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3일, 대법원은 정리해고가 무효라라며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회사는 5월 31일자로 또다시 2차 해고를 통보했다. 법도 소용없는 셈이다. 7월 23일자로 강제해고 2000일을 맞은 콜트‧콜텍 노동자들. 이런 그들을 돕고자 국내 문화예술가들은 7월 15일부터 인천 부평구의 비어 있는 콜트 공장을 점거해 '인천시 부평구 갈산동 421-1 콜트콜텍전시회'를 열고 있다. 30일로 전시회는 마무리됐다. 일명 '스쾃'이다.
입주작가는 성효숙, 전진경, 정윤희, 상덕, 황승미, 전시작가는 19명과 그룹 '빨간뻔데기', '약손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시회 이후에도 지속해서 이곳에서 작업을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편집자>
어제, 공장건물 주인의 대리인이 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남의 건물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이래도 되는 겁니까! 내일 아침까지 짐 빼요! 짐 빼라구요!"
난 정면을 응시했다. 뭐라고 말할까… 설정을 잘해야 돼.
전진경 : 아, 쫌~, 나가라고 하지 좀 마세요, 아저씨. 우리 이상한 사람들 아니에요, 예술가에요, 건물을 부수지도 않고, 해치지 않는다 구요. 그리고 여기 농성하시는 분들 농성이 끝나서 공사가 시작되면 저희도 나가요. 그러니까 피해 안 드려요.
대리인 : 아, 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이게 상식적입니까!
전진경 : 예술활동이 뭐 꼭 상식적일 필요 있나요, 그리고 아저씨, 아저씨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프랑스 같은데 서는 이렇게 무단으로 점거하는 거를 스쾃이라고 하거든요, 스쾃. 예술활동의 일종이에요.
대리인 : 난 그런 거 모르고, 여기 건물관리 차원에서 건물입구들을 차단 시킬 겁니다. 그러니까 내일 짐 빼주세요.
전진경 : 왜 그러세요 아저씨. 이런 예술활동을 지원 좀 해주세요, 예? 어차피 건물을 당장 쓸 것도 아니고 이렇게 방치하느니 예술가들에게 좀 마음 놓고 사용하게 하면 좋잖아요, 이런 게 예술지원이잖아요, 네?
이미 대리인 아저씨 기가 차 있다
대리인 : 빈 건물이라고 부랑자들이 들어와서 사고라도 치면 어쩔 겁니까, 건물이 크고 어두워서 사람이 숨어 있어도 몰라요.
전진경 : 그러니까요~ 이렇게 우리들이 와 있으면 건물 관리도 되는 거잖아요, 제가 여기 며칠 있어보니 낯선 사람은 구분할 수 있겠어요, 그런 거는 제가 관리할께요,
피식 웃으며
대리인 :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나중에 건물 새로 지으면 그때 작업실 공간 줄께요. 그러니까….
전진경 : 전 지금이 딱 좋아요.
엄청나게 예술을 팔았습니다. 약간의 각색과 생략이 있겠으나 대략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대리인 아저씨는 돌아가면서도 곧 건물을 폐쇄하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경비아저씨가 귀띔 해주길 내일 내가 도착하면 곧 건물주에게 보고하라고 했다네요. 아, 정말 스쾃 이렇게 피곤한 건가요?
▲ 전진경 작가의 점거 작업실 청소 직후. (before) ⓒ전진경 |
조촐한 그들의 농성에 보낸 예술적 지지
이러면서 콜트공장 예술 점거는 시작되었다. 작년, 5년째 공장마당에서 해고무효를 요구하는 농성장을 찾아 파견미술 작가들과 잠시 하루 와서 작업을 했던 게 인연이었다. 어쩐지 공장 마당이 좋았고 마당 뒤쪽 버드나무가 울창한 것이 좋았다.
