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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약사, 이대로 장삿꾼이 되고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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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약사, 이대로 장삿꾼이 되고 말 것인가"

이형기의 학이사(學而思) 의ㆍ과학 <3> 의약품 정보

내 경험이기는 하지만, 의과대학과 이어지는 전문의 수련 과정에서 의사들이 약물요법을 배우던 과정은 독특했다. 우선 약물요법에 대해 이렇다 할 만한 체계적인 교육을 따로 받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대신 선배 의사들이 약을 처방하고 사용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고 '따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끔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 보아도, 돌아오던 선배 의사들의 대답이 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선배들이 사용하던 방법을 보고 따라 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의사들의 전문 수련 과정은 전통적인 도제 시스템에 많은 부분을 의존한다. 따라서 이런 식의 '어깨 너머로 보고 따라 하기'를 굳이 흠잡을 일은 아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도제식 훈련 방법을 통해 선배 의사들의 축적된 지식과 경험이 더 효율적으로 전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의사라면 누구나 약물요법의 기본 원리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

의과대학에서 가르치는 수많은 과목 중 약물요법과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을 하나 고르라면 당연히 '임상약리학(clinical pharmacology)'을 꼽는다. 하지만 내가 의과대학에 다니던 시기는 이제 막 임상약리학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한 때였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임상약리학을 공부한 것은 전문의가 되고 나서도 한참 뒤였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 임상약리학을 '제대로' 강의하고 있다.

환자에게 약을 어떻게 처방할 것인가?

미국에 건너온 뒤 조지타운의과대학과 피츠버그의과대학에서 임상약리학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임상약리학 강의는 조금 달랐다. 우선 졸업을 바로 앞에 둔 4학년 학생들이 강의 대상이었다. 다시 말해 어느 정도 환자를 진료해 본 임상 경험을 갖춘 학생들이 임상약리학을 수강하는 것이다. 따라서 임상약리학이라는 과목의 이름 그대로 실제 임상 상황에서 약리학적 지식을 어떻게 환자 치료에 적용하는지 가르치는 데 강의의 역점이 주어졌다. 당연히 약물요법은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의과대학생들에게 약물요법을 가르칠 때 제일 강조했던 것은 '개인약물처방집(personal formulary)'을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개인약물처방집은 특정 질환을 치료하는 약물을 선별해 유효성과 안전성이 입증된 질병군은 물론, 적절한 용법과 용량, 같이 투약해서는 안 되는 약물의 종류 등에 대해 깊고 자세하게 정리해 놓은 것을 가리킨다.

개인약물처방집은 의사들의 진료를 돕기 위해 흔히 병원 약제부 등에서 약식으로 의약품 정보를 집대성해 놓은 '병원약물집(hospital formulary)'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요약하자면 대상 약물의 수는 제한적이지만 개개 의사에게 '맞춤형'으로 가공됨으로써 정보의 깊이와 유용성에서 앞서는 것이 개인약물처방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약물처방집은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라면 평생 수정, 보완, 추가, 삭제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일종의 개인 소장 자료인 셈이다. 이런 과정을 제대로 거치려면 약물의 효과를 보고한 논문을 일일이 찾아 읽고,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필요하다면 2차 자료를 가공해야 하는 등-예를 들어 관련된 몇 개의 논문을 모아 메타분석을 실시하는 것처럼-보통 품이 많이 드는 게 아니다.

내가 참여한 임상약리학 강의에서는 이런 분석을 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가르치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배운 대로 따라와 줄 것인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앞으로 환자 진료에 치여 살 이들에게는 뭔가 쉽고 간편한 대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계속 쏟아져 나올 신약을 모두 꿴다는 것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에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진료실의 의사들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약물의 정보원(情報源)은 제약회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제약회사에서는 의사를 상대로 자사 의약품의 관련 정보를 체계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의약품정보전달자(medical representative, MR)'를 두고 있다. MR에 대한 교육 훈련은 약식 의과대학 또는 약학대학 교과 과정에 비견될 정도로 강도가 만만치 않고, 당연히 MR들의 자부심도 크다.

