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학교는 '동화'가 아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학교는 '동화'가 아니다"

[핫피플] 영화 <클래스> 로랑 캉테 감독 인터뷰

작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클래스>의 로랑 캉테 감독이 4월 1일 국내에서 개봉에 맞춰 3월 22일 방한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그 날 열린 시사회에 참석해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 로랑 캉테 감독은 이후 금요일까지 연이어 열린 시사회의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해 한국의 감독들 및 관객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프랑스의 한 교실을 찍은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생동감과 리얼리티가 넘치는 영화의 완성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방선거와 교육감 선거를 앞두고 있는 한국에서 특히 <클래스>에 높은 관심이 몰렸다. 감독의 연이은 인터뷰 일정 와중에 프레시안 역시 영화비평웹진 네오이마주와 함께 지난 25일(목)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로랑 캉테 감독을 만나 긴 '수다' 시간을 가졌다.

▲ ⓒ프레시안

- 한국은 두 번째 방문이지만 서울은 처음인 것으로 안다. 서울의 인상은 어떤가.

일정이 빡빡해 서울 구경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 내일은 시간이 좀 나니 서울을 둘러보려 한다. 내 성격이 어딜 정해놓고 계획을 세워 다니기보다는 정처없이 즉흥적으로 다니는 걸 즐기는 편이다. 오늘 아침에도 무작정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남대문에 갔다.

- 관객과의 대화를 많이 가졌다. 어땠는지.

프랑스에서 내 영화가 사랑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한국에서는 프랑스보다 젊은 관객들이 더 많은 것 같다.

- 전문배우가 아닌 이들을 캐스팅해서 얻은 장점도 있었겠지만,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으로서는 힘든 점도 많았을 것 같다. 연기지도에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내겐 행복 그 자체인 경험이었다. 전문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잘 분석해 계산된 연기를 정확한 타이밍에 정해진 시추에이션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뜻하지 않게 '깜짝 놀랄 만한' 장면을 건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비전문배우들은 연기에 자신들의 삶의 경험이 그대로 연기에 배일 뿐 아니라, 미처 예견되지 않은 것들을 보여준다. 비전문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종종 연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 '연약한 모습'이라니 어떤 의미인가.

있는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나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히스토리 역시 영화에 반영돼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계획하고 계산하기보다 무작정 부딪쳤을 때 뜻밖의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즐긴다. 영화를 찍을 때에도 이들 비전문배우들이 보여준 예상밖의 놀라운 장면들을 카메라에 잡으며 즐거워했다. <클래스>에는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대거 출연하는데, 비전문배우인 이들을 기용함으로써 다양한 외모와 다양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에스메랄다의 경우,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미녀는 아니지 않나. 하나같이 외모도 훌륭한 청소년 전문배우들이 출연했다면 설득력이 훨씬 떨어졌을 것이다. 아이들의 열정도 어마어마했고.

- 그럼 촬영 와중에 아이들의 의견이나 즉흥적인 연기가 영화에 반영돼 바뀐 부분이 있는가.

시나리오는 사전에 이미 나왔고, 거기에서 크게 바뀐 것은 없다. 다만 촬영 전에 워크샵을 하면서 조금씩 바꾼 부분은 있고, 자기 인물을 만들어낸 친구들도 있다. 에스메랄다와 술래이만의 경우 시나리오 단계에서 이미 성격이 확실히 규정된 캐릭터다. 반면 웨이의 경우 실제 아이의 성격이 많이 반영됐다. 원래 시나리오 상에서 웨이는 굉장히 소심하고 불어도 잘 못하고, 실수할까 봐 항상 두려워하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실제의 웨이는 말을 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친구더라. 고스족 풍의 옷을 입는 아르튀르의 캐릭터도 그 친구가 직접 스스로 고안해 내게 제안한 경우다. 원래 옷을 그렇게 입는 친구는 아닌데 연구를 해왔더라.

▲ <클래스>의 한 장면. 왼쪽이 에스메랄라, 오른쪽이 웨이.

- 영화를 보다보니 아무래도 선생님(프랑수아)한테 감정이입을 해서 보게 되면서도, 양가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나도 학교 다닐 땐 저렇게 반항적이었지, 싶으면서도, 선생님한테 이입해서 보면서 애들이 좀 건방지다는 생각도 들고.