공장을 지키는 노동자들은 매우 낯설었지만 조촐한 그들의 농성에 예술적인 지지를 보내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온 며칠 후에도 왕왕 머리속엔 어떤 구상을 하고 있었다. 겨울이 되었고 몇몇 친한 작가들에게 벽화를 그리러 가자고 제안을 했다. 다시 공장을 찾아갔다. 여전히 마당엔 농성을 하는 아저씨들이 살고 있었다. 텅 비어버린 공장 속을 들어갔다. 그리곤 그 순간, 점거욕망이 꿈틀하는 것을 느꼈다. 곧 나는 이곳에 짐을 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허락이 필요했다.
농성중인 콜트·콜텍 노동자 아저씨들에게 이곳에 짐 좀 풀어도 되겠냐고 내 뜻을 전했다. 이상하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공장을 찾아갔다. 그날 동그랗게 웃는 얼굴의 한 아저씨가 공장 곳곳을 소개하면서 "어유, 우리야 좋죠~" 라고 환대해줬다. 아싸! 이틀 뒤 짐을 싸들고 제일 볕 좋은 방을 점거했다.
그러나 점거 3일 만에 공장주로 부터 들통 났고 퇴거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런… 성실한 경비아저씨가 매일매일 공장현황을 건물주에게 보고하고 계셨던 것이다. 작업실 벽에 벽 글씨를 썼다.
"나는 그림 그리는 예술가 입니다. 나는요 '공생'을 하기 위해 이곳을 왔어요. 누굴 못살게 굴고 괴롭히려는 건 아닙니다. 세상과 소통이 필요한 나는 멋진 작업실을 갖고 싶었고, 1900일이 넘게 공장마당에서 농성중인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은 계속 버틸 힘과 밖으로 부터의 지지가 필요하답니다. 몇 년째 텅 비어있는 공장은 먼지와 곰팡이를 닦아줄 사람이 필요하고, 자본가는 그들의 미친 탐욕에 제동을 걸어줄 브레이크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린 서로가 필요합니다. 대단하잖아요! 멋지잖아요!"
작업실 입주 후 매일 매일이 아주 스펙터클했다. 보름쯤 되던 날 씩씩거리고 찾아온 공장 건물주를 만난 것이다. 이것은 그날의 일기.
5월 10일
어제 공장 주인을 처음으로 대면했다. 엄청난 위협을 받았다. 처음 작업실을 들어서면서 부터 무시무시했다. 입을 앙 다물고 협박 같은 말을 할 땐 '아, 지금 저 사람이 나를 패고 싶은걸 엄청 참고 말하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순간 내 맥박이 빨라졌다. 살살 웃으며 예술을 팔아봤는데, 안 팔렸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예술 나부랭이가 그러지 않아도 열이 뻗치는데 진상을 떠는' 취급을 받았다. 또는, '이 귀찮은 것을 빨리 치워버려야 하는' 취급도 받았다. 그래도 나름의 노력으로 "이번 주말에 짐 빼"라는 말을 "그럼, 20일까지 짐 빼"라는 걸로 바꿨다. 그리고 다시 "다시 만나서 말하자"로 마무리 되었다. 헐. 다시 또 보면 또 내 맥박을 얼마나 빨라 질까나.
'스쾃'책의 저자이자 경험자인 김강 작가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만약에 폭력적으로 내 작업실을 부술 경우 내가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느냐"고 묻자 "한국에선 아직 보호받지 못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흑. 하여튼, 후져서. 김강 작가가 이런 저런 도움이 되는 말을 했다. 이것이 바로 경험자의 능력인가!
아까, 내 자동차 안으로 파리 한마리가 들어왔는데 '나가'란 말을 못하겠더라. '나가'란 말이 아주 신물 나거든. 어제의 일이 오늘까지도 빈정 상해 있어서 속안에 화가 부글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화판을 치우고 벽에다 큰 그림을 그렸는데, 웬걸 그림이 잘 나왔다.
▲ 그림 '여기 짐 좀 풀께요'. ⓒ전진경 |
왜 이런 생고생을 하며 점거를 했을까
이쯤해서 왜 이런 생고생을 하며 점거를 시작했는지를 말한다. 꽤 중요한 내 생각이다. 나는 현장예술가로 불리기도 파견미술가로 불리기도 한다. 현장으로 스스로 파견하는 나는 현장예술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갖고 있다. 어느 때인가 부터 예술작품 그 자체보다 예술가의 에너지에 더 중요성을 두기 시작했다. 현장이라는 공간에 이질적인 다른 에너지가 들어오는 것. 그 이질적인 다른 에너지가 들어옴으로 해서 생겨나는 현상들, 이것이 현장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현장예술은 좋은 이웃되기인 셈이다.
