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의원님, 64만 원으로 살 수 있다고 봅니까?' 물었더니…"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의원님, 64만 원으로 살 수 있다고 봅니까?' 물었더니…"

[기고] 파견 확장을 막으려 싸우는 기륭 비정규직들

기륭에 가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된다. 높은 포클레인 위에 김소연 분회장이 앉아 있고, 컨테이너 옥상 위에 윤종희, 오석순 조합원이 하얀 민복을 입고 이 추위에 스무 날 가까이 단식을 하고 있다. 나란히 말없이 앉아 있는 그들 뒤로 사라진 공장의 터와, 철거를 막아낸 경비실이 덩그렇게 보인다. 6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살은 떨어져나가고,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뼈였다. 그 앙상함, 단단함, 결기가 느껴졌다. 포클레인에는 흰 종이꽃들이 달려 있고 색지들이 공중에서 나부낀다. '하늘로 가는 꽃상여', 미술가들이 밤을 새워 작업한 다음, 포클레인은 톱날을 수그린 몸체에 꽃이 돋아나 노동자를 싣고 삶을 위해 전진하는 상여가 되었다.

▲ 기륭전자 구 사옥 부지 앞 포클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과 송경동 시인. ⓒ프레시안(최형락)

기륭에 남아 있는 여성조합원들은 서른 두 명이고, 현장을 지키는 이들은 여덟 명이다. 무엇을 위해,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이들은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박행란 조합원(48세)을 만나 컨테이너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004년 3월에 휴먼닷컴을 통해 들어와서 1년 6개월을 일했어요. 저는 오래 다닌 거예요. 수없이 사람 뽑고 자르고 했으니. 일 다닌 것보다 싸운 기간이 더 길죠. 조합원 중에는 2개월, 3개월 회사 다니고 지금까지 같이 싸우는 조합원도 있어요. 정규직이었든 1년을 일했든 몇 개월을 일했든 그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할 도리니까.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구로공단에서 기륭은 거의 최초로 파견직을 도입한 회사였다. 기륭은 기존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나서, 휴먼닷컴을 통해 파견직을 쓰다가 이후 워커스라는 새로운 파견업체까지 동원해 최저입찰제로 노동자를 썼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파견노동자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2005년, 당시 파견직의 97%가 여성이었다. 박행란 조합원은 일하면서도 자신이 파견직인지 몰랐다고 했다.

"파업하고 나서야 내가 비정규직인지 알았어요. 미혼 때 정규직으로 일한 경험이 있어 기륭에서 일할 때는 앞으로 계약직 되고 정규직 되나보다 막연히 생각했어요. 모르고 당해서 더 억울해요. 죽어라고 정규직 못지 않게 일하는데 사람 무시하고 정규직은 700퍼센트 보너스가 나오는데 우리는 없고, 아파도 말 못하고, 이유없이 해고당하고 그런 것이 화가 났어요. 가장인 여자들도 많았는데 말이죠. 어후, 너무 힘들죠. 여자들이 그렇게 일해도 최저임금을 받고. 누구나 그렇게 일하고 싶지 않은데, 남편이 못 벌면 일할 수밖에 없어요."

이전에는 연속극이나 잡지책, 연예인을 좋아하고 야구를 즐겨보던 박행란 씨는 노동조합을 하면서 그런 것들이 어렵게 싸우는 사람을 덮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잘 보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비정규직은 일을 '빡세게', 개미새끼처럼 시켜요. 컨베이어 타서 위성라디오가 간격이 빽빽하게 줄지어 쉬지 않고 나오면 감당을 못해요. 작업하면서 어깨가 뻐개지려 해서 직업병도 생기고 너무 아프다고 누가 말하면 잘라버렸어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해고고. 정규직이라면 함부로 못했겠죠. 내가 정규직으로 회사 다닐 때는 동료들과 피붙이보다 더 정을 나누며 다녔어요.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고 키우고 나서 다시 일하려고 사회에 나왔는데, 기륭에선 그런 게 없었어요. 밥 먹으러 가자는 사람도 없고 밥 먹는 시간이 사십 분인데 줄 새치기하고 제대로 먹을 수가 없어요. 빨리 먹고 일해야 하니까, 경쟁하고, 항상 시간의 여유가 없고. 하루 만에, 몇십 분 만에도 해고당하고. 사람 대우를 못 받는 거죠. 2007년도인가 투쟁을 하다 국회 앞에서 민주당 의원을 만나 물었어요. '의원님, 64만 원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니까 '아직 정규직이 많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해요. 이렇게 싸우고 있어도 파견직을 확대한다는데 노동자들이 안 싸우고 있으면 더하겠죠."

