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병원이 진행 중인 '대한의원 100주년-제중원 122주년 기념행사'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서울대병원이 공식 대응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서울대 의대에서 의사학(醫史學)을 연구하는 황상익 교수가 이번 기념행사에 대한 논평을 <프레시안>에 보내와 귀추가 주목된다.
황상익 교수는 대한의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국내 의사학계의 좌장 격인 인물일 뿐만 아니라, 서울대병원이 이번 기념행사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위촉한 '서울대학교 병원사 연구포럼'의 위원장이기도 하다. 이 포럼은 최근 서울대병원 측에 이번 기념사업에 대한 논평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해 그 내용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편집자>
요즈음 우리나라에 근대의학이 도입된 초기 역사, 특히 제중원과 대한의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의학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반길 일이다. 그러나 대체로 그러한 논의가 입지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벌이는 것이 아니라 제 지지자들을 향해 자기의 주장만 하는 것으로 비치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또 과거에 비해서는 나아졌지만, 아직도 자신이 소속한 기관의 역사는 미화하고 그렇지 않은 기관의 역사는 소홀히 대하는 경향이 남아 있기도 하다. 예컨대 제중원의 경우, 한쪽에서는 의료 선교사의 활동을 크게 부각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조선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 학문은 개방된 분위기에서 활발한 토론을 통해 발전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을 내가 속한 기관을 미화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로서는 새롭고도 긍정적인 경험이기에 언급하려 한다.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사업의 감시자가 되다
서울대병원은 '대한의원 100주년-제중원 122주년 기념행사'를 추진하기 위해 2005년 7월 '병원사 연구실'을 설치했다. (나는 서울대 의대 소속이고, 서울대병원 '겸직' 교수이지만 이 병원사 연구실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06년 7월 하순 병원사 연구실장은 연구실의 연구 내용을 객관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병원 외부 인사들도 참여하는 포럼을 구성하기로 결정했다며 나에게 포럼 위원장을 맡을 것을 요청했다.
연구실장은 제3자의 검토 없이 연구실과 병원 내부의 논의만으로 사업을 추진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념행사 추진을 결정하기 전에 그런 과정을 거쳤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기념행사 계획이 발표됐을 때부터 학계, 특히 의사학 전공자들에게서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자칫 병원의 의도와 무관하게 일제의 침략성과 식민지배가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연구실장은 거듭 병원과 연구실이 대한의원과 제중원에 관해 정해진 결론이나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서, "순수한 학술적 논의를 중심으로 진행될" 포럼의 성격과 역할에 대해 "병원사 연구실의 연구 성과를 점검하고 향후 연구 진행 방향을 결정하는 데 필요한 조언을 제공하고", "대한의원 100주년, 제중원 122주년 기념사업과 관련하여 이들 병원의 역사적 성격, 그 계승성 등에 대한 의견을 정리하는 것"이며, "포럼의 결론이 병원의 기념사업 방향에 영향을 미칠 것이되, 그 반대의 경우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연구실장이 상세히 설명한 포럼의 성격과 임무에 공감했고, 위원 중에는 서울대병원이 꺼려할(!) 만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포럼이 진정성이 있다고 여겨 위원장 직을 수락했다. 그리고 8월 11일 열린 포럼의 첫 번째 회의에서 포럼이 요식적인 과정이 될 것을 우려하는 위원들에게 포럼의 성격과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자유로운 논의에 행여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회의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연구실장은 다른 자리에서 위원들에게 포럼의 성격과 임무를 강조했다.
포럼 의견 기념사업에 반영될 것
나는 12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제중원과 대한의원 등 근대의학 도입 초기 역사에 관해 자유롭고 허심탄회하게 논의한 포럼 회의가 학술적으로 매우 유용하고 생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쟁점들에 대해 참석자들의 의견이 많이 교환, 공유되었고, 초기에 이견을 보이던 것들 가운데 의견 접근을 본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주장을 경청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학술토론에서 너무나 당연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잘 지켜지지 않던 모습을 경험한 것도 커다란 수확이었다.
제6차 회의 이후는 외국에 출장 간 위원들도 있어서 주로 이메일을 이용해 <제중원, 대한의원 등에 대한 서울대학교 병원사 연구 포럼의 결론 및 제언>을 작성해 1월 24일 오전 병원사 연구실에 제출했다. 하지만 같은 날 오후에 병원장 등 병원 간부진이 참석하는 '병원사 월례 세미나'에서 이렇게 작성된 보고서를 발표하고 토론하기로 한 일정은 일단 연기되었고 결국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2월 초순부터 여러 언론기관에서 포럼의 보고 내용을 알려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연구실장과 논의하여 공개 여부는 병원사 연구실에서 결정하도록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포럼은 학술적 논의와 조언의 자리이지 서울대병원의 기념행사에 대해 행정적으로 관여할 권한도 임무도 없다. 병원장은 2월 하순 위원들과 회동한 자리에서 포럼 활동에 대해 사의를 표하고 논의 결과를 기념사업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또 연구실장은 다른 자리에서 포럼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앞으로 포럼이 지속될 것이며, 계속 역할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포럼이 요식적 절차에 그칠 것을 우려했던 위원들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처럼 "포럼의 의견이 묵살되었다"는 일각의 풍문은 사실과 다르다. 예정되었던 '세미나'가 열리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포럼 위원들의 논의가 기념사업에 반영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근거는 없는 것이다. 포럼의 활동이 더욱 공개적이고 개방적으로 진행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내가 알기로 이 분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인지라 그 자체만으로도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러한 방식의 만남과 토론이 더욱 활발해져서 근대의학 도입기의 역사가 더욱 선명하게 규명되기를 기대한다.
서울대병원 왜 대한의원 집착하나?
마지막으로 서울대병원의 대한의원 기념사업에 대한 의견을 덧붙인다. 서울대병원이 식민성은 뚜렷한 반면 우리 역사와 의학에 관련된 근대성은 찾기 쉽지 않은 대한의원을 마치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양 끌어안으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또 대한의원을 통해 나타나는 일제의 침략성과 식민성을 지적하는 것을 서울대병원에 대한 비난으로 여기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개항기부터 대한의원 이전까지 우리 선조들은 온갖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의학의 자주성과 근대성을 이루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으며 우리는 그러한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만족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제중원, 의학교와 부속병원, 광제원, 적십자병원 등이 그 성과다.
불법적인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늑약에 규정된 것 이상으로 대한제국을 침탈했다. 의학도 예외가 아니었고, 바로 그 결과물이 대한의원이다. 이때부터 8·15를 맞을 때까지 의학 분야에서도 식민지 상황을 면할 수 없었지만, 우리의 선배들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일제에 저항하며 역량을 길러 마침내 독립된 나라에서 의학을 건설하고 발전시키는 주춧돌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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