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김단야, 김산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47명이 광복 60돌 만에 유공자로 추서됐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과 이념 대립 속에서 이들은 철저하게 잊혀진 존재였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동녘) 등으로 비교적 잘 알려진 김산이나 해방 후 좌익 활동과 거리를 둔 뒤 1986년 타계할 때까지 생생한 증언을 남긴 김철수와 달리 김단야는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활동의 실체가 베일에 가려져 왔다.

김단야는 또 다른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던 박헌영과 함께 1919년 3·1운동 후 사회주의에서 탈출구와 대안을 찾은 청년 지식인의 전형이었을 뿐만 아니라, 온갖 악조건을 무릅쓰고 국내외를 잇는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그런가 하면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과의 죽음을 앞둔 사랑, '사회주의 조국'에 의한 비참한 최후 등은 김단야의 생애를 더욱 극적인 것으로 만든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하다.

<프레시안>은 김단야 등의 독립유공자 추서가 엄혹했던 시절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정확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는 판단에 따라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교수(사학과)가 <역사비평> 2000년 겨을호(제53호)에 기고했던 '박헌영과 김단야'를 필자와 역사비평사의 허락을 얻어 전문 분재한다.

임 교수는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사에 오랫동안 천착해 왔으며 <이정 박헌영 전집>(전9권, 역사비평사) 간행 과정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사회주의 운동사를 총정리하는 방대한 작업에 착수해 2003년 그 첫 번째 결실인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을 내놓았다.

특히 임 교수는 2000년부터 <역사비평>에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연재를 통해 '박헌영과 김단야'를 시작으로 강달영, 고광수, 김철수 등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사를 생생하게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편집자>

***코뮤니스트**

***① 계속되는 수난**

박헌영이 생애 세 번째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한 것은 1933년 7월 5일 아침, 상해의 어느 길거리에서였다. 일본 경찰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를 무려 세 번씩이나 체포했다. 그들은 제국의 치안을 방해하는 자를 검거하는 일에 매우 유능했다.

사실 당시 상해의 일본 영사관 경찰이 노리던 인물은 박헌영이 아니라 김단야였다. 벌써 여러 해 동안 상해의 한인 사회주의 운동을 지휘해 오던 김단야의 행적이 영사관 경찰의 첩보망에 여러 차례 드나들던 차였다. 그를 체포하고자 오랫동안 공을 들이던 영사관 경찰의 그물망에 드디어 김단야로 추정되는 인물이 걸려들었다.

득의만만한 경찰의 체포 보고서를 읽어보자. 그 기록에 따르면, 김단야로 추정되는 인물이 7월 5일 아침 7시부터 8시 30분 사이에 공동조계의 북경로와 강서로 교차로 부근에서 누군가와 접선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이에 일본 경찰은 공동조계 경찰의 협력을 얻어 문제의 장소 부근에 잠복했다. 아침 7시 45분 교차로 북쪽 귀퉁이에서 서성거리는 의심스런 사내가 잠복 경찰의 눈에 띄었다. 경찰은 단박에 그를 덮쳤다. 영사관 경찰부로 연행하여 취조해보니, 그 사람은 김단야가 아니라 박헌영이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다 사자를 생포한 셈이었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서울로 압송됐다. 사상담당 고등 경찰로 이름 높은 미와(三輪) 주임이 그를 직접 취조했다. 박헌영은 1928년 8월 탈출한 이후 1933년 7월에 체포되기까지 약 5년 동안의 행적에 대해 집중적으로 취조를 받았다. 그는 탈출 사건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게 미운 털이 박힌 데다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거물로 간주되고 있었다. 살인적인 고문을 받았을 것이다.