처음으로 MR 개념을 국내 제약 계에 도입한 것은 약 10년 전, 다국적제약기업들이었다. 제약회사에서 나왔다면서 약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인사나 하고 돌아가던 영업사원 쯤으로 아니면 불공정한 거래를 음성적으로 매개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 정도로 MR을 치부했던 의사들의 시각도 이후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오히려 병원이나 의사들 측에서 적극적으로 MR에게 약물 정보 제공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제약회사가 주는 정보, 독이 될 수도 있다

제약회사가 약물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의사의 진료에 영향을 미치는 데 MR 을 통한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덩치가 크고, 그래서 잘못되면 더 심각할 수 있는 것은 제약기업이 후원하는 각종 '지속의학교육(Continuing Medical Education, CME)' 프로그램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지속의학교육인정위원회(Accreditation Council for Continuing Medical Education, ACCME)'의 자료에 따르면, 2005년 한해 의사들이 면허를 유지하기 위해 참석해야 했던 지속의학교육 프로그램에 소요된 총 비용 22억5000만 달러(약 2조 700억 원) 중 절반을 제약기업 등과 같은 영리 업체에서 지불했다 (☞ 관련 자료).

이러한 제약기업의 후원을 놓고 찬반 의견이 갈리는 것은 당연하다.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신약, 신의료기술, 기반 과학의 발전에 대해 의사들에게 효과적으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비록 제약기업의 후원을 받더라도 운영을 독립적으로 하면 '이해상충의 문제(conflict of interest)'를 피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의과대학이나 학회가 이름만 빌려 주고 연자나 주제 선정에서 제약기업의 입김을 배제하지 않음으로써 '정보 제공을 빙자한 광고(infomercial)'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린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지속의학교육 프로그램이 큰 돈벌이가 된다.

문제는 또 있다. 제약기업 등의 후원을 받는 지속의학교육 프로그램에서는 연자들이 빈번하게 허가 이외의 용법-오프레이블(off-label) 용법-을 의사에게 소개함으로써 해당 의약품의 처방을 장려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골관절염 치료에만 허가를 받았는데 류마티스관절염에까지 사용하는 식이다.

이러한 오프레이블 용법에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지는 않다. 또 어떤 경우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청(FDA)과 같은 규제기관으로부터 공식 허가를 받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과학적 자료가 뒷받침되면 개개 의사들의 처방을 유도함으로써 오프레이블 용법을 공식화하는 것이 제약회사의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고가의 신약이 허가받은 질환 이외에도 사용됨으로써 약제비 지출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개 의사의 처방에 대한 자율권이 비교적 잘 보장되는 미국은, 특히 정부가 의료비를 지불하는 메디케이드나 메디케어 프로그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지난 2002년 보건부가 주도해 지속의학교육에 대한 제약기업의 후원을 제한하는 규정을 입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친기업적인 부시 행정부 하에서, 그리고 당시 상원의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의 반대로 이 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제약기업이 자체적으로 발의한 윤리규정을 따른다는 선에서 타협됐다.

▲ 문화방송(MBC)의 드라마 <하얀거탑>. 이 드라마는 개인의 출세를 지향하는 의사와 환자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의사를 대비해 화제를 모았다. ⓒ프레시안

'환자' 편에 서는 집단이 승리한다


그렇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일까? 아니다. 예를 들어 학계를 중심으로 제약기업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의약품 정보를 전달하는 비영리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바드의과대학의 주도로, 몇 가지 흔한 질환에서 근거(evidence)가 확실한 약물요법을 의사들에게 알기 쉽고 실제적으로 설파하는 www.rxfacts.org가 대표적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성공할 것으로 장담하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분명히 새롭고, 무엇보다 '건강한' 시도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의 의사협회와 약사협회가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게 바로 이 점이다. 장담컨대 '성분명 처방'을 포함한 각종 의약계 현안을 놓고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집단이 결코 이기는 게 아니다. 졸저 <FDA vs. 식약청>에서도 강조한 것이지만,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먼저 '환자 편'에 서는 집단이 진정한 승리자가 된다.

환자 편에 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과학적인 근거에 따라 환자에게 최선이 되는 의약품만을 처방하고 조제하는 전문인의 원칙을 지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연히 이것이 가능하려면 제약기업의 영향력이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운, 불편부당한 의약품 정보 제공이 전제돼야 한다.

전문성의 위기에 직면했던 약사 직종에게 고언한 1973년 '딕터(Dichter) 보고서'의 지적처럼, 환자는 의사든 약사든 동일인을 '상점주인(tradesman)이면서 동시에 전문인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약의 처방이나 조제를 둘러싼 이문에 관심을 갖는 상점주인이 될 것인지, 아니면 환자의 건강 증진에 필요한 공정한 정보 전달에 주력하는 전문인이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둘 중에 무엇을 택해야 할지 내가 더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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