올해 10월 12일, 정부는 '국가고용전략 2020'을 확정했다. 2020년까지 선진국 수준의 고용률 7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라지만 정부안을 보면 현행 32개 업종으로 제한된 파견 허용 업종을 조정해 수십만 명에 이르는 제품·광고 영업, 경리 사무, 웨이터 등의 업종을 포함시켰다. 또 신설 기업과 청소·경비 업무까지 기간제 노동자 사용기간 규정을 받지 않도록 했다. 누구보다 먼저 파견직의 문제를 세상에 알린 기륭의 지난한 싸움은 파견직 확대의 추세를 온몸으로 막아내기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

"기륭의 투쟁이 잘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어느 정도 목표까지 잘 해결돼서 나중에 싸우는 노동자들이 힘을 받았으면 하는 그거죠, 저는 딴 거 없어요. 내가 90%를 잃더라도 나중에 싸우는 노동자들은 쉽게 끝내고 일찍 들어가서 쉴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천일이 넘게 싸우는 곳이 많아 걱정입니다. 우리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 안 해요. 연대하는 학생들과 다른 조합원들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노동자들은 파견을 막아야 합니다. 같이 더불어 사는 마음이 있어야 해요."

2005년 8월, 노동부에서 기륭의 불법파견 판정이 났을 때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기륭조합원들은 처음에 법을 믿었다. 그러나 정부가 시정 조치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도급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그것은 정부가 기업에 합법적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이 지역의 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 파견직으로 일하고 있다. 일주일 만에, 하루 만에 노동자를 소모품처럼 해고할 수 있는 파견직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륭노동자들은 불법파견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처음으로 세상에 요구한 이들이었다. 기륭은 파견직이 시작되던 상황에서 싸움을 시작했고, 지금도 회사가 직접고용의 책임이 있다는 원칙을 굽히지 않는다. 파견직 반대는, 기륭의 조합원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이유고, 정부 방침을 등에 업은 사측이 끝끝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륭노동자들이 파견직 확대를 막고 정규직화라는 원칙을 천명하는 것은, 동시대의 다른 이들과, 다음 세대의 미래를 걸고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투쟁하는 이유는 내가 겪어보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보고 넘길 수가 없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일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예요. 다른 이들도 불법파견 상황에서 일하게 되고 우리 애도 보니까 대학을 다녔어도 최저임금도 다 안주는 단기알바를 하더라구요. 우리가 2005년부터 싸워왔는데 지금 딸이랑 친구들 보면 일하는 환경이 더 열악해졌어요. 우리 조합원도 다른 데서 일한다 해도 몇 개월 만에 짤리고 하는데 그런 거에 너무 화가 나요. 고쳐지고 바뀌어져야 해요."

기륭 사측은 불법파견의 대가로 500만 원의 벌금을 냈다. 그것으로 형사적 책임을 다 했으니 끝났다고 치부했다. 김소연 분회장은 비정규직 문제는 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회사에는 아직 노동자에 대한 책임이 남아 있다. 고용의 책임이 있다. 정부는 노동유연화 정책으로써 법의 울타리 안에서 노동의 문제를 다뤄왔지만, 이들은 법이 보장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싸워왔다.

기업과 정부는 파견을 확대하기 위해 총공세를 벌이며, 기륭의 직접고용선례를 남기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이 기륭문제를 전체 노동계의 문제로 이해하고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이유다. 모든 이들이 기륭의 투쟁을 지지해야 할 이유다.