아이들은 학교를 좋아해서 오는 게 아니다. 그 나이 아이들에게 학교는 일종의 감옥과 같다. 게다가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갖는 상과, 실제 선생님의 모습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 간격에서 아이들의 저항심이 일종의 공격성을 띄고 나오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이란 별로 좋지 않은 의미에서 '뭐, 좀 똑똑한 사람'이지 않는가. 청소년들은 역할모델을 필요로 하면서도 반항하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권위'에 반항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원래 청소년기란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 자신에 대한 정의를 획득해 나가는 시기이기도 하니까. 영화에서 프랑수아는 아이들에게 일부러 자극을 유발해 그런 것들을 끌어내는 면이 있다.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에 충격을 받고 생각을 하고 스스로 논지를 풀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 학교영화라고 하면 대체로 굉장히 헌신적인 선생님이 일종의 영웅으로 등장해 학생들과 극적인 유대관계를 만들어가는, 전형적인 플롯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아마도 전형적인 헐리웃 영화들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이란 사회가 교사에게 특별한 소명을 요구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하지만 당신 영화에서 프랑수아는 그런 선생님이 아니다.

학교는 '동화'가 아니니까. 아주 좋은 일과 아주 끔찍한 일이 모두 일어난다. 나는 프랑수아를 정확히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과 정반대의 캐릭터로 만들고자 했다.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쉴 새 없이 질문공세를 던지는 25명의 아이들 앞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실수하기 마련이다.

- 그렇기 때문인지 프랑수아는 영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주 성실한 노동자처럼 보인다.

거기엔 동의할 수 없는데. 노동자들은 정해진 일을 그저 할 뿐이지만, 프랑수아는 학생을 한 명의 시민으로서 성장할 수 있게, 생각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 열정을 갖고 노력한다. 프랑수아는 교사로서 헌신하면서 일종의 위험도 감수하는 선생님이다. 프랑수아가 실수를 하는 것도 그렇게 위험을 선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냥 노동자 같은 사람들은 프랑수아가 아닌 다른 교사들이지. 프랑수아는 다른 교사들이 그런 식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 내가 말한 '성실한 노동자'란 그저 주어진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노동에 자부심을 갖는 일종의 이상적인 노동자를 뜻한다. 내 눈에는 프랑수아가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 의미라면야.

- 그렇게 열정을 갖고 헌신하는데도 아이들과는 일종의 대립적인 관계가 유지된다. 밖에서 만났더라면 (나이차가 나긴 해도)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교사와 학생의 관계로서는 아무리 상대의 좋은 점을 알고 호감을 갖는다 해도 결국 갈등과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는 듯도 하다.

교사와 학생은 결코 동등한 입장이 아니니까. 교사에겐 '권위'가 있다. 아이들과 충돌한다 해도 언제나 승리하는 건 교사일 수밖에 없다. 다만 프랑수아는 아이들을 대할 때도 아이가 아니라 어른들을 대하듯 했다. 그런 말실수를 한 것도 그런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프랑수아는 헐리웃의 학교영화에서의 영웅적인 선생님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영웅적인 선생님인 것 같다.

프랑수아는 내 아이들이 만났으면 하는 선생님이다.

▲ <클래스>에서 극중 교사인 프랑수아 역을 맡은 프랑수아 베고도는 실제 교사 출신으로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책으로 옮긴 영화 <클래스>의 원작 작가이기도 하다.

- 마지막 장면에서 학생 중 앙리에트가 프랑수아에게 "지난 9개월간 배운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프랑수아의 헌신과 노력에도 어쩔 수 없는 절망감과 무력감이 느껴졌다.

맞게 보셨다. 시스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프랑수아는 말로는 "그럴 리가 없다, 하나라도 배운 게 있을 것"이라며 앙리에트를 달래지만, 그도 속으로는 학습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앙리에트의 실패는 곧 프랑수아 자신의 실패라는 사실 말이다.

훌륭한 교사란 고점과 저점을 오가는 걸 잘 조절하는 것인 것 같다. 하루는 교사로서의 자부심으로 기쁘게 가르쳐도 바로 다음날이면 절망감을 느끼곤 하니까. 영화에서도 "이런 아이들 도저히 못 가르치겠다"며 화를 내는 교사가 나오지 않나. 많은 이들이 그 교사가 곧 그만두거나 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다음 장면에 보면 그 어느 교사들보다도 아이들의 입장에서 아이들을 대변해 말을 하고 있다. 그게 현실 속의 교사의 모습이다. 기술자들의 경우야 일을 얼마나 잘했는가, 결과물을 가지고 측정하기가 쉽지만 교사의 경우 그렇지 않다. 사람 관계 안에서의 일이기 때문이다.

- 관객과의 대화에서 당신은 "문제가 많음에도, 학교라는 시스템을 일단 신뢰하고 믿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줬으면 한다. 또한 당신의 교육에 대한 철학을 듣고 싶다.

