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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한국 보수파는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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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세균 "한국 보수파는 강합니다"

[기고] 최장집·심상정의 <정치에너지> 서평에 대한 응답

최장집교수 "정세균 당신과 민주당을 '왜' 지지해야 하는가?"(프레시안 9.21)와 심상정 의원 "민생문제 외면했던 민주당, 왜 반성은 없습니까?"(프레시안 10.27)에 답하여

백아가 종자기를 만난 기분

우선 두 분의 서평에 대해 진심으로 고맙단 말부터 해야겠다. 단지 서평을 해주었다는 사실이나, 내 책에 대해 (일부에 대해서지만)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을 제대로 이해해 주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통하는 친우관계'를 뜻하는 '지음'(知音)은 거문고 명인 백아(伯牙)와 그의 연주를 알아봐준 종자기(鍾子期)에 대한 중국고사에서 유래한다. 이렇듯 사람에겐 자신이 뜻한 바를 제대로 이해받는 기쁨 만한 게 없을 것이다. 두 분이 내 책을 진지하게 읽어주었다는 사실이 고맙다. 그들이 책장을 넘기며 상념에 잠겼을 장면을 떠올리면 마음 한 켠으로 부끄러우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감출 길 없다.

그들이 좋게 보아준 부분만이 아니라 비판적 지적에 대해서도 공감가는 대목이 많았고, 더 고민해야할 거리를 갖게 되었다. 이 또한 감사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백아와 종자기와 같은 개인적 교분이 아니라 정치적·공적 담론의 장에서 만났기에 그들의 논평에 대해 나의 응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진보파에 대한 존경과 지적

▲ 정세균 대표. ⓒ프레시안
금세 쓸 줄 알았던 책이 10개월이 넘는 시간을 끄는 동안, 정치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난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스스로 고민의 깊이와 지식의 넓이에서 한계를 절감한 시간이었다. 산고 끝에 내놓은 만큼 지지든 반대든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은 욕망이 컸지만, 출간과 함께 언론지상에 오르내린 내용은 내 뜻과 너무도 어긋나 있었다. 진보성향의 언론에서는 진보파를 도매금으로 비난했다는 식으로 보도했고, 보수언론은 거꾸로 "좌파 비난"이 내 책의 요지인 양 소개했다 (참고로 책 전체를 통해 '좌파'라는 표현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진지한 토론을 기대한 나의 바람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진보와 보수가 마치 거울을 마주 놓은 듯 대치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것도 아주 좁은 거울로 좁게 서로만 비추는 거울 같았다.

내 책에는 실제로 진보파에 대한 언급이 몇 군데 있다. 책의 중심적인 내용도 아니려니와 260쪽 분량의 책에 불과 몇 단락에 불과하지만 있기는 있다. 특정 세력을 겨냥한 것은 아니고, 권력 밖에 있었든, 권력 안에 있었든 진보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태도를 문제 삼고 싶었다. 초고를 읽고 논평해준 사람 중에는 이 부분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기도 했다. 틀린 말은 없으나, 괜한 분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이유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조언에 따랐을 성싶다.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자문하게 되었다. 나는 매우 절박한 심정에서 집필을 시작했고, 진보파에 대한 문제제기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 원안을 유지하기로 했다. 내가 누리는 자유와 인권이 진보파의 희생과 헌신에 빚지고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고, 그에 대한 존경심은 아무리 표현해도 모자람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더 유능하고 더 신뢰받아서 대안이 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해야 한다. 진보파 내부에 그러한 자성이 많이 일어난다면 굳이 말을 보탤 이유가 없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감히 말해 보기로 했다.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부분만을 제 입맛대로 부각시켰다. 얼마 뒤 접한 최 교수와 심 의원의 논평은 오히려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주었다. 언론의 보도와 커다란 대조를 보였다. 적잖이 실망해 있던 내겐 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웠다.

