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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운동은 망했어!" "아니, 이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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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운동은 망했어!" "아니, 이제 시작!"

[프레시안 books] G. D. H. 콜의 <영국 노동 운동의 역사>

올해는 20년 만에 찾아온 총선과 대선이 동시에 있는 해이다. 또 한반도를 포함한 주변 나라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정권 교체가 있는 해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승리와 환호로 가득찬 2012년을 그렸는지 모르겠다. 4월 총선에서 진보·개혁 세력이 이명박 정부와 새누리당을 누르고 그 여세를 몰아 대선도 승리하는 그림말이다. 이 과정에서 진보 정당은 정권 교체의 일익을 담당하고, '연립 정부'의 당당한 파트너가 되는 그림도 추가했는지 모른다. 부가해서 '제 머리 못 깎는' 노동 운동의 과제들을 '정치'라는 우회로를 통해 해결'해주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선을 불과 80여 일 남겨둔 지금, 미래 전망은 혼돈 안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느 것 하나 희망적인 구석은 없는 듯하다. 노동 정치 운동의 몰락과 제 역할을 포기한 듯한 노동조합 상급 단체의 모습을 보면 암담하다. 진보 정당과 노동 운동의 빈약한 슬로건들은 (사자후는 고사하고) 주인의 입에서 겉돌기만 할 뿐이고 극소수의 청중들에게도 진심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여야, 무소속의 대선 캠프가 가동되면서 줄타기와 합종연횡이 시작되었다. 또 다시 주체들의 자기 정립은 실종되고 있다. 풀어야 할 숙제는 많은데, 엉킨 실타래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노동 운동의 위기'라는 익숙한 단어는 너무 오래되어 곰삭아 버렸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닌가?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장(場)에는 '전설'로 불리는 사람이나 작품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대개 '신비주의'적이며 관음증의 욕망을 배가시킨다. 영국의 역사학자 조지 더글러스 하워드 콜(G. D. H. Cole) 역시 그러했다. 수많은 역사책들의 문헌 해제에 자주 등장하는 이 요상한 이름의 역사가는 그러나 '참고 문헌'을 벗어나 자신의 진면목을 알몸 그대로 드러내는 기회를 한국에서만큼은 좀처럼 잡지 못했다.

오래된 저서의 일부만이 번역되어 있고(<사회주의 사상사Ⅰ>(1987년)), 미국의 사회학자 라이트 밀즈가 펴낸 <마르크스주의자들>(한길사 펴냄, 1982년)에 단편적인 글 하나가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소개하는 이 책 <영국 노동 운동의 역사> 역시 1980년에 선보였다가 사라진 지 오래다. 오죽하면 몸이 달아오른 이 번역본의 감수자 장석준은 출간되지도 않은 책에 대한 서평을 2월에 썼겠는가? (☞관련 기사 : 박정희 추종하는 빨갱이? 좌파 살길은 '녹색'뿐!)

▲ <영국 노동 운동의 역사>(조지 더글러스 하워드 콜 지음, 김철수 옮김, 장석준 감수, 책세상 펴냄). ⓒ책세상
돌이켜보면, 콜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톰슨이 1963년에 발간한 기념비적 저서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창비 펴냄) 역시 출간된 지 37년이 지난 2000년에 번역되었고, 콜의 선배들이었던 페이비언주의자 시드니 웹과 베아트리스 웹 부부의 1920년 저작 <영국 노동조합 운동사>는 무려 70년이 지난 1990년에 겨우 번역되었다.

한국의 지적 풍토는 냄비와 같아서, 유행에 따라 쉽게 불붙었다 꺼진다고들 말한다. 마르크스주의 바람이 한 번 불었다가, 포스트주의 바람이 한 번 불고, 비판 이론은 한 물 가고, 발전주의 이론이 훑고 간다. 한 번 바람이 불 때 주요 저작이 전부 소개되면 좋겠지만, 바람의 주기는 그러기에는 너무 짧다.