학교라는 곳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서로 배치되는 개념을 동시에 수행하는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아이들을 더욱 꽃피우도록 하면서 자기 주장을 갖고 비평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면서도, 동시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표준화하면서 아이들의 정신을 자유롭게 하고 지성을 깨우치게 하기보다는 마치 말을 몰 듯 몰아넣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바람직한 학교의 역할이란, 결국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사물을 느끼고 배우려는 욕구를 북돋워주는 데에 있다고 본다. 이걸 너무 이상주의적이라 할 수는 없다. 이해하지 않은 걸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결국 가장 이상적인 교사는 소크라테스라고 생각한다. 그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면서 사람들이 그에 대답을 하고싶어 하도록, 그 대답을 통해 새로운 걸 깨닫도록 이끌었다.

- 술래이만이 결국 퇴학당하는 것 역시 공교육의 실패처럼 여겨진다. 한편으로 그 아이는 학교에 불려온 엄마의 증언에 의하면 굉장히 착하고 동생들도 잘 돌보는 아이이지만 학교에서만큼은 유독 모든 교사들에게 문제아라고 불린다. 학교를 나가서 결국 폭력과 연결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술래이만의 성격은 원래 시나리오에서부터 그렇게 설정된 건데, 어쩌면 아이에 대한 선입견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겠다. 웨이의 경우는 10살 때 프랑스에 온 아이로 설정됐다. 이렇게 각자 인종도 자기 배경도 다양하게 다른 아이들인데, 이런 아이들을 똑같이 교육하는 곳이 학교이기도 하다. 다만 영화에서는 프랑수아가 술래이만과 교감을 만드는 순간이 있다. 아이가 사진으로 찍어온 자기 과제를 칭찬하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그러나 다음 날 결국 프랑수아는 술래이만과 대립하고 결국 교장실로 끌고 간다. 학교란 곳이 돌아가는 방식이 이런 식이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학교가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학교에서 버려진 아이들은 결국 사회에서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이 될 수 있다. 만약 그 아이가 폭력과 연결된다면, 바로 그런 감정들 때문이겠지. 학교란 결국 아이들의 다양함과 풍부함을 키워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폭력을 줄이는 방법은 경찰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 한편으로는 술래이만이 예술가가 되겠구나, 하는 희망적인 생각도 가졌다. 어쨌든 프랑수아 선생님에 의해 스스로도 잘 몰랐던 예술적인 재능을 발견했지 않나.

사실 프랑스에서는 16살까지 학교에 다녀야 하는 게 법적인 규정이다. 그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겠지. 다만 그 아이의 장점을 계속 계발시켜 줄 노력이 필요한데, 과연 그런 선생님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 로랑 캉테 감독. ⓒ프레시안

- 당신의 작품들에서는 주로 갈등관계가 부자 간 갈등, 동성의 세대 간 갈등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클래스>에서는 다소 덜하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도 술레이만의 아버지의 경우 영화에 절대로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술레이만이나 그 가족에 엄청난 긴장감을 선사하고 있기도 하고.

'힘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나의 관심사이니까. 특히 부자관계란 인간관계의 잔인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부자란 위계가 확실한 관계이면서도, 폭력을 피할 수도 없는 관계, 그러나 때때로 심지어 폭력을 필요로 하는 관계이기도 하니까.

- <남쪽을 향하여>의 경우에는 그런 갈등이 다른 양상으로 표현되는 것 같기도 하다. 당신이 정말 강조하고 보여주고 싶었던 갈등관계는 어느 쪽인가.

물론 그 영화에는 흑백간, 경제적 계급간, 북과 남쪽의 갈등도 있지만, 무엇보다 두 가지를 강조하려 했다. 그것은 아이티 인의 비참함과 여성들의 비참함이다. 이 영화에서 아이티 인과 여성들은 모두 종류는 다르지만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다. 이들은 서로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착취를 하는 관계는 아니다.

- 현재 한국에는 프랑스 영화들이 그리 많이 소개되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당신과 동시대 감독 중 추천할 만한 감독과 작품들이 있다면.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예언자>는 아주 훌륭한 작품이다. 세드릭 칸 감독과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의 작품들도 추천하고 싶다. 고무적인 것은, 내 영화도 그렇지만 이 영화들이 독립영화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도 프랑스에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간의 경계가 모호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편집자 주 - 세드릭 칸과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의 영화는 국내에서도 간간히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 바 있다. 세드릭 칸 감독의 작품 중에서는 <권태>와 <당신은 나의 베스트셀러>, 그리고 <레스 리그레츠> 등이 소개된 바 있으며, 압델라티프 케시시(혹은 압델 케치체로도 표기된다) 감독의 영화로는 <생선 쿠스쿠스>가 개봉한 바 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