최장집의 격려와 비판

최장집 교수는 내 책에 대해 호감을 갖고 논평해 주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내 책이 거둔 성과보다도 출판사의 기획에 대해 지지해 준 것으로 이해했다. 내 책은 다만 <후마니타스>의 "정치가에게 묻는다" 시리즈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을 넘긴 정도가 아닌가 자평하며 앞으로도 더 많은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평을 보니 평소 최장집 교수가 사회적 발언을 통해 견지해온 관점과 철학이 잘 드러나 있었다. 그는 우리 정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되 그것이 야유나 조소에 그치지 않고 규범적으로 옳을 뿐 아니라 실천 가능한 방법을 늘 주문해 왔다. 그가 그간 정부정책에 대해 언급해온 내용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정치적 담대함과 정책적 숙련이 있다면 실현가능한 방안을 요구하는 데에는 완전히 동의할 수 있었다. 그런 비판은 퍽 유익하다고 생각해 왔다. 반면 비판을 위한 비판, 평행선을 달리기로 작심하고서 모든 맥락을 무시하고 의도와 정체성을 줄기차게 문제삼는 비판은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두 분의 비판이 그런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는 사실 또한 내게는 반갑게 느껴졌다.

최 교수의 기고문에서 비판적 내용은 분량 상 적지만 핵심적 논지를 구성하고 있다. 그의 비판을 접하면서 나는 마치 급소를 찔린 듯 아프게 느꼈다. 펜을 놓은 뒤 종이에 활자로 인쇄되고 표지를 입으며 책이 되어가는 과정 내내 스스로 석연치 않았던 부분을 정확히 지목하고 있어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은연 중에 숨기고 싶었던 관점의 취약성과 비전의 모호함을 최장집교수는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최장집 교수는 나의 현대사 해석에 대해 실망감을 표시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반복되는 현대사의 아전인수식 뒤틀기는 민주적 규범을 무시하는 이 정부의 행태와 맞물려 내게는 늘 고민거리였다. 교과서를 바꾸고, 학교 현장에 시청각 교재를 배포하여 '4.19 데모'와 '청계천 역사(役事)'를 익히게 했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역사적 정당성을 독점하려는 보수파의 시도에 대해 책의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비판했다. 이 정부에게 역사관을 제공한 뉴라이트 이론가들은 군부세력이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억압했기에 산업화가 가능했고, 그 덕분에 민주주의가 가능한 조건이 형성되었다는 논리를 말해 왔다. 그들에겐 독재자들이 스스로 멸망할 길을 자초하면서 죽고 나면 "무덤에 침이 뱉어질" 것조차 감수하면서 우리사회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런 논리는 도무지 논박할 가치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해괴하고 상식에 어긋난다. 나는 책에서 매우 상식적인 수준에서 비판했고, 상식적이기에 이념과 입장을 초월해서 지지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 <정치 에너지>(정세균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그럼에도 최장집교수의 지적처럼 상투적 담론에 머물고 현대사에 대한 통일적인 비전을 내놓는 데까지 나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차원을 달리하는 식견과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 식민지배와 근대화, 한국전쟁과 분단, 그리고 개발독재와 민주화 이행을 현재의 관점에서 어떻게 통일적으로 인식할 것인지 말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나 스스로도 이념적 정체성에 대해 똑 부러지게 말하기 힘든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 역사와 공동체에 대한 통일적인 인식이 없이는 미래의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는 것도 요원할 것이다. 더 노력하고 더 공부하겠다.

책을 통해 반드시 대면하려 했던 것은 과거를 미화하기 급급한 보수 엘리트들 뿐 아니라 여전히 박정희를 훌륭한 지도자로 기억하는 보통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면을 상기시키고, 그의 악행을 밝히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가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한 사실 확인과 처벌 및 보상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최근 연구에는 개발독재의 산업화 성과가 과대포장되었다는 분석결과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으로 사태가 크게 달라질 성싶지 않다. 민주파가 경제대안을 내놓는 길이 가장 분명하고 가장 바르고 가장 빠른 길이다. 보통사람에게 다른 경제를 보여주고 다른 방식의 시장경제에서 살도록 하는 게 가장 확실한 길이다.

