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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民의 도시가 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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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民의 도시가 된 서울

[해방일기] 1946년 6월 21일

1946년 6월 21일

6월 21일 맥아더 사령부의 기자 회견에서 재일 조선인 귀환 문제가 언급되었는데, 아직도 50여만 명의 미귀환자가 일본에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5월 15일까지 106만 명이 귀국한 것으로 집계되었는데(<조선일보> 5월 22일자), 해방 1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까지 재일 조선인의 3분의 1이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21일 기자단과의 회견 석상에서 재일 조선인 귀국 계획에 관하여 대강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3월 18일 조사한 귀국 희망자는 51만3000명이었는데 이것을 하루에 4000명씩 9월 말일 완료될 예정이다. 귀국자는 일상생활품 250파운드와 현금 1000원을 가지고 갈 수 있다.

지령을 받고도 승선지에 집합치 않는 자는 귀국권을 포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잔류자는 일인과 같은 배급, 기타의 대우를 받게 된다. 일단 귀국한 자는 일본과의 무역이 정식으로 재개될 때까지 다시 올 수 없으며 귀국자가 남겨둔 재산은 일본 정부에서 보관한다.

(<조선일보> 1946년 6월 23일자)

지금의 집계로는 해방 당시 약 200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있었고, 그중 약 60만 명이 일본에 남아 재일 동포 사회를 이루었다. 1946년 6월까지 귀국하지 않고 있던 조선인 중 대다수가 결국 귀국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 이들은 귀국을 거부했을까?

당시의 재일 조선인 중에는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비롯해 현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귀국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본 사회 안에 생업을 가지고 정착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이 귀국할 경우 100여 킬로그램 이내의 짐과 현금 1000원만을 가지고 나갈 수 있게 한 것은 재조선 일본인의 귀국과 같은 조건이었다. 재산을 남겨두면 일본 정부가 보관해 준다고 했는데, 그 재산을 다시 볼 날을 기약할 수 있었을까?

<신천지> 1-9호(1946년 10월)에 실린 오기영의 칼럼 "전재동포"에 이들이 돌아올 경우 처하게 될 상황이 절실하게 그려져 있다. 워낙 좋은 글이라 독자들의 감상을 위해 길게 옮겨놓는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꿈에도 그리던 그 고국, 압박자가 쫓겨나고 우리의 땅이 된 해방의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원치 아니하는 재외 동포의 수가 무려 수십만이라고 하지 아니하는가.

이들은 일찍 조국을 배반하고 나갔던 이가 아니니 조국에는 이들을 반겨줄 동포가 있을 뿐이요, 그 밉던 원수는 모두 쫓겨난 오늘이다. 모두 다 돌아와서 해방의 기쁨 속에 산천도 새로워진 금수강산에서 서로 붙안고 새 나라를 이룩해야 할 것이거늘 멸시와 천대에 젖은 외지에 그냥 남아 있기를 원한다니 웬 일인가.

그러나 기막힌 일이다! 이들은 해방은 되었다고 하나 아직도 완전한 내 나라가 아닌 이 땅에 온대야 즐거움보다는 슬픔이 앞서고 평안함보다는 고생스러움이 더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얼마나 많은 전재동포가 해방의 조국이라고 찾아와서 지금 헐벗고 굶주리며 거리에 헤매고 있는가. 그들을 위하여 집을 마련하기 전에 왜놈의 집은 모조리 권세에 등을 댄 양반들이 차지하여 버렸고 의료품을 독점한 악덕 상인들에게 이들의 헐벗은 모양을 보며 동포애를 느끼라고 외쳐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쌀 한 말에 오백 원 하는 이 땅에 천 원씩 밖에 더 들고 오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먹을 것을 주는 이가 없었고, 만주의 거친 벌판을 옥토로 만들고 왜지의 그 거친 노동에도 견디던 이들이언마는 이들에게 일거리를 주는 직장도 농토도 없었다.

아무리 조국의 해방이 기쁘고 어서 바삐 돌아오고 싶다 하더라도 거지가 되기 위하여 고국에 돌아온다는 것은 생각할 일이다. 거지가 될 수 없어서 떠난 고국이 아니냐. 이제 거지가 되고자 고국을 온대서야 이들 자신보다도 고국의 산천이 먼저 통곡할 일이 아니냐.

신문은 한 번 돌아왔던 이들이 밀항선을 타고 왜지로 가는 이가 많다고 보도하고 있다. 여북하여 도로 나갈까. 그 심정만도 그가 막히거늘 이건 안 된다고 도로 끌어 들여오니 끌어 들여다가는 이들에게 안도할 만한 무슨 생업을 주었는가. (<진짜 무궁화>(오기영 지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펴냄), 104~105쪽)

6월 21일자 <조선일보>에는 38선 이남의 조선에 아직 남아 있는 일본인 수가 437명이라고 보도되었다. 집계를 피해 숨어 있는 일본인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재조선 일본인은 거의 예외 없이 귀국한 반면 재일 조선인의 상당수는 일본에 주저앉았다.

