소를 시작으로 경찰의 수사와 검찰의 기소의 문을 넘어야 한다. 이 문을 넘지 못한 수많은 '사례'들은 여전히 스포츠계의 일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특조단은 지난 7월 1일부터 12일까지, 그리고 8월 9일부터 9월 30일까지 각각 학생 운동선수 인권 실태를 양적조사인 설문조사와 질적조사인 개별 면접조사로 나누어 실시했다. 이번 조사는 초·중·고 학생 운동선수 약 6만 3000명, 5000여개 학교를 대상으로 했다.

조사 결과 응답자 5만 7557명(응답률 91.1%) 중 '성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한 학생 운동선수는 2212명(3.8%)으로 나타났다. 성폭력의 경험은 중학생이 1071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중학생 2만 1952명(남 1만 7182명, 여 4790명)과 고등학생 1만 7598명(남 1만 3842명, 여 3756명)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유형별 조사에서는 △자신의 신체 일부를 강제로 만지게 하거나 팔베개, 마사지, 주무르기 등을 시키는 행위 (중학생 410명, 고등학생 344명) △운동 중 불쾌할 정도의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하는 행위 (중학생 298명, 고등학생 177명)가 가장 많았다.

이중 중학생 9명(남 6명, 여 3명), 고등학생 9명(남 5명, 여 4명)은 직접적인 성관계 요구를 받은 적이 있다 답했고 중학생 5명(남 3명, 여 2명), 고등학생 1명(남 1명)은 강간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피해 학생의 성별에 따라 가해자의 유형이나 성폭력이 이뤄지는 장소가 다르게 나왔다. 남학생 피해자의 경우 동성 선배나 코치, 또래로 나타났고 여학생 피해자의 경우 동성 또래, 선배, 이성 코치 등으로 나타났다. 성폭력이 이뤄지는 장소도 남학생의 경우 숙소가 가장 많았고 여학생은 훈련장이 가장 많았다.

또 중학생 선수의 52.3%, 고등학생 선수의 55.7%가 성폭력 경험 시,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하거나 괜찮은 척 하는 등 소극적인 대처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도선수인 한 고등학생은 "일이 커지면 유도부가 없어질 수도 있다"며 "그렇게 일을 크게 내고 싶지 않으니까 내 선에서 딱 끝내려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다"고 말했다고 특조단은 밝혔다.

김현수 특조단 단장은 "합숙중심의 제한적 커뮤니티, 위계-권력 구조, 낮은 성인지감수성 등에 의한 의도적 무관심과 침묵이 만연한 결과로 분석된다"고 밝혔다.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 결국 '폭력의 대물림'으로

정혜원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연구위원은 "폭력을 허용하는 조직 문화를 수용하는 집단 내에서 선수들은 부당한 인권 침해나 폭력에 저항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힘도 가지지 못한다"며 "오히려 폭력이나 통제에 순응하거나 자신 역시 폭력의 가해자로 역할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정 위원은 또 "전수조사 결과도 충격이지만, 체육계 조직문화로 인해 전수조사에도 드러나지 못한 사례가 더 많을 것"이라며 "성폭력 사건을 조기발견하고 피해자를 빠르게 구제할 수 있는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국가대표선수였던 서정화 GKL 스키팀 코치는 지난 2월 대한체육회 선수위원으로 인권상담실 홍보차 학생선수들을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인권상담실이 열렸으니 많이 이용 바란다는 그의 말에 한 학생이 "거기 가면 잘려요"라고 말한 것이다.

서 코치는 "오늘 이 국가위원회 발표 및 토론회도 많은 후배 학생선수들이 와서 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평일에 훈련을 빠지고 인권 관련 토론회를 간다고 하면 어떤 감독이 허락하겠느냐"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서 코치는 또 과거 선수시절 자신의 경험을 언급하며 "모든 인터뷰 내용이 선수들 사이에서는 당연하게 이해될 내용"이라며 "그래도 '진짜 심각한 수준이 아닌 (인터뷰 할만한) 적정 수위의 내용'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피해자에게 용기가 필요 없는 세상'이 필요하다

스포츠 미투의 생존자인 김은희 고양테니스아카데미의 테니스 코치는 "피해 당사자들은 자신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못한다"며 "교육, 훈육, 훈련의 일부로 학대가 용인돼왔다"고 지적했다.

"인권침해를 당한 즉시, 혹은 한두번 피해를 당한 후에 신고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저는 제로에 가까울 거라 생각해요. 피해 당사자들은 자신이 학대당한다고 인식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때 그것이 범죄고 학대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걸 이제와서 어디다 이야기 할 수 있나’ 생각조차 못 했어요. 피해자들은 말할 용기를 내지도 못하는데 그 이유가 이런 학대나 범죄의 이유가 교육, 훈련, 훈육이라는 인식이 피해자 주위 사람들에게도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고를 즉시 못하는 것 자체를 문제로 보고 해결해야한다고 봐요. 성폭력·폭력을 성폭력·폭력이라 말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피해자들에게 민·형사소송은 새로운 피해인 동시에 손해가 돼요. 신고 이후의 삶을 생각해보면 긍정적인 모습이 떠오르지 않아요. 피해 사실을 밝히고 공론화 하는 문제는 피해자가 스포츠계를 떠날 각오를 했느냐의 문제입니다. 

가해자를 벌하는 것보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에 놔주셨으면 합니다. 피해자에게 필요한 것은 가해자를 벌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닌 피해로부터 벗어나고 극복할 수 있고 보호받을 수 있는 의지에요. 가해자를 벌하는 건 피해자를 보호하면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라 생각해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한 ‘세이프 존’입니다. 피해자가 피해와 피해, 손해와 손해 사이에서 고민하며 용기를 낼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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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은 기자 p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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