경제대안이 중요하다

문제는 민주파가 집권하고도 보다 인간적이며 사회통합적인 경제활동이 가능한 토대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자랑할 만한 성취이고 여전히 한국 경제는 외형상 잘 굴러가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고단하고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으며 비인간적인 면이 많다. 자조적으로 '천민 자본주의'라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한가한 소리 말라'는 이야기는 더욱 자주 들을 수 있다. 멀쩡한 직장 다니며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다가도 큰 맘 먹고 이민을 결정하는 중산층 가정을 자주 접한다. 외국가서 구멍가게를 열고서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정치인으로서 자괴감과 책임감을 느낀다. 우리에게 경제란, 성장이란, 인간 삶과 조화로운 게 아니라 인간성을 상하더라도 반드시 이뤄야하는 목표로 자리 잡았다. 좋건 싫건 우리가 살아야 하고, 살아내야 하는 경제가 이것이라면, 더불어 그러한 구조가 박정희 시대에 주조된 것이라면 사람들이 그 경계를 넘어서 상상하기란 힘들 것이다.

지난 10년의 집권기간 동안 우리는 지표상으로는 별다른 손색이 없는 경제실적을 거두었다. 보수진영이 '잃어버린 10년'이라며 호도하지만, 국민소득이 두 배 넘게 늘어나서 2만 달러에 육박하게 되었고, 수출은 1300억 달러에서 3700억 달러까지 늘어났다. 같은 기간 동안 주식시장 시가총액은 7배 가까이 늘었다. 급변하는 대내외적 여건에서 요청되는 변화를 이루는 데에도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재벌총수의 전횡을 차단해서 투명한 경영환경을 만들었으며,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다. 정경유착의 검은 고리도 끊었다. 노동집약적 수준을 벗어나기 위해 인적자원의 질을 높여 고부가가치 산업구조로 이행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선진국 수준으로 연구개발비를 늘렸고, 특허건수나 SCI(과학인용색인) 논문 수도 획기적으로 늘었다. 이제 더 이상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단계에 진입했다.

반면 성장지상주의가 낳은 폐해를 시정하고 보다 사회통합적인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제에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우리는 성장에 소홀함이 없되 그 과실이 중산층과 서민의 민생에 이바지하고, 골고루 잘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큰 진전이 없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해서 복지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고, 20%에도 미치지 못하던 복지예산이 지난 10년간 28%까지 늘어났다. 이것은 대단한 진척이라 할 만 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민주당 집권기다운 경제구조를 만들었다고 자평하기는 어렵다. 양극화의 골이 깊어졌고, 기회가 줄어들었다. 공식 실업률로 잡히지 않는 취업포기자가 속출하고, 입시에서 갓 해방된 대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취업전쟁을 벌이고 있다. 일자리도 없을뿐더러 있는 일자리의 질도 비정규, 파견근로 등으로 질이 낮아졌다. 가난은 더 이상 성취동기가 아니라 대를 물려야할 숙명처럼 받아들여진다. 근로의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쉽게 돈을 불릴 방도가 권장된다. 아이를 낳지 않고 쉽게 이혼하며 쉽게 생을 포기하는 사회가 되었다. 선진국에서는 후기 산업사회의 문화적 징후라고 하지만,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는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경제적인 이유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민심과 다투려 해서는 안 된다

지난 대선과 총선은 10년의 민주정부에 몸담았던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쓰나미와 같은 충격을 몰고 왔다. 책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대만 민진당의 사례가 우리에겐 뼈아프게 다가왔다. 연임집권 이후 선거에서 크게 패배한 대만 민진당은 입지가 크게 좁아졌고, 천수이벤 집권기 이뤄진 많은 변화들이 되돌려지고 있다. 반면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연임을 하고 곧 임기를 마치게 되지만 여전히 80%대의 지지를 받고 있다. 도무지 집권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던 룰라였지만, 이제는 후대 정치인들이 그의 후광에서 벗어나는 게 만만치 않은 과제가 되었다. 우리는 10년을 집권하고도 이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과거로 퇴행하는 사태를 맞고 말았다. 현 정부가 민주적 규범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국정운영 능력에서도 낙제점을 받고 있지만, 제1야당인 민주당이 지지를 회복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회복하여 대안으로 자리매김하는 단계에 이르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보수파의 퇴행성을 지적하고 저지하는 동시에, 스스로 자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악의적인 프레이밍은 선거 캠페인에 그치지 않고, 현 정부의 국정기조를 이뤄 왔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변화를 이루기보다는 그동안 이뤄놓은 진척을 되돌리는 데 골몰했고, 거기서 정당성을 찾으려는 옹졸한 행태를 반복했다. 두 대통령의 서거와 전국민적 추모열기가 이어져 더 이상 그런 전략은 먹히지 않게 되었고, 그러자 다급하게 꺼낸 카드가 "친서민 중도실용" 행보라고 나는 평가한다. 그만큼 알맹이가 없고, 눈속임으로 가득하다. 반면 나를 포함해서 전 대통령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을 사랑한 사람들은 지난 10년을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은 욕망이 강하다. 다만 그것이 지나쳐서 그 시대의 통치는 모두 옳았고, 완벽히 잘했다는 다른 극단으로 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제시 리버모어'라는 전설적 주식투자가는 "투자자가 시장과 싸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금언을 남겼다. 지난 대선, 총선에 표출된 민심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과거에 만족해서는 미래가 없다. 더더구나 보수우위의 한국 현실에서 진보개혁진영에게 그런 호사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냉정한 자기평가와 반성, 계승과 쇄신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정당한 평가


