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처럼 퇴출 운운의 발언이 횡행하는 시대에 A사는 문을 닫아도 일찍 닫았어야 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사는 여전히 실낱 같은 희망과 가능성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다. 사실, A사는 잠재력이 있다. 몇 안되긴 하지만, 일단 직원들이 박봉을 참아 가며 함께 회사를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몇 안되는 직원들 뿐이 아니다. 이렇게 저렇게 A사와 관련을 맺고 있는 계약직 사원이나 임시직, 아르바이트 직원 등등 모두 다가 이 A사의 힘이다. 사람이 있는 한, 뭔가 해보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고, A사의 사장은 생각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TV드라마 제작에도 손을 댔고, 비교적 큰 규모의 다큐멘터리도 기획해 프리 프로덕션이 진행중이며, 해외 로케가 필요한 방송 프로그램에까지 先투자를 감행하며 일을 만들고 있다.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셈이다.
이 A사가 지난 해 말 문화콘텐츠진흥원이 기획한 '완성보증보험 시험사업'에 응모를 했다. 완성보증보험, 일명 컴프리션 본드(completion bond)라고 불리는 이것은, 앞으로 완성될 프로그램 혹은 드라마나 영화를 담보로 미리 제작비를 투자받는 것이다. 문화콘텐츠진흥원은 일군의 전문가들로 심사위원을 구성해 완성보증보험을 받을 자격이 있는 컨텐츠를 선정했다.
▲ 한국문화컨텐츠진흥원 홈페이지 |
A사에게는 새로운 기회였다. 회사 매출이 마이너스 구조인 상황에서 제1금융권이든, 제2금융권이든 그 어느 곳에서도 신규 사업자금을 융통할 수 없는 처지에 완성보증보험을 통해 자사 기획의 작품을 당당히 만들 수 있는 시드 머니를 확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볼썽 사나운 재무구조를 건전화 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고, 또 그렇게 되면 작은 회사나마 직원들이 새로운 꿈을 키워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A사가 이번 공모에서 선정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건 당연한 일이다. 각종 서류를 완벽하게 준비하고, 나중에 방송이 될 방송사로부터 어렵게 나마(물론 기획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사전 구매 계약서를 확보했음은 물론, 심사 현장에 나가서는 공들여 프리젠테이션을 하기도 했다. 그 노력이 가상했었던지 문화콘텐츠진흥원은 A사를 완성보증보험 시범사업의 대상자로 선정했다.
A사는 이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다. 그 완증보증보험 증서를 가지고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기술보증기금에 갔을 때 A사가 들었던 얘기는, 추후 만들 작품을 담보로 선 제작비를 융통하는 것은 당신들 생각일 뿐이고 자신들은 법대로, 원칙대로 부실기업에게는 자금을 대여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제도의 취지를 설명하고, 죽어가는 중소 제작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해도 소귀에 경읽기였다. 한마디로 돈없는 주제에 돈을 꾸러 오다니 당신 미친 것 아니냐는 얘기만 할 뿐이었다. 지난 해 연말부터 지금까지 약 3개월 동안 A사는 백방으로 어렵게 따 낸 완성보증보험을 다시 살려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의 방법은 찾을 길이 없어 보인다. 그 판국에 문화콘텐츠진흥원은 기구 해체 과정을 밟고 있다. 방송영상산업진흥원 등과 통폐합을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 제도에 대한 책임 라인도 사실상 사라진 상태가 됐다.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해 한국은행을 통해 수십조원을 푼다고 한다. 영상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수백억짜리 펀드를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얘기일 뿐이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피부로 느낄 수 없는 한 경제 살리기의 실용성은 제로 수준일 뿐이다. 영화 <작전>의 조폭 두목 황종구의 대사가 떠오른다. 이놈의 사회는 되는 놈만 된다. 안되는 놈은 죽어도 안된다. 정말 그렇다. 아, 세상살기가 싫어진다.
(*이 글은 영화주간지 무비위크 363호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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