무슨무슨 주의와 분과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자기 분야를 진득하게 소개하는 학자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밀턴 프리드먼이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꾸준히 소개하고 한국 사회에 적용하고 있는 뉴라이트 자유기업원이 그래도 낫다고 해야 하나? 비극인지 희극인지 모르겠다. 특히나 노동 운동사, 사회 운동사는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맞이한 깜짝 특수가 지나간 후 때 이른 조락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나마 영국의 경우에는 톰슨과 웹 부부의 책, 고세훈의 <영국노동당사>(나남출판 펴냄) 등 몇 권 책이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스웨덴, 미국 등 서구의 주요 노동 운동의 역사와 시스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너무 없다. 서구 이외의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의 번역을 계기로 콜의 다른 저서, 예를 들어 <협동조합의 한 세기>, <길드 사회주의 재론>, <일반 노조의 시도> 등도 번역되었으면 좋겠고, 아돌프 스터름탈의 책과 같이 세계 노동 운동사의 지적 공백을 메워줄 수 있는 책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대체 노동조합 내셔널센터의 자원은 다 어디에 쓰이는 것일까? 목마른 사슴들은 많은 듯한데, 정작 자기 먹을 우물 팔 시간과 여력은 없는 것일까?

아돌프 스터름탈이 쓴 명저 <유럽 노동 운동의 비극>(황인평(황광우) 옮김, 풀빛 펴냄, 1983년)의 문헌 해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국 노동 운동에 관한 '가장 간결한' 역사는 G. D. H. Cole의 ."

그 '간결한' 책이 바로 이번에 재출간된 765쪽짜리 <영국 노동 운동의 역사>이다. 결코 '간결'하지 않으나 '간결하다'고 소개되는 이 책에는 절대로 '간결'하지 않은 영국 노동 운동의 지난한 투쟁과 역사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산업 혁명, 차티스트 운동과 1848년 세계 혁명, 1880년대의 사회주의 운동의 분출, TUC(British Trades Union Congress)와 노동당의 창당과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과 짧은 전간기 등, 숨가쁘게 달려온 노동 운동의 역사가 자본주의의 선두 주자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다.

이 속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영국 노동 운동의 온건함과는 다른 격렬함과 혁명적 열기도 있다. 또 경제 투쟁이 가로 막혔을 때, 정치 투쟁의 외피를 두른 차티스트 운동이나, 반대로 노동 정치가 효력이 없자 경제 투쟁으로 전환하는 노동자들의 '본능적 기민함'은 가히 19세기 '집단 지성'의 힘을 보는 듯하다.

콜은 영국 노동 계급 운동을 굵직한 사건들을 경계로 해서 몇 개의 시기로 나눈다. 그 기준은 자본주의의 성격 변화와 이에 맞춰 달라져 온 노동 운동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먼저 1789년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쳐 1848년으로 이어지는 1단계이다. 이 시기는 "과거를 회고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장래를 기대한 만큼이나 과거를 회고"하는 시기였다. 말하자면, "노동 운동은 힘이 너무 미약했던 반면에 자본주의의 상승하는 힘은 너무나 강했던" 시기였다.

콜은 이러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압축한다.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차티스트 운동에 이르기까지, 차티스트 운동을 포함하여 모든 노동 계급의 운동은 농민 운동이었다."(177쪽) 미국의 사회학자 비버리 실버 식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거대하고 격렬한 소요를 '폴라니식 노동 소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상승하는 힘'은 곧바로 빅토리아 시대의 중기라 일컬어지는 2단계를 지배한다. 1848년부터 1880년에 이르는 2단계는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황금 시대'였다. 이 시기에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은 견고하게 발전하고, 운동은 온건화된다.

3단계는 1880년대에 사회주의의 교리가 노동 계급에 폭넓게 수용되면서 시작된다. 노동 운동은 점점 더 미숙련 노동자층에게 받아들여지고, 점차 노동 정치 운동의 독자성이 발현된다. 러시아 혁명과 양차 대전 시기인 4단계에 와서 영국 노동 운동은 일국 차원에서 벗어나 국제화되기 시작한다. 또 전쟁이 가져온 기술적, 사회적 변화로 인해 노동 계급 내부의 막대한 변화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여성 노동의 전면적 등장과, 미숙련 노동의 전면화가 이에 해당한다.

자본주의 전 시기에 걸쳐 영국 노동 운동은 자신의 '연합적 힘'(에릭 올린 라이트)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켜 왔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힘이 항상 노동 계급의 승리를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가령 1926년 총파업의 패배와 1931년 2차 노동당 정부의 붕괴와 이어진 선거 패배는 비록 금본위제의 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지만, '연합적 힘'이 자신의 목적을 정교히 하지 못한 탓인 것도 분명했다.