최장집 교수와 심상정 의원은 모두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난 10년에 대한 나의 평가를 묻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IMF 위기 이후 시장 근본주의에 입각한 경제 정책의 방향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놓으라고 주문한다. 심상정 의원은 더 나아가 내가 제시한 민생연합의 구체적인 내용들과 관련하여 과거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한미FTA, 비정규직, 대형마트의 독과점 문제가 모두 지난 10년간 일어난 일이고, 이에 대한 반성없이 대안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노동과 복지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까지 언급했다.

대안은 성찰에서, 성찰은 평가에서 비롯된다.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평가는 아직 진행중이다. 이명박 정부와 비교해 지난 10년의 성과가 두드러져 보일 수 있고, 진보진영의 기준에서는 미흡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주정부 10년간 이뤄진 변화들은 비록 완전한 성공이 아닐지라도 많은 장애물을 극복한 결과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한미FTA, 비정규직, 대형마트의 독과점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한미FTA는 꼭 필요한 선택이다. WTO를 통한 다자협상이 제자리 걸음을 하는 동안 세계 각국은 앞다퉈 양자간 FTA를 추진하고 있다. 이 대열에서 뒤처지는 것은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로서는 치명적이다. 지난해 세계 12위 수출국인 한국 경제의 무역의존도는 무려 92.3%에 달한다. 수출은 그동한 한국을 먹여살려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FTA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는 곤란하다. 내용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산고 끝에 도출된 한미FTA 협상결과는 비교적 균형을 이루고 있고, 이대로만 실행된다면 우리에게 많은 이득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내용에서 후퇴하는 재협상은 안 된다는 점이다.

비정규직법은 옳고 그름의 이분법보다는 균형적 시각에서 봐야한다. 노동자와 사용자 어느 일방만 고려한 법제정은 가능하지 않다.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기업들에게도 지속가능한 고용구조를 보장해야 한다. "비정규직법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반문하고 싶다. 최소화하고자 했으나 피해가 발생했다. 그렇지만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던 비정규직 근로자들에게 최소한의 우산이 되고 있고,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순기능이 압도적으로 나타났다. 이명박 정부는 "100만명 해고대란설"을 유포하며 이 법을 무위로 돌리려 했고, 우리는 싸워서 지켜냈다.

"할 만큼 했다"는 자족적인 평가를 내릴 생각은 전혀 없다. 우리는 철저히 반성하고 과감히 달라져야 한다. 다만 모든 것을 부정하고 백지상태에서 시작할 수는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심상정 의원 말대로 민주정부 10년간 '시민적 자유권'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것이 곧 "'노동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시민권'"으로 발전하길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때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을 졸속으로 해서 대형마트의 독과점을 규제하기 어려운 조건에 처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재래시장 상인들의 삶을 도외시한 적은 없다.