박헌영은 필사적으로 위장 진술에 나섰다. 진술의 초점은 탈출 이후 그의 생활이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관됐음을 전후 모순없이 주장하는 데 있었다. 박헌영은 국외로 탈출한 뒤 북간도와 연해주를 전전하며 정신병 치료에 급급했다고 말했다. 그 후 1930년 가을부터는 병에 차도가 있어 연해주 수찬 구역의 한인 소학교에 교사로 취직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2년간 생활한 뒤, 하얼빈·봉천·천진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 게 1932년 11월 말이었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그동안 사회주의 운동에는 전혀 관여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동료 사회주의자들이 그를 정신병자로 취급한 탓에 운동의 대열에 넣어주려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상해에 도착한 뒤에는 직업을 얻으려고 배회했을 뿐이며, 1933년 1월에 상해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김단야를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생활비가 궁했기 때문에 김단야의 지시에 따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다소 협력했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1925년 말 조선공산당 사건 때와는 달리 중요한 증거 문건이 하나도 압수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재상해 일본 영사관 경찰부와 경기도 경찰부에서 행한 박헌영의 이 '심문투쟁'은 결국 성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됐다. 길고 긴 재판 절차를 지나 1934년 12월 27일에 그는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만약 박헌영이 탈출 이후 행적을 사실대로 기술했다면 그 파장은 엄청났을 것으로 보인다. 코민테른의 지도 하에 수행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모두 와해될 뿐 아니라 박헌영 자신도 상상을 초월하는 형벌을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박헌영이 애써 감추고자 했던 탈출 이후의 실제 행적은 어땠는가? 그는 북간도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으며, 연해주에서의 체류 기간도 극히 짧았다.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이 해산할 수 있도록 블라디보스톡에서 두 달간 휴양했을 뿐이다. 그 후 부부는 갓난 딸 박 비비안나와 함께 모스크바로 향했다.

1928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박헌영은 안정된 조건 속에서 자신의 이론적 전망을 확대하고 싶어했다. 그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겠다고 청원했다. 바로 김단야가 다닌 학교였다. 당시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김단야가 박헌영의 입학을 지원했다. 김단야는 1926~28년 시기에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했으며, 그 즈음에는 코민테른 동양부 한국 담당 조사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제공청 집행위원회 비서부가 박헌영의 입학을 추천했다. 결국 1929년 1월에 박헌영의 국제레닌학교 입학이 허용됐다. 당시 작성된 박헌영의 입학 관계 서류철에 따르면, '구사할 수 있는 언어' 항목에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국어' 네 가지가 적혀 있다. 그때만 해도 박헌영은 러시아어를 구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의사 교환 수단은 영어였다. 이력서는 물론이고 신원조사표도 영어로 작성되어 있다. 그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영어로 강의가 이뤄지는 영어반에 소속돼 있었다.

아내 주세죽의 유학도 허용됐다. 그녀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그녀가 이 대학에 재학한 기간은 1929년부터 1931년까지였다. 이때부터 주세죽은 꼬레예바(Кореева)라는 가명을 썼다. '한국 여자'라는 뜻이었다. 뒷날 그들의 딸 박비비안나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꼬레예바라는 이름은 국제레닌학교에 유학할 당시 박헌영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박헌영의 재학 기간은 1929년 1월부터 1931년 말까지였다. 그는 이 학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의에 관한 다양한 교과목을 성실하게 이수했다. 거의 모든 교과마다 그는 "확고하게 단련되어 있으며, 언제나 훌륭한 동지"라는 평가를 받았다.

***②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국제선**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에도 한국 혁명운동의 최일선에 있었다. 1929년 중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던 것이다. 이 위원회는 1928년 말에 코민테른 지부 승인이 취소된 조선공산당을 대신하여 한국 사회주의 운동을 지도하는 최상급 기관이었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사에서 이름높은 '국제선'이란 바로 이 기구를 가리킨다. 위원 가운데 한국인은 세 사람이었다. 박헌영과 최성우(崔成宇), 박애(朴愛)가 그들이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최고 지도부의 반열에 오른 이 세 사람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첫 리더들이다.

조선위원회는 코민테른의 전적인 후원 아래 굵직굵직한 사업을 추진했다. 한국 내부에 조선위원회의 노선과 정책을 관철할 지도기관을 설립했다. 이 기관은 '조선공산당조직 준비위원회'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 사람들은 종종 이 단체를 화요파의 당 재건 준비기관으로 간주해 왔다. 보기를 들면, 일본 경찰이 작성한 수사 보고서의 제목은 '화요파 조선공산당 재조직 사건 검거에 관한 건'(1930. 7. 25)이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화요파라는 일개 공산주의 그룹의 당 재건 기관이 아니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산하 기관으로서 그 '국내부'에 해당하는 지위를 갖는다.

국내 기관 외에 조선위원회가 역점을 뒀던 것은 재상해 선전 및 연락 기관이었다. 조선위원회는 설립 초기부터 잡지 <코뮤니스트> 발간을 계획했다. 상해에 설립된 이 잡지사의 편집위원은 김단야, 최성우, 김정하(金鼎夏) 세 사람이었다. 박헌영도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임됐는데, 그것은 1932년부터였다.

