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연 재해로 2만7000명 이상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했고, 16만 명이 넘는 이재민들은 끝 모를 난민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다. 이 사고는 몇 주가 지나도록 아직 해결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원자로 수리에 동원된 도쿄 전력의 노동자들도 이제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고 한다. 방사능에 피폭된 지역에서 발견된 시신은 화장도 못하고, 매장도 못하고 어찌 할지 몰라 고민 중이라고 한다. 이번 원전 사고의 향후 진행과정이나 여파가 어느 정도일지는 어느 누구도 쉽게 단정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고 현장에서 1만 km 이상 떨어진 독일에 머물면서 나는 이 사건에 대한 독일 사회의 반응을 눈여겨보고 있다. 사건 당일부터 지난 3주 동안 독일 언론의 특파원들은 후쿠시마에서 도쿄로, 도쿄에서 오사카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현지 사정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이제 그 정도 했으면 된 것도 같은데, 사건 보도나 전문가 해설, 대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지난 3주 동안 매일 30분 이상 방송을 본 독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전 관련 전문가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다. 원자로의 구조가 어떻고, 노심 용융이 무엇이고, 연료봉의 훼손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떤 방사능 물질들이 방출되고 각각 반감기가 얼마이며, 그것이 미칠 영향이 어떤 것인지 외국인인 나도 다 외울 정도다. 언론의 보도에는 현지 사정은 물론 이 사고가 독일과 유럽의 환경에 미칠 위험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나아가 원자력 이용의 위험성에 대한 광범위한 진단과 문제 제기가 포함되어 있다.
▲ 일본 대지진 직후 센다이 교외의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
일본의 자연재해와 원전 사고는 먼 독일 땅에 정치적 지각 변동과 녹색 쓰나미를 몰고 왔다. 3월 11일을 계기로 독일의 에너지 정책은 일대 전기를 맞을 전망이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집권했던 사민당-녹색당 연립 정부는 현재 17기의 원자력 발전소 가동을 2018년까지 전면 중단할 예정이었지만, 새로 권력을 넘겨받은 기민당-자민당 정부는 지난해 10월 이 계획을 수정해서 원자력 사용 기간을 12년 더 연장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이 결정은 이제 철회가 불가피해졌다. 사건이 터지고 3일 뒤인 3월 14일 수상 앙겔라 메르켈은 석 달 간의 모라토리움을 선포하고 이 기간 동안 독일 전역의 원자력 발전소를 점검해서 안전성에 문제가 있는 발전소는 폐쇄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수상의 발언은 선거용이며 실효성이 없다는 반론에 직면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조처가 충분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노쇠한 원자로의 사용 중지와 원자력 이용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를 요구했고, 그런 가운데 2015년쯤에는 원자력 에너지 사용의 전면 중단이 가능하다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나왔다. 주말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여러 도시에서 원전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저항의 절정은 지난 3월 27일에 치러진 라인란트-팔쯔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지방 의회 선거였다. 원전 반대에 앞장 서 온 녹색당은 두 주에서 각각 15.4%와 24.2%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2006년에 비해 각각 두 배, 세 배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 특히 지난 58년 동안 기민당의 아성이었던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는 녹색당 주도의 연립 정부의 손으로 정권이 넘어갔고, 라인란트-팔쯔에서도 녹색당은 사민당과 함께 연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독일 최초로 녹색당의 주지사가 탄생했고, 녹색당 주도의 새 정부는 원자력 사용 중지와 대체 에너지 개발 등을 정치 현안으로 내걸고 있다. 이런 독일 사회의 반응을 보면서 '독일인의 불안증'이라며 실소를 짓는 독일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론의 대세를 바꾸지는 못할 것 같다. 산업혁명, 시민혁명에 이어 제3의 혁명, 녹색혁명이 시작된 것 같다.