조금은 이상하고 조금은 신비로우며 조금은 재밌기도 한 어색한 이웃. 그리고 그 이웃이 벌이는 것을 구경하는 재미. 함께하는 재미. 즐기는 재미. 뭐 이런 거다. 결국 이런 것이 사는 재미가 됐으면 하는 거고. 왜? 투쟁이란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거니까.
건물주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내 작업실은 점차 콜트·콜텍 아저씨들의 사랑방이 되어갔으며 새벽까지 사는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방종운 지회장 아저씨는 밖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 불 켜진 작업실을 보면 기분이 좋다고 했고 "스캇(점거작가를 부르는 말)때문에 우리 재밌게 산다"고 고백도 하셨다. 빨강모자 동호 아저씨는 "난 이 공간이 항상 신비로워" 하며 알게 모르게 휴지통을 비워주었고 자섭 아저씨는 "아우 눈이 컴컴하네" 하며 계속 조명등을 달아주셨다. 콜텍 이인근 아저씨와 재춘 아저씨는 "왜 오늘도 그림이 가터! 열심히 안 그려!" 라며 진도를 체크하셨고 딸 바보 경봉아저씨는 루미큐브라는 무시무시한 보드게임을 전파하셨다. 그러고 보니 시크한 남자 장석천 씨는 딱 한번 들어 왔었구만. 부끄럼 타기는. 어쨌든 이곳 아저씨들은 연대온 많은 이들에게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자랑처럼 구경시키셨고 난 "어서욥쇼~"를 연발했다.
페이스북에 콜트공장을 소개하고 난 후 스쾃티스트 김강·김윤환 부부가 놀러왔다. "와우! 이 멋진 공장에서 전시회를 열자!" 옳거니.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데 사건한번 치자. 친구 작가들이 놀러왔다. "저 여기서 작업 좀 할게요". 빈 공간 많아요. 찜하세요. 함께 점거중인 성효숙, 정윤희 작가랑 종종 회의 겸 수다도 나눴다. 주로 협박을 어떻게 잘 피할 것이냐 하는 회의.
전시회 날짜를 정했다. 2000 일 농성을 앞두고 날을 잡았다. 전시 콘셉트도 잡았다. 김강 작가의 제안 따라 '각자 알아서 하는 개인전의 집합!' 전시회를 통해 콜트·콜텍의 투쟁을 조명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조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웬 자신감인지 아저씨들에겐 굉장한 사건이 될 것처럼 말했던 것 같다. 아저씨들의 작업진행 체크가 점점 심해졌다.
김강 작가의 소개로 변호사를 만나봤다. 질문은 두 가지였다.
전진경 : 무단점거라도 예술작품은 보호되나요?
변호사 :네. 파손되면 고소할 수 있어요.
전진경 : 무단점거라도 내 몸은 보호받나요?
변호사 : 네. 폭행은 고소할 수 있어요.
그럼 됬다. 오케이.다시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다음과 같다.
< 부평구 갈산동 421-1번지>
7월 15일, 빈 공장 점거 전시를 제안합니다!
콜트기타공장입니다.
2008년 공장은 문을 닫았습니다. 공장주는 더 높은 이익창출을 위해 해외로 공장을 옮겼습니다. 콜트공장은 우리나라 재계순위 120 위의 회사입니다. 20~ 30년 공장에 헌신했던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공장 마당에 천막을 치고 햇수로 5년째 공장정상화를 외치며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기타공장은 오랫동안 비어있었습니다.
신비하게도 텅 비어 있는 기타공장은 예술가들에게 공장점거를 욕망하게 했습니다. 현재 4명의 작가가 공장안에 작업실을 차렸습니다. 그들의 옆 농성장 해고 노동자들의 이웃이 되어 그림을 그리고 근육 힘을 쓰고, 사진을 찍습니다.