조선에 와 살던 70만 일본인 중 조선어를 익힌 사람이 극소수였다는 점, 그리고 조선인이 일본의 식민 지배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인들이 조선에 남을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방 후의 조선이 일본보다도 사람 살기에 나쁜 곳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재조선 일본인에게는 절대 남을 수 없는 곳이었고, 재일 조선인에게는 별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전우용은 1946년 말의 상황을 이렇게 그렸다. 서술의 대부분은 그 6개월 전의 상황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1946년 말, 전국에 흩어진 '전재민'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군정청과 전재동포원호회 중앙 본부의 조사 결과는 280만 명 정도였지만, 신문들은 600만에서 800만 사이에서 그때그때 편리한 대로 기록했다. 그들 중 25만 명 내지 30만 명 정도가 아무 대책 없이 서울에 머물렀다. 월남민을 비롯한 상경민도 30만 명을 웃돌았다.

미국인 선교사들을 통해 군정청에 선을 댈 수 있었던 일부 월남민들과 아주 운이 좋거나 힘이 센 극소수 귀환자들은 여러 가구가 한 집을 쓰는 방식으로나마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떠난 '문화 주택'들이나 음식점, 종교 시설 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전재민들에게 그런 기회가 돌아올 리 없었다. 군정청과 민간 구호단체가 제공한 임시수용소에라도 들어갈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연인원 150만 명이 몰려든 서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원과 다리 밑, 철도역과 방공호에 몸을 눕혀야 했다. (<현대인의 탄생>(전우용 지음, 이순 펴냄), 26~27쪽)

충주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유종호의 회고를 보면 '전재동포'는 지방 도시 주민들도 그 존재를 느끼고 있던 대상이었다. 그러나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처럼 사회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에 기생하는 존재였다.

전쟁 통에 피해를 입고 일본이나 만주에서 귀국한 사람들을 전재동포라 부른 것이다. 반드시 이 전재민과 관련된 것은 아니겠지만 걸식하는 사람들이 해방 후에 갑자기 불어난 것은 사실이다. 아침저녁으로 때가 되면 끼니를 구걸하는 사람들이 집 안으로 들어와 서 있었다. (…) 충주에서 영남으로 가는 국도가 지나가는 속칭 용산 다리 밑에 난 약간 도톰한 퇴적지 족으로 가마니때기를 깔고 노숙자 가족이 터를 잡았다. 이들은 곧 푸대 같은 것을 모아 바람을 막고 아예 거기서 정주하였다. 우리 집은 용산 다리에서 가까운 거리였는데 이 다리 밑 노숙 가족이 우리 동네에서 걸식을 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얼굴이 알려질 수 있으니 생판 모르는 쪽에서 구걸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나의 해방 전후>(유종호 지음, 민음사 펴냄), 198~199쪽)

귀환 동포를 주축으로 큰 규모의 유민(流民) 집단이 발생했다. 농촌과 지방에는 유민들을 위한 일거리가 없었고, 그들은 생존을 위해 걸식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에 비해 대도시에는 질 나쁜 일거리라도 일거리를 찾을 여지가 있었으니 유민들이 대도시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1930년생으로 평양에서 자라고 1946년 8월 단신 월남한 채병률의 회고를 1945년 12월 16일자 일기에 소개한바 있는데, 다시 한 번 옮겨놓는다.

서울에 와서도 돈이 없으니까 막막하잖아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찹쌀떡, 메밀묵, 아이스케키 장사, 그리고 서울역과 염천교 앞에서 담배꽁초 주워 까서 팔고, 공책 장사, 연필 장사, 양초 장사 등 안 해본 게 없습니다. 생전 해보지도 못한 일이라 힘들었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밥은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그러다 48년에는 남대문시장 서복여관에서 가짜 담배 장사를 했어요. 용산동 2가가 그때는 해방촌이라는 데였어요. 이북 사람들이 넘어와 형성된 동네죠. 거기서 만든 가짜 담배를 받아서 팔았던 겁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쳤어요.

지금 장충동 부근에 그 당시 이북에서 넘어온 학생들이 많이 모이니까 이북학련 천막을 쳐줬어요. 그때부터 반공 투쟁이 시작된 거예요. 이북에서 넘어온 어른들은 서북청년회, 학생들은 이북학련회. 우리의 활동은 좌익 세력을 쳐부수는 행동 부대로서의 역할이었어요. 예를 들어, 그 당시에는 남로당이니 뭐니 다 합법 정당이었기 때문에 경찰관들이 우리에게 지도를 갖다 주고는 어디어디 있는 놈들이 악질 빨갱이들이니까 가서 혼 좀 내주라고 했어요. 그러면 밤에 가서 숨었다가 그들을 흠씬 두들겨 패는 거예요. 패다가 우리도 힘이 달리면 뒤지게 맞고요. (<8·15의 기억>(한길사 펴냄), 351~352쪽)

"뭉쳐야 산다"는 것은 유민들이 절실하게 느낀 생존 원리였다. 정치적 동원의 손길이 뻗칠 때 그들은 생존의 의지를 가지고 호응했다. 이런 유민이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도시 서울은 주민들의 정치적 표현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곳이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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