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정치권과 전문가들은 이 여파가 어느 쪽에 유리하게 흐르느냐를 놓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각종 여론조사의 결과는 떠들썩했던 소동과 달리 유권자들의 지지율 구조에 별다른 변동이 거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안 원장을 둘러싼 네거티브 공방이 국민들의 관심과는 유리된 정치인들 사이의 공방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얘기다.
정치적 관점에서 이번 싸움으로 잃은 쪽은 안철수 원장으로 보인다. 안 원장 측은 상대적 우위를 끈덕지게 축적해 나가는 게임방식 대신에 직선적 돌파에 의한 결과를 추구하는 사법적 승패의 게임을 선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안철수 자신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비춰져 이미지에 손상을 가할 가능성이 있다. 실리에서도 크게 얻은 것은 없다. 안 원장 측은 강력한 역공을 펼침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과시하고 나아가 네거티브에 쐐기를 박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본격적인 네거티브 공세를 앞당겨 불러들였다고 보는 편이 옳다.
안철수 원장이 정치판 대결구도의 본격적인 한 축으로 들어옴에 따라 앞으로 중요한 몇 가지 변화가 예상된다. 먼저 안 원장은 문재인 후보와 야권의 대표 주자를 놓고 이전보다 더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음으로 여당이나 야당 어느 쪽으로도 흡수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무당파 유권자들이 다시 늘어나면서 새누리당과 야권진영 사이의 격차가 벌어질 개연성이 있다. 한마디로 안철수 원장이 상당히 궁색한 상황에 빠질 수 있고, 그 같은 상황은 정권교체의 위기, 야권 진영의 위기를 대변한다.
하지만 이상과 같은 평가에만 머무른다면 평론가적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안철수 원장이 이전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는 시점은 지났다고 봐야 한다. 굳이 돌아갈 필요도 없다. 이번 사건이 아니라도 어차피 안 원장으로서는 지금까지의 행보를 변경해야 될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방식으로는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처럼 새누리당의 물타기식 네거티브에 대응하기에 적절치 않은 면이 많았다. 안 원장 쪽이 적극적 공세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은 기본적으로는 잘 한 일이었다. 방법에서 부족했을 따름이었다.
▲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뉴시스 |
안철수 원장은 이번 일을 능동적인 국면전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전략적 태도를 통해 자칫 궁색해질 수 있는 현재의 상황까지도 함께 뚫어야 한다. 대신 안철수의 가치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그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안철수 원장은 <안철수의 생각>이란 책 등을 통해 나름대로 훌륭한 비전을 선보였다. 물론 그가 완성된 비전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그의 비전은 정치적 실천과 행동을 통해서 더욱 구체화되어야 하고 진전되어야 한다.
실천과 행동이란 정치가 갈등과 경쟁의 과정이라고 하는 본래적 의미를 피하지 않고 현실에 당당히 맞서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가치와 비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그것이 다른 정치세력들의 가치나 비전과 어떻게 다른지 대립점을 분명히 하여 구도를 만드는 일이다. 대립을 분명히 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면초가의 고난에 빠져 있는 대중의 고통과 불안을 당장에 정치적으로 대표하고 그들의 에너지를 결집하기 위해서다.
지금의 정치판은 여야 가릴 것 없이 대중의 절박한 비명과 요구에는 반응하지 않은 채 오직 말장난과 교묘한 미소의 싸움으로 일관하고 있다. 어느 정치인을 막론하고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미래란 "내가 정권을 잡는다면"이라는 허구적 가정 아래 대중에게 무한한 인내만을 끊임없이 강요하는 기만적 언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미래를 말하지 말고 당장의 실천으로 보여 달라고 말해야 한다. "Hic Rhodus, hic salta!(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보라)"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는 더 이상 미래권력이 아니라 이미 막강한 위세를 가진 현세권력이다. 그런 그가 김용옥 교수의 말을 빌면 "웃음으로 표 얻는 것" 말고 "역사적 정의와 국민복지에 꼭 필요한 정치행위"를 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지난 5년 가까이 재벌대기업과 토건세력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을 빈사상태로 내몬 MB정권의 역사적 과오를 감추는 방벽노릇만 하고 있지 않는가?
대중들은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다. 삶의 시한폭탄이 째깍거리는 상황에서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대중에 대한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지난 4년 반 동안 고환율과 저금리, 부동산 떠받치기로 재벌과 부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다수 중산층과 서민들에게는 살인적 물가폭등과 빚더미를 안겨준 MB정권의 유산을 당장 청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4대강 사업과 부자감세로 국가재정을 극도로 부실하게 만들고 국민복지의 기반을 허물어버린 책임을 묻고 총체적으로 망가진 국가시스템을 정상화시키는 조치를 당장 취하지 않는다면 대중은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고통분담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당장에 도출해 가지 않는다면 가계부채는 어느 새 우리의 숨통을 끊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MB정권은 박근혜의 미소 뒤에 숨어 지금도 레임덕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국유재산을 팔아먹을 궁리나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판국에 민주당의 무능은 어이를 상실케 한다. 총선 전까지만 해도 뻑 하면 MB심판을 외치더니 이제는 그 소리도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겨우 하는 일이 있다면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를 갖고 새누리당과 과거사 논쟁을 벌이는 정도이다. 민주당은 128석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정책수단을 갖고 있는데, 안 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하겠다고 하면 정말 한번 해보자고 압박해서 당장의 문제로 만들어야 한다. 박근혜가 정치쇄신을 하겠다고 하면 지역주의 정당체제를 깨는 정치개혁입법을 국민에게 약속하고 추진하자고 밀어붙여야 한다.
이런 판에서 안철수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으려면 대중의 절박한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기만의 정치판을 걷어차는 용기를 보여줘야 한다. 안철수는 그 같은 국가적 행동을 위한 의제 설정자가 되어야 한다. 나아가 그 같은 의제의 입법화를 추진할 민주당 등 야권진영, 대중행동을 조직할 시민사회 등과의 협치(한국형 뉴딜연합)를 가동해야 한다. 자기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민의 문제를 철저하게 중심에 세워 정책과 의제와 비전을 통해 현 상황에서 기성정치세력들의 기만적 웃음과 공허한 약속을 거부하는 용기와 열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바로 안철수 원장이 나아갈 다음 수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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