"이번에 타결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겨울은 따뜻하게 집에서 보내고 연대도 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2008년도부터 사측은 계속 거짓말하고 도장을 받고도 거짓말하잖아요. 해결이 잘 돼서 포클레인에서도 내려오고 단식도 끝났으면 해요. 단식이 세 번짼데 몸이 망가지더라고요. 기억력도 떨어지고, 여러 가지로 건강을 잃은 모습을 봐요. 오죽하면 단식을 하겠어요."

박행란 조합원도 2008년 여름 28일간의 단식을 했다. 작은 목소리로 머뭇거리며, 자신은 한 것도 없고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사회가 이들을 투사로 만들었다.

"힘들죠. 저렇게 단식하는 거 보기도 싫고 그래요. 어려운 상황이에요. 지금도 용역이 상주하는데 깡패들조차 정규직 대의원한테는 말을 함부로 안하고 비정규직한테는 욕해요. 성질나죠. 우리가 벌어놓은 돈으로 다니는데. '너네들 돈 주면 사람도 죽이겠다?' 말하면 '네!'라고 서슴없이 대답하죠. 너무 버릇없고 싸가지 없고 이제 맞서서 욕하기도 싫더라구요. 가만 혼자 생각하면 참 똑같은 사람한테 욕을 하게 만들고 지 부모나 누이 같은 사람인데 저렇게 하나, 같은 사람인데 저렇게 하나 생각하면 눈물나죠."

사측에서는 지금도 손해배상과 고소고발을 넣고 있고, 경찰서는 며칠 내 해산시키겠다는 위협을 하며 압박하고 있다. 날씨는 매서워지고 사람들은 드문드문하다. 주민들은 이들이 보기 싫다며 민원을 넣고 지나가는 차들은 길목에서 시비를 건다. 송경동 시인이 포클레인에서 떨어져 외친 말은 "빨리 나를 저 위에다 다시 올려줘!"였다. 발의 뼈가 으스러져서 걸을 수 없는데도 그는 기어코 기어올라갔다. 이것은 그런 싸움이었다.

1년 6개월을 회사에 다닌 박행란 씨가 6년이 넘게 이곳을 지키는 이유는 뭘까? 많은 이들이 떠나간 이곳에, 사회적 관심이 사라지는 이곳에, 어려운 상황에서 목숨까지 내어놓으며 싸우는 이유를 물어보고 싶다.

"다 가정은 어려워요. 여유가 있어서 하는 사람 드물죠. 하지만, '이거는 아니지. 사람이 태어나서 똑같은 사람에게 고통을 줄 수는 없다', 그 생각이에요, 저는. 노동조합 하면서 내가 몰랐던 것을 많이 보게 되었어요. 이런 세상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물론 세상이 호락호락 바뀌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바뀌고 있잖아요. 솔직하게 말하고 더불어 살려는 마음, 도와주려는 마음이 좋더라구요. 조합원이 힘들어 하나둘 떠나갈 때 그때 진짜, 믿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 같은 심정이었어요. 지금은 이해하죠, 하지만 어려운 건 똑같은데 나만 살겠다고…. 눈물나죠. 같이 하고 많이 하면 그래도 빨리 끝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커요. 회사가 우리에게 그렇게 하면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죠. 나는 그냥 당연한 일을 계속 하고 있는 거예요."

지독한 싸움, 막막한 싸움, 어쩔 수 없는 싸움이라고 누군가는 고개를 흔들 때, 그 자리를 지켜온 어떤 이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사람의 도리니까 하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자신이 일한 경험을 통해, 그 고통을 다른 이에게,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희망을 품고 모든 것을 걸어 이 자리를 지킨다. 하나둘 눈을 감는 사이 이제 곧 밀물처럼 밀어닥칠 상황을 예견하며, 나이 든 기륭의 여성노동자가 손을 내민다. 함께 합시다. 당신과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이 싸움을, 당신 혼자서도, 우리 혼자서도 할 수 없는 이 싸움을, 더불어 살기 위해서 이제는 함께.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