독일 사회의 이런 '과민 반응'을 나는 한국사회의 반응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멀리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를 대하는 한국 언론과 정부의 태도는 먼 산 불 구경하는 것 같았다. 사건에 대한 심층 보도, 예상되는 위험에 대한 진단과 대책, 우리나라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검토나 원전 정책에 대한 재고 요구, 그 어떤 것도 충분치 않았다. 사건 직후 가장 먼저 바람을 탄 것은 '편서풍'이었다. 편서풍 탓에 일본의 방사능 물질은 태평양 쪽으로 날아가고 우리나라에는 오지 않으니 안심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국지풍은 없고 편서풍만 있을까? 아무리 편서풍이 우리의 메시아라고 한들 1만km 넘게 떨어진 독일이나 유럽에서 걱정하는 사고의 여파를 1000km도 떨어지지 않은 이웃 나라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한반도의 피해 규모는 바람만이 알고 있는가? 바람만 동쪽으로 불어주면 인근 해역의 오염도, 방사능 낙진도, 교류 물자의 오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내가 확인한 것 중 유일하게 반가운 소식은 동해시 시의회에서 삼척의 원전 유치에 반대하는 의결을 했다는 것뿐이었다. 한반도에 미칠 사고의 영향이 점점 가시화되면서 이제야 정부와 관계 기관은 당황해서 허둥대는 기색이다.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가 한반도 전역에 미칠 당장의 영향도 걱정이지만, 더 큰 걱정거리는 원전 사용의 위험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불감증이다. 언론이나 정부도 그렇지만,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원전 문제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을 확인하기 어렵다. 지난 2007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 때 드러났던 태도와 이웃나라의 원전 사고에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 사이에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 국민의 건강과 후세대의 안전에 미칠 영향을 따져 볼 때 미국산 소고기 수입은 큰 문제여도 좁은 땅덩어리에 현재 21기나 가동 중인 원자력 발전소는 아무 걱정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원전의 사용을 불가피한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런 불가피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원자력 사용에서 벗어나려는 우리 사회의 노력이 거의 없다는 사실부터 직시해야 할 것 같다.
최근 공개된 Pew 환경 그룹의 자료(☞바로 가기)에 의하면, EU를 제외하고 G20에 속한 19개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의 청정 에너지 개발 투자액은 멕시코, 터키, 아르헨티나에 이어 17위에 올라 있다. 무엇이 우리의 발목을 원자력의 족쇄에 묶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정부나 원전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원전은 자연재해에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고 강변한다. 부분적으로 맞을 수도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지진이나 쓰나미의 위험 때문에 독일이 원전 사용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은 아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대하면서 독일의 원전 반대자들은 아무리 원전 시설의 안전을 도모해도, 비행기 추락이나 테러 공격으로 인한 위험을 없앨 수 없다는 주장을 폈고, 독일 사회는 그런 문제제기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의 사정에 비추어 보면 그런 우려는 독일인 특유의 철학적 사변처럼 보일 정도다.
놀랍게도 우리나라에는 북한의 공격이나 전쟁 위험을 걱정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를 원전 사고의 위험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제까지 핵무기 개발을 이유로 내세우면서 북한에 대한 어떤 인도적 지원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북한의 핵 공격이 없어도 한반도는 핵 때문에 폐허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쯤은 알아 차려야 하지 않는가? 세계 10대 원전 대국 가운데 원전 밀집도가 1위인 남한 자체가 이미 불만 붙이면 터질 핵폭탄이다. 북한의 재래식 무기에 의해서건, 심심치 않게 떨어지는 낙후한 우리 공군기에 의해서건 원전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 전쟁이건 그에 준하는 형태의 사고가 일어나면, 무슨 방법으로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관련 기사: "한국, 원전 밀집도 1위…일본보다 더 큰 재앙 온다")
전쟁 위험에 대한 걱정이 근거 있는 것이라면, 원전 사고에 의해 한반도 전체가 불모의 땅으로 돌변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도 똑같이 근거 있는 일이다.
낙관주의자들은 그런 호러 시나리오를 한가한 자의 공상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3월 11일 이전에 누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현실적인 일로 상상했을까? 인간의 삶은 운명의 선의에 몸을 맡긴 채 속 편하게 살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안락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는 두 얼굴이 있다. 그리고 운명이 가혹한 얼굴을 내보일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미리 생각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숙고의 의무다. 그런 숙고는 동물이 아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행동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숙고의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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