수사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외칠 수는 있으나, 노동 운동의 몸통 역시 고전적 자유주의에 맞춰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2차 노동당 정부를 스스로 붕괴시키고 노동당을 탈당한 램지 맥도널드와 필립 스노든은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거부하고 고전적 자유주의를 고수하고자 한 단순한 반동적 대행자에 불과했을 뿐이다.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게 자신의 '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모든 나라, 모든 시기의 노동 운동의 과제일 것이다.

페이비언주의는 영국의 사회주의의 대명사이다. 이 사상은 영국 노동당을 넘어 영국 국가와 사회 제도와 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시드니 웹과 베아트리스 웹 부부, 버나드 쇼를 비롯한 페이비언들은 존 케인스, 윌리엄 베버리지 등과 폭넓게 교우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영국식 판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영국 사회주의자들에게 페이비언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숙명과도 같았을 것이다. 콜은 <페이비언 사회주의>라는 책을 낸 바 있으며, 에릭 홉스봄의 박사 논문도 <페이비언주의와 페이비언들>이었다. 콜의 부인인 마거릿 콜은 <베아트리스 웹과 시드니 웹> 전기를 썼다.

콜에 대해 '페이비언의 재갈'을 문 '볼셰비키의 영혼'이라고 한다. <영국 노동 운동의 역사>에는 '볼셰비키의 영혼'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페이비언의 구심력에서 벗어나려는 여러 가지 언급들을 제시한다. 사회주의의 불가피성 못지않게 점진주의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의 '직접 행동'과 '혁명적 열기'를 배격한다.

웹 부부와 쇼와 같은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정치적 민주주의가 자동적으로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로 이어질 것이라 봤다. 그들에게 의회 민주주의는 필수적이었고, 점진주의와 합헌주의는 당연한 구성물이었다. 그래서 콜은 페이비언협회에 대해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자유롭게 사유하는 단체"라고 말한 바 있다.

콜은 페이비언들과는 다르게 미국으로부터 역수입된 산업별 노동조합 운동이나, 생디칼리즘, 길드 사회주의를 중요하게 다룬다. 콜은 경제적 민주주의를 이끄는 권력이 위치하는 곳을 산업 현장에서 찾았다. 따라서 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노동 정치 운동 뿐만 아니라,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주체들이 참여하는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운동이 필수적인 것이다.

콜은 페이비언의 엘리트주의 역시 넘어서고자 했다. '물처럼 차가운 시드니 웹'과는 달리 콜의 가슴은 불처럼 뜨거웠으며, '방만 깨끗이 청소'하고자 한 게 아니라, '영혼의 창문을 열고자' 했다. 콜은 영국 사회주의에 짙게 스며든 그 페이비언주의를 넘어서고자 한 것이었다.

<영국 노동 운동의 역사>는 그래서 "노동조합이란 임금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 생활 제 조건을 유지 또는 개선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항상적(恒常的)인 단체"라고 정의한 웹 부부의 <영국 노동조합 운동사>와는 다르다. 웹 부부에게 노동조합은 그 성격상 경제주의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조직이다. 하지만 콜은 "노동 운동은 노동조합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노동조합은 노동자가 자기 신뢰와 단결을 배우는 학교"로 본다. "본질적으로 노동 계급의 정치 조직은 노동조합 운동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콜은 영국 노동 운동을 노동조합 운동에 한정시키지 않는다. 노동 정치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 역시 노동 운동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협동조합 운동에 대해서 많이 다루고 있지는 않다. 콜은 "세 날개"(674쪽)를 인식하고는 있지만, 서술에 있어서는 "양 날개"에 치중하고 있다. 그 이유는 현실에서의 협동조합 운동은 발전 과정에서 변혁성이 거세되고 독립성이 강화되면서 '양 날개'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협동조합 운동을 경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공통의 필요에서 발생했으며 동일한 계급에 의존"하지만 "그들의 이념과 열망을 각기 다른 입장에서 표현하려고 할 뿐"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힘'의 중요한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콜에게 있어 세 날개는 "분리할 수 없는 한 줄기의 운동"(23쪽)이다.

