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안철수 후보의 자연스러운 선택은 소위 '후보 단일화'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이 '시대의 숙제'를 풀어 갈 수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납득시켜서 이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대통령 선거에 승리하는 길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국민의 삶을 바꾸어 낼 수 있는 새로운 정치는 어떤 가치와 철학에 기반하고 있으며, 쇄신되어야 할 제도와 조직과 문화와 관행은 어떤 것이며, 새로이 세워 나가야 할 제도와 조직과 문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밝혀야 했고,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한 그 자신의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했어야 했다.
주연 아닌 '조연' 역할 해왔던 안철수
그러나 정치쇄신과 관련해서 안철수 후보가 지금까지 제시한 방안들은 이 필요성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의 제안은 쇄신의 출발점으로 기성 정치세력의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데 머물고 있다. 대통령, 국회, 정당 등 대의민주주의 핵심 권력기구의 특권을 내려놓기 위해 그가 예시한 구체적 방안을 둘러싼 논쟁은 논외로 치더라도 그 다음 단계에 대한 안철수 후보의 구체적인 구상이 나오지 않고 있다. 대통령, 국회, 정당이 특권을 내려놓기만 한다고 새 정치가 바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새 정치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은 제시되어야 한다.
▲문재인, 안철수 후보 ⓒ프레시안(최형락) |
안철수 후보가 이 구상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그는 스스로 자신의 목표를 실현할 가능성을 잃고 정치쇄신의 주도권을 경쟁 상대에게 넘겨주게 된다. 즉 주연이 될 길을 포기하고 조연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출마선언을 한 이후 정치쇄신이라는 의제를 안철수 후보가 줄곧 주도해 온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 그가 해 온 것은 조연의 역할이었다. 자신이 정치쇄신의 주역이 되어 한국 정치의 틀을 어떻게 바꾸어 내겠다는 구상을 밝히고 이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 하지 않고 그는 줄곧 기성 정치권의 변화와 혁신만 요구해 왔다. 그리고 그의 요구는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에게 집중되었다. 스스로 의식했든 못했든 문재인 후보더러 새 정치 실현을 위한 변화와 혁신의 주역이 되어달라고 안철수 후보는 줄곧 요구해 왔던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가 수행하고 있는 역할의 패러독스는 바로 여기에 담겨 있다. 만약 그가 요구한 (혹은 지금도 요구하고 있는) 대로 민주당이 과감한 자기 쇄신을 실천하고 이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대폭 이끌어낸다면 안철수 후보는 자신이 출마 선언한 목표를 사실상 이루게 된다. 따라서 문재인 후보에게 흔쾌히 양보하고 그의 대선 승리와 새 정치 실현을 적극 후원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쇄신 구상과 로드맵을 만들어 이를 스스로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국민에게 천명하지 않고 기성 정치권에 쇄신을 요구했을 때 안철수 후보는 이 역설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의 역할은 다분히 변증법적이다. 자신이 내건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치는 소멸한다는 것이다. 소위 'Aufhebung', 즉 '자기완성'과 '자기소멸'의 동시 달성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안철수 후보는 출마선언 이후 지금까지 줄곧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를 도와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안철수 도움 받고도 '구태' 모습 보이는 민주
작년 서울시장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시민들의 열망에 압도된 바 있었던 민주당은 끝내 자기 쇄신에 실패하고 4월 총선에서 참패했다. 총선을 앞두고 많은 새로운 인물들이 '통합' 민주당에 합류했지만 이들의 힘으로 민주당을 바꾸어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견인해 내는 데 실패했다. 총선 참패 후에도 민주당은 반성과 쇄신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따라서 민주당이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자기 쇄신을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가 된 문재인 후보로서는 외부의 강력한 지원과 압력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안철수 후보가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의 구원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안철수 후보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정치쇄신을 목표로 내 건 순간 이번 대선은 '정책선거'가 아니라 '정치선거'가 되었다. 정치쇄신은 단숨에 대선 국면을 지배하는 최고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나 안철수 후보가 자신이 쇄신의 주역이 되려 하지 않고 민주당에 (후보 단일화의 조건으로) 정치쇄신을 요구하는 순간 그는 민주당 쇄신의 최고 조력자로 변신했다.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 협상을 시작하면서 '새정치 공동선언'을 요구하고 이를 위한 협의 팀을 구성한 것은 사실 민주당 쇄신을 위해 절실했던 '당외 쇄신비대위'를 설치해 준 것에 다름 아니다.
필자는 문재인 후보 경선 승리 직후 민주당 측에서 개최했던 토론회에서 이미 이와 같은 기구 설치를 권유한 바 있었다. 즉 대선 승리의 선결 과제는 민주당의 자기혁신이지만 혁신의 동력이 민주당 내부에서 나오는 것은 난망하니 당 외부에 '혁신비대위' 같은 것을 구성해서 시민사회의 비판적 지지 세력들의 참여를 요청하되 안철수 후보 측의 동참도 권유하라는 것이 필자 조언의 골자였다. 현재 가동되고 있는 (혹은 잠시 가동이 중단된) 단일화 협의 팀은 이와 같은 기구가 마침내 만들어져 가동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민주당은 진실로 안철수 후보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호남당이라는 숙명적 낙인을 마침내 떼어버리고 열린우리당 창당 당시의 염원이었던 전국적 개혁정당으로 변신할 새로운 기회를 안철수 후보가 제공해 준 것이다. 안철수 진영이 제시한 혁신의 요구 수위를 과감히 뛰어넘는 자기 혁신의 방향과 내용을 설정하고 이를 실천할 구체적 로드맵을 국민들에게 제시할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문재인 후보를 둘러싸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이 현 상황을 제대로 판독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언행을 보인 것은 이런 관점에서 대단히 실망스럽다.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는 안철수 후보가 협상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이유를 더 큰 틀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이를 혁신의 실천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 민주당의 변신 가능성을 여전히 회의적으로 보는 안철수 후보 측과 국민들의 의구심을 한꺼번에 불식시킬 수 있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문재인의 '혁신'이냐, 안철수의 '변신'이냐, 그것이 문제
안철수 후보 역시 중대한 기로에 섰다. 그는 지금까지 새 정치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기성 정치세력들에게 전달하는 사실상의 '대변자'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 자신이 새 정치를 주도할 수 있다는 '실천자'의 면모를 지금이라도 보이려면 그 자신만의 구체적인 정치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한다. 안철수 진영이 지금까지 금과옥조처럼 견지해 왔던 '전략적 모호성'은 '안철수 불안감'을 확산시켜 온 핵심 요인이었다.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가 자기 혁신의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고 국민의 지지를 끌어올리지 못할 가능성은 엄존한다. 현재 답보상태에 놓여 있는 안철수 지지도는 분명 '안철수 불안감'에 기인한다. 그 불안감은 그가 그 자신의 주체적인 정치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 결과 스스로 정치쇄신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신뢰감을 국민에게 심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권교체와 한국 민주주의의 도약을 열망하는 국민들의 마음은 문재인, 안철수 두 후보 모두에게 가 있다. 문재인의 과감한 혁신인가 아니면 안철수의 주체적 프로그램 제시인가. 야권 후보 단일화의 향방은 여기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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