현재 5명의 작가가 7월 15일 콜트공장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큰방, 작은방, 어두운 방, 밝은 방들이 골고루 찜 당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여 오세요.
6월 30일 까지 회신 기다리겠습니다.
점점 찾아오는 작가들
천천히, 조금씩 회신이 왔다. "와, 잘 하면 10 명의 작가가 전시를 열겠다". 10명의 작가가 참여의사를 보낸 후, 우와. 점점 찾아오는 작가가 많아졌다. 소문의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도 했다. 공간은 먼저 찜 한 사람이 임자였다. 한번은 6명의 작가가 동시에 찾아온 적이 있는데 3번째 작가는 몇 분 차이로 원하는 공간을 놓친 적도 있다. 그리고 어떤 작가는 공장탐사 중간에 장소를 정해지 길래 마지막 공간까지 보신 후에 결정 하세요 했더니 정말 마지막 공간인 공장 지붕에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전 여기 지붕으로 정할께요 라고 했다. (그 작가의 지붕 전시는 멋졌다!) 어느새 22 개의 전시로 확장되었다.
나도 이번 전시가 아껴왔던 내 첫 번째 개인전이기 때문에 두 배로 바빠졌다. 이 첫 개인전의 의미가 남달랐다. 하얀 큐브에서 하는 전시가 아닌 내 이웃들의 공간에서, 그들의 인생이 들어있는 빈 공장에서 첫 개인전을 열수 있다는 것은 영광스럽기 까지 한 것이다. 심지어는 드문드문 내 능력부족에 허덕일 때엔 호인들이 나타나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부평구 갈산동 421-1' 전시는 열렸다. 그리고 한쪽엔 나의 전시 '멋진걸 보여 줄께'도 함께했다. 자발적인 참여로 구성된 예술가들은 만일에 벌어질 건물주의 방해를 대비해 경비아저씨의 퇴근이후인 금요일 밤부터 전시 설치를 시작했고 일요일엔 짜안! 하고 기습 오픈을 했다.
전시 오프닝에선 콜밴(콜트·콜텍 기타 노동자 밴드)의 공연이 여느 때처럼 사람들을 신나게 했고 빨간모자 동호 아저씨는 수많은 사람들을 안내하며 공장투어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장을 샅샅이 보았으며 연장전시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많은 이들이 소문에 소문을 듣고 공장을 찾아왔다. 많은 언론들이 전시를 소개했고 유명 트위터들이 이 공장전시를 '성지순례'로 지정했다. 공장의 전시를 모두 보는데 2시간이 걸리는데도 도슨트(작품해설)를 마치고 나면 모두들 이렇게 재밌는 전시는 처음이라며 지친기색 없이 좋은 표정을 지었다. 평론가들은 지속적으로 공장을 찾아와 전시를 유심히 보며 장고의 글을 쓴다.
콜트·콜텍 2000일 주간에 맞추어 다양한 행사들이 벌어졌고 이 외진 작은 공장은 마치 축제를 벌이듯 분주했다.
▲ 전시 오프닝 퍼포먼스. ⓒ류우종 |
1994년 이후 가장 무더운 더위가 찾아왔고 어제 오늘 그 기세는 겨우 누그러지고 있다. 뜬금없이 웬 날씨얘긴가 싶겠지만 30도를 훨씬 웃도는 무더위 속에 여기 콜트공장도 기온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 건물주는 이 공장을 부술 준비를 마쳐놓고 있고 이곳 농성장을 지켜온 콜트·콜텍 아저씨들은 하루하루를 풍전등화 심정으로 맞이하고 있다. 이제 웃음도 예전 같지 않으며 이곳 새벽도 예전 같지 않다. 조만간에 닥쳐올 새벽침탈을 준비해야 한다.
전시회를 오간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이 공간에 들어선 당신들은 아마도 이후에 듣게 될 콜트·콜텍의 뉴스를 무심히 볼 수가 없겠지요. 잠깐의 인연도 무서운 것이니까요. 지금의 나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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