콜의 책은 톰슨의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과 같은 명확한 역사 이론을 토대로 집필된 역사서는 아니다.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진 영국 노동 운동에 대해 1789년 이후부터 1947년 무렵까지 전반적으로 평이하게 서술한 통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전 지식이 많지 않은 역사 비전공자들이 보기에는 콜의 책이 훨씬 쉽다. 웹 부부와 톰슨에 비해 더 긴 시기와 더 많은 주제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콜의 <영국 노동 운동의 역사>를 읽다보면, 톰슨이 상정한 '노동 계급 형성'의 시기인 1780~1832년이 너무 빠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톰슨은 영국의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가진 하나의 계급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루면서, 그 시기를 대략 1780~1832년으로 보고 있고, 자신의 저서도 그 시기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콜이 묘사한 이 시기 노동 계급은 '낡은 정신'을 간직한 과거의 계급에 불과하며, 톰슨이 마지막으로 다루었던 1832년의 선거법 개정의 결과도 "오히려 노동자들은 선거권을 빼앗겼고 주인이 정치권력을 단단히 거머쥐었"다고 본다. 영국의 역사가 홉스봄 역시, "톰슨이 영국 사회에 노동 계급이 등장한 시기를 19세기 초로 설정한 것은 옳았"지만 "노동 계급은 톰슨의 책이 이야기를 끝맺은 지 한참 후까지도 실질적으로 '형성'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홉스봄은 콜이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시기, 즉 "'전통적인' 노동 계급이 출현한 시기가 1880년대 훨씬 이전이 아니라, 그 다음 20~30년 사이"였다고 보는 것이다.

홉스봄의 말대로 노동자 대중들은 활동가들의 의식과는 다르며 활동가들의 기대에 맞추어 살지 않는다. 영국 노동 운동이 위기에 봉착하고, 사회주의자들이 때때로 절망적인 상황을 개탄할 때, 노동 운동의 지도자들이 두려움 속에서 노동 계급을 '지도'와 '통제'에 가두고자 할 때 오히려 영국 노동 계급은 다른 '길'을 만들었고, 다른 '성격'을 창조했으며 무엇보다 '용기'를 내었다.

언뜻 모순적으로 보이고, 때때로 이기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태도와 선택을 토대로 해서 사회주의도, 창조적이고 전복적인 에너지도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결코 간략하지 않은 영국 노동 운동의 역사에는 승리의 영광도, 패배가 남긴 상처도 모두 들어 있다. 하지만 상처는 교훈을 동반하기 마련이고, 새로운 길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몸으로 체화시켜 켜켜이 쌓아 온 영국 노동 운동의 우여곡절을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오래된 콜의 저서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우리가 바라보는 시간의 지평을 더 넓게 잡는 교정의 기회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이 '시간 지평'의 교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는 절망벽'에 대해 '낙관적 태도'로 마주할 수 있다.

지금은 비록 한국의 노동자 정치 운동이 좌초한 것으로 보이고, 노동 운동의 상급 조직들은 계급 조직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포기한 듯이 보이며, 현장의 열정과 에너지는 소진한 것처럼 보이는 현재. 당이든, 노동조합이든, 협동조합이든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운동이 단 한 번도 자신의 '장기 전략'에 대해 토론하고, 수립하고, 실천해 본 적이 없는 '전략 부재'의 한국 노동 운동의 역사.

그러니까 '집단적 행동'으로서의 운동은 없고, 분파 운동과 고립된 싸움과 패배로 점철되어 생긴 아픈 상처가 남은 몸. 노동 계급의 보편적 의제인 '노동 시간 단축'과 '교대제' 문제조차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사가 비공인의 패턴 교섭(pattern bargaining)으로 해결해 버리고 마는, 비정규직 문제 역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이 과도한 대리전을 치르면서 총자본의 탄압이 집중되고 노동의 연대는 기업의 벽에 가로막히고 마는, 그래서 노동 시장의 안과 밖 양쪽 모두 현대자동차 사측이 주도하는 현대 공화국, 삼성 공화국, 자본주의 공화국의 극단적 노동 배제의 시대에 전망은 어디에 있으며, 희망의 근거가 어디 있느냐고 묻게 되지만 말이다.

운전을 할 때 시야를 어디에 두느냐가 운행 안전에 매우 중요하다. 너무 가깝게 시야를 두게 되면, 굴러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 보이고 위험해 보이기 마련이다. 콜의 저작을 읽으면서 우리 시대의 인식 지평을 좀 더 넓고 멀리 둔다면, 비록 한국 노동 운동이 마주한 현실이 척박해 보이고, 조급해지는 마음을 조금은 더 정교하고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흔히들 '장사 하루 이틀 하나?' 라고 말한다. 기나긴 자본주의 역사만큼이나 긴 영국의 노동 운동의 역사가 우리를 위로해 주는 방식은 아래의 영화 대사와 같이 특별하지는 않지만 도저한 낙관이었다.

"결국 다 괜찮아질 거라고. 그렇지 않다면 아직 때가 아닌 것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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