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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ㆍ제약업계, 잘 나갈 때 챙길 건 챙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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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ㆍ제약업계, 잘 나갈 때 챙길 건 챙겨라"

이형기의 학이사(學而思) 의ㆍ과학 <6> 피험자 보호

피츠버그의과대학병원의 임상연구센터 자문위원회에서 함께 일했던 제인은 한 쪽 다리가 불편한 40대 초반의 여성이다. 자문위원회의 주 역할은 연구계획서가 과학적으로 타당하게 작성됐는지 검토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기관윤리위원회(IRB)가 주로 환자 보호나 동의 취득의 적절성처럼 윤리적 측면에 중점을 두는 것과 대비된다. 하지만, 이 둘은 모두 필요하며 상호 보완적이다.

제인의 공식 직함은
피츠버그의과대학병원의 '피험자 옹호자(Research Participant Advocate)'다. 쉽게 말해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피험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이 그녀에게 맡겨진 역할이다. 따라서 제인은 자문위원회뿐만 아니라, 병원 전체의 기관윤리위원회에도 소속돼 있다. 물론 제인은 병원의 정식 직원이며,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연구비에서 그녀의 월급이 지급된다.

'피험자 옹호자', 연구자의 '안전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과학적인 측면에는 많은 신경을 쓰지만, 피험자의 권익 보호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기 쉽다. 이런 점에서 제인의 존재는 항상 빛이 났다. 예를 들어 그녀는 연구계획서와는 다르게 동의서에 기술된 문구를 족집게처럼 잡아내 수정하도록 연구자에게 요구하곤 했다. 피험자의 연구 참여를 강요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 문장도 제인의 날카로운 지적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모든 연구자는 하루라도 빨리 연구를 시작하려고 한다. 따라서 연구계획서나 동의서의 문제점을 집어내는 제인이 이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견제'는 피험자의 안전을 지켜내기 위해 꼭 필요한 장치다. 그래서 비록 제인의 지적을 달가워하지 않는 연구자라 할지라도 그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데 다들 동의했다. 사실 제인의 존재는 오히려 연구자나 병원이 법적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예방해 주는 안전핀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계획서를 심사하고, 피험자의 권익과 안전성을 제고할 각종 방안을 강구하더라도 임상시험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임상시험은 본질상 치료제의 안전성과 효과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실 치료제의 안전성과 효과가 '확실히' 입증 또는 반증됐다면 굳이 임상시험을 실시할 필요가 없다.

결국 임상시험에서는 피험자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이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더 효과적이고 안전한 치료법을 개발하기 위해 사회가 공동으로 나누어 져야 하는 짐에 해당한다. 따라서 임상시험이 좋은가, 나쁜가, 또는 임상시험을 실시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더 이상 핵심 쟁점이 될 수 없다. 대신 어떻게 하면 피험자의 권익과 안전을 보장하면서 임상시험을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인지 논의의 초점을 모아야 한다.

<세계일보> 임상시험 문제점 지적…문제의식은 돋보였으나

최근 <세계일보>는 '신약 임상시험의 숨겨진 진실'이란 제하의 탐사 보도를 통해, "국내 임상시험 실태와 부작용 피해, 윤리 논란 등을 4회에 걸쳐 심층 진단"한 바 있다. "생명윤리가 철저히 지켜지지 않으면 국민의 몸이 거대 제약사의 '마루타'로 전락될 수 있다는 위험을 알리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함이라는 이 기획 기사의 제목들은 매우 도발적이다. 예를 들어 "부작용·피해 실태 '쉬쉬'…'억울한 죽음' 늘어난다", "한국 몸 노리는 다국적 제약사"와 같은 식이었는데, 이대로라면 벌써 무슨 큰 문제가 일어났을 것 같다.