두 분의 논평에서 사회에 대한 체계적인 비전으로 나가지 못하고 '온정주의'적 접근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겸허히 수용하겠다. 새겨듣겠다. 돌이켜보면 두 번의 집권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여건에서 이뤄진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 기회가 소중한 만큼 우리는 더 유능했어야 하고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고삐풀린 자본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시장만능주의"가 아니라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중산층과 서민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고, 더 안정된 삶을 향유할 조건을 마련하려 했다. 그러나 능력과 비전에서 커다란 한계가 있었다. 외환위기의 절대적 위기에서 벗어나기에도 벅찼고, 정부를 운용하고 관료들을 부릴 방법에 어두웠다. 정치적·사회적 비토세력을 효율적으로 응대할 능력이 없었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에 대한 안정된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에도 서툴렀다.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말에야 '비전 2030'과 같은 프로젝트를 만들 때 그것이 시기적으로 늦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필요한 데 없다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우리의 수준이었고 현실이었지 의지와 정체성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 심상정 의원은 이견을 말했다. 지난 10년의 집권기간동안 심 의원을 실망시킨 사안들은 능력이나 한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세계관과 정체성의 문제라고 보았다. 내가 제안한 '민생연합'은 듣기엔 좋으나 가망이 없다고 보았다. 독재 하에서 진보세력과 민주개혁세력은 민주화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연대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10년간 드러난 정체성은 '온정주의'에 기초한 '잔여복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명박과 다르지 않다고 평가한다. 그런 세력과 진보진영이 함께할 공간은 없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잘만 되면 영국의 품격있는 보수 정도로 자리잡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심 의원이 몸담은 세력과 건전한 경쟁구도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하고 있다.
▲ ⓒ프레시안

연대와 통합을 위하여

나도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진보세력과 경쟁하고 서로 견제하는 정치를 하고 싶다. 심 의원이 논평글에서 자신의 당파가 '문제제기 정당', '실험 정당'에 머물렀다고 반성하지만, 그러한 문제제기가 우리에겐 더 민주적이고 서민적 가치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촉매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집권한 동안 몰염치하고 억지로 가득한 반대당을 상대해야 했다. 그들이 아니라 이상적이되 지성적인 진보정치세력과 경쟁했다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보수파는 상식과 이성에 반해서 밀어붙여도 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만치 강하다. 어쩌면 그들로부터 권력을 가져온 것 자체가 요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세력에 맞서서 이겨야 하고, 새로 집권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일방적 독주를 막으려면 유권자로 하여금 선거에서 심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가 대안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진보정당들에게 민주당과 한나라당간의 차이는 실개천처럼 좁아 보이고, 자신과 민주당 사이의 거리는 하해처럼 넓어 보일지도 모른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그게 맞을 지도 모른다. 내가 경험하는 정치적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현실에서 민주주의와 개혁, 진보를 추구하는 세력에게 배당된 공간은 매우 좁다. 실현가능한 진보를 위해서 보다 냉정하고 현실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 현실이 중도진보블럭에게 다당제 구도를 허용하는가? 우리 현실이 분열하고도 집권해서 사회를 변화시킬 기회를 제공하는가?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해 모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내가 손을 내민 이유는 당장의 힘의 균형에서도 비롯하지만, 길게 보아 민주주의와 진보의 가치가 합치는 것이 우리에게 가망있는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민주당에 대한 옳은 비판은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그것으로 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진 말아주길 바란다. 우리는 힘을 모아야 하고, 더 강해져야 한다. 정세적 유불리에 따른 일시적인 연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MB'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안을 중심으로 뭉쳐야 하고, '민생'이 중심적 가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10년의 집권을 통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더 많은 인적 자원을 구축했으며, 더 높은 비전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더 진보적이고 더 민주적이며 더 서민적인" 정책을 추구할 것이다. 그래야 집권할 수 있으며 그래야 민주주의와 진보의 가치가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어 지금과 같은 퇴행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과감하게 변할 것이다. 그간 지적받은 문제들에 대해 전향적으로 수용할 것이다. 진보세력도 우리와 거리를 두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구체적 결실을 볼 수 있는 방도를 고민해 주길 바란다. 문제제기와 실지로 실행하는 것 사이의 엄연한 간극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옳을 뿐 아니라 실현가능한 방안을 모색해 주길 바란다. 서로 간의 차이가 분열과 갈등의 소지가 되기보다는 서로를 자극하는 에너지로 승화되길 바란다.

두 분의 논평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글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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