조선위원회는 '국제선'의 노선을 관철할 풍부한 인재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재학 중인 젊은 혁명가들이 그들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수준 높은 이론적 전망을 갖춘 한인 혁명가들을 길러낸 이 대학에는 1930년 5월 현재 37명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재학 중이었다.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한국 안팎으로 파견되어 '국제선'의 지도성을 현실화할 역군들이었다.

박헌영과 마찬가지로 김단야도 코민테른 조선위원회의 최상급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그는 국내외의 광활한 지역을 쉴 새 없이 오가며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했다. 이즈음 그 활동상의 개략을 보자. 그는 1929년 6월 코민테른의 사명을 띠고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8월 초에는 압록강 철교를 무사히 넘어 입국했다. 서울에 입성한 그는 조직 사업을 개시하여, 그해 10월에 '조선공산당조직 준비위원회' 결성을 이끌어냈다. 김단야의 이니셔티브 아래 당 지도부 5인조와 공산청년회 지도부 3인조가 결성됐다. 김단야 자신이 당 지도부 5인조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해 12월 김단야는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한국을 떠났다.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이듬해 2월에 모스크바로 귀환한 그는 거기서 비로소 자신이 구축해 놓은 국내 조직이 파괴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1930년 4월 김단야는 다시 기관지 출판 및 연락 사업의 사명을 띠고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상해로 가는 도중에 블라디보스톡에 들른 김단야는 김한(金翰)에게서 검거 사건에 관한 상세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김한은 김단야의 요청으로 서울에서 혁명가후원회(모쁘르) 업무를 담당하던 사회주의자였다. 6월 상해에 도착한 김단야는 기관지 <코뮤니스트> 발간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김단야의 상해 생활은 비교적 오래 계속됐다. 박헌영 부부가 기관지 출판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상해로 파견되어 온 1932년 1월까지 줄곧 현지 사업을 지도하고 있었다. 상해 영사관 경찰이 김단야를 체포하고자 주목할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김단야와 박헌영이 '국제선'에 따라서 당 재건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을 당시, 그들의 가까운 벗 임원근은 기나긴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다. 1930년 1월이었다.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때로부터 5년 2개월이 지난 뒤였다. 출감한 임원근은 벗들이 가는 길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비합법 운동선과 연계를 재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 임원근은 언론인으로 진출했다. 1933년에 진보적인 신문으로 이름 높던 <조선중앙일보> 기자가 됐으며, 1936년에는 그 신문사 지방부장을 지냈다. 이 신문이 폐간된 뒤로는 기업 활동에 종사했다. 홍중(弘中)주식회사, 조선기계주식회사 등이 그가 관여한 회사들이다. 그 뒤로도 임원근이 사회주의 운동선에 복귀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1963년 5월 18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1933년 7월 박헌영이 상해에서 체포됐을 때로 되돌아 가자. 그때 상해에는 아내 주세죽과 김단야도 체류 중이었다. 박헌영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던 주세죽은 새벽 4시가 지나도록 그가 돌아오지 않자 극도로 공포에 사로 잡혔다. 그녀는 김단야를 찾아갔다. 김단야도 박헌영의 불운을 예감했다. 두 사람은 박헌영의 체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평소에 가두 연락원으로 일하던 여성의 집으로 찾아갔다. 박헌영이 체포됐음은 거의 틀림없는 것으로 보였다. 이 때 돌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집에 도착한 뒤 5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일본 경찰대가 박헌영을 앞세우고 들이닥친 것이다. 위기일발이었다. 주세죽과 김단야는 아슬아슬하게 그 집에서 벗어나 도주할 수 있었다. 도주하는 그들의 귀에 박헌영이 경찰들에게 집단 구타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단야는 코민테른에 제출한 체포 정황 보고서에서 자신이 체포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박헌영의 도움 덕분이라고 썼다. 박헌영은 김단야 체포에 혈안이 된 일본 경찰의 폭압적 추궁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곳으로 그들을 유도함으로써 김단야로 하여금 피신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6개월 뒤 김단야는 <코뮤니스트> 발간 사업에서 손을 떼고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잡지 발간 사업이 왜 중단됐는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중대한 정책 전환이 있었음은 틀림없는 듯하다. 김단야뿐만이 아니었다. 주세죽도 그와 함께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