과연 실상이 그런가? 우선 '억울한 죽음이 늘어났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세계일보>의 관련 기사는 "국내 임상시험 과정에서 사망한 피험자는 2005년 8명과 2006년 13명에서 올해는 7월 말 현재 16명으로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것은 임상시험 실시 건수와 기간의 곱, 즉 피험자가 실제로 사망 위험에 노출된 총 기간을 분모로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정한 비교라고 말하기 힘들다. 차량이 많아지고 운행 시간이 길어지면 당연히 교통사고 건수가 증가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실 이러한 통계 수치에 대한 더 공정하고 타당한 해석은 '위중하지만 마땅한 치료법이 없는 질병의 임상시험이 점차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실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복제약(제네릭)'의 간이 임상시험이 대종을 이루던 과거에 비해 그만큼 우리나라의 임상시험 수준이 향상됐다는 사실을 반영하므로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일도 아니다.

'치료적 고아' 되는 게 더 큰 문제

다국적 제약회사가 무슨 치한이라도 된 양 '한국인의 몸을 노렸다'는 기사 제목에서도 그 선정적 발상의 기이함에 놀란다. 하지만, 이는 의약품 임상개발의 의미와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전문가의 설레발에 불과하다. 왜냐 하면 오히려 더 심각한 것은 '치료적 고아(therapeutic orphan)'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발 과정에서 피험자로 등재될 기회를 박탈당함으로써 의약품 허가 이후에도 실제 치료에 꼭 필요한 임상 정보가 전무 또는 부실한 집단을 치료적 고아라고 부른다. 마치, 돌봐 주는 부모나 후견인이 없어 이리 저리 박대를 당하는 고아처럼, 의약품 개발 과정에서 누구도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아, 노인, 임산부, 위중한 환자 등이 치료적 고아 집단의 대표적인 예다.

오랜 기간 동안 일본을 제외한 거의 전 아시아 국가도 치료적 고아의 나라들이었다. 자국 내 제약기업의 신약 개발 수준이 워낙 열악하기도 했지만, 제도와 인프라가 마련돼 있지 않아 섣불리 임상시험을 실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양질의 의료 인력과 인프라를 갖춘 한국은 이러한 변화 추세의 선봉에 서 있다.

왜 치료적 고아가 심각한 문제일까? 약에 대한 반응, 안전성, 효과가 집단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의약품 개발 과정에 피험자로 포함이 돼야 정작 해당 집단의 치료에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얻을 수 있다. 신약 임상시험의 피험자로 포함되는 것이 권리의 하나로까지 인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과 국립보건원(NIH)이 최근 소아와 임산부에 대한 임상시험을 더 장려하고 나선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다국적 제약회사를 제국주의적 침탈을 일삼는 '적'으로 묘사하면, 대중의 국수주의적 성향을 자극해 좋은 말을 들을지는 모른다. 덕분에 신문의 판매부수가 늘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혜택을 볼 수도 있었을 다수의 미래 환자들을 여전히 치료적 고아 상태로 남겨 두는 '제 발등 찍기'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최근 국내에서도 병원, 기업을 중심으로 임상시험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cuh.co.kr

의료·제약업계 피험자 보호 장치 마련해야


그럼에도 <세계일보>의 탐사 보도에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다. "정부와 의료계에서 한국을 '임상시험 허브'로 키우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이들의 상황 진단은 옳다. 따라서 임상시험 인프라 개발의 화려함에 가려 자칫 소외될 수도 있는 피험자 보호의 그늘진 이면에 집중한 <세계일보>의 문제의식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 비록 공정성과 균형 감각이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의료계와 제약기업의 관계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잘 나가고 있을 때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요컨대 이렇게 신약 임상개발의 환경이 우호적일 때, '미리 미리' 그리고 '능동적으로' 피험자 보호 장치와 시스템을 확립해야 한다. 앞에서 소개한 제인의 예처럼, '피험자 옹호자'를 제도화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제약기업 및 연구자와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자료안전성심의위원회(Data Safety Monitoring Board)'를 최초인체임상시험(First-Time-In-Human Study)이나 위중한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임상시험에 대해 선별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엄격한 윤리 원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임상시험의 인프라 개발도 허브 구축도 모두 사상누각일 따름이다. 임상시험 피험자 보호, 먼발치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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