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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북한 잠수정 몰살 사건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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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북한 잠수정 몰살 사건의 진실!

[프레시안 books] 이해성의 <고래>

공연을 볼 때도 그랬지만, 이해성 희곡집 <고래>(연극과인간 펴냄)를 읽으면서 이 작가의 특장과 매력을 다시 확인한다.

임무를 완수하고 귀항하던 길에 꽁치잡이 배 그물에 걸린 북한 잠수정(<고래>), 최고의 환 딜러이지만 비만으로 건강이 악화되고 있음에도 식욕을 주체할 수 없는 신우(<살>), 장자연 사건에 연루된 기자와 치매를 앓는 그의 할머니의 엇갈리는 죽음(<빨간시>) 등 <고래>의 작품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적 사건들에서 출발한다.

그렇다고 사건의 환기 그 자체를 주목한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적 사건을 떠받치고 있는 겹겹의 현실을 극적 상황으로 포착하는 예리함, 그것이 이해성 희곡의 매력이다. 하여 공연을 볼 때도 그랬던 것처럼 희곡을 읽을 때도, 낚시꾼들이 손맛이라 일컫는 그 긴장감, 수면 아래 감추어져 있는 묵직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극한의 갈등과 심연의 고요, <고래>


표제작인 <고래>는 작가 이해성의 특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정예의 공작조가 남한에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하다가 꽁치잡이 배 그물에 걸린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작가의 상상이 아니고 실제 사건이다. 사건이 벌어진 1998년 6월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어망에 걸린 북한 잠수정을 발견하고 인양했는데 승무원으로 보이는 5인과 공작조 4인이 자살한 채 발견된다.

해군의 예인 작전이 열여덟 시간 동안이나 지연되고 처음 잠수정을 발견할 당시에는 생존이 확인된 이들까지 전원 주검이 되자 해군의 무능에 대한 비판이 쏟아진다. 그리고 투항하지 않으면서도 잠수정 내부를 파괴하지 않았던 점이 의문으로 제기된다. 여기까지가 신문 지상에 올랐던 사건의 전말이다.

떠들썩하게 이목을 끌었다가 잊혀진 이 사건에서 작가는 꽁치잡이 그물마저도 피할 수 없는 낡은 잠수정에 의지해 사선을 넘다 죽어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예기치 않은 사고의 당황스러움, 예인 작전이 지연되면서 오랜 시간동안 죽음을 눈앞에 두고 갇혀 있는 이들의 공포, 결국 끝까지 잠수정 내부를 파괴할 수 없었던 이들의 갈등.

"이건 개죽음"이라는 이들의 말처럼, 어처구니없는 사고에서 시작되어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사건은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의 페이소스를 더욱 강렬하게 한다. 그 비극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분단'이라는 현실이 가로 놓여 있다. 그러나 <고래>가 주목하는 '분단'은 군사적 대치 상태나 정치 체제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하나' 식의 울컥하는 감성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래>가 주목하는 분단과 대립은 너와 나, 여기, 우리 안에 있다. 연극을 시작하는 첫 장면에서 이미 그러한 시선은 확연하다. 임무를 완수하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길의 훈훈하고 왁자한 출발은 비극적 결말을 강조하기 위한 전조인 것만은 아니다. 임무를 마친 이 투철한 혁명 전사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물건만 가득 쌓여 있는 창고 같은 큰 건물에서 동료들의 귀향 선물을 마련해왔다.

기관장의 늦둥이에게 줄 가루젖,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무전장의 어머님을 위한 파스와 내의들이다. 혁명 전사답게 사냥한 멧돼지로 값도 치렀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소소한 물건들을 나누는 이 훈훈한 장면은 남쪽 물건에 환호하는 동료들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이어지고 격렬한 갈등으로 직진한다.

한쪽에는 "뼈다구만 앙상하게 남아 죽어가는" 공화국 아이들의 처참한 절망이, 다른 한쪽에는 "먹고, 쓰고, 즐기고, 남아돌아 버리는" 채워지지 않는 소비와 욕망이 있다. 어느 것이 삶의 길인가.

모두가 주검으로 발견된 사건, 죽음의 시간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시간들을 재구성하는 연극은 이 질문에서 출발하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전개된다. '선의적인 토론'으로 마무리되려던 이들의 갈등은, 예기치 않은 사고에 휘말리면서 목숨을 건 선택으로 이어진다. "교육받은 대로 인이 박힌 대로" 자폭을 선택했던 이들은 주검이 되어 누워있고 투항을 선택을 했던 이들 역시 동료들의 주검 옆에서 점점 희미해져가는 공기에 정신을 잃어간다. 결국 이들에게는 어떠한 선택도 삶의 길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막다른 극한의 상황은 깊은 바다 속 낡은 잠수정 조정실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무대는 극한의 대결로 치달아가는 조정실로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연극은 잠수함이 떠 있는 심연의 고요를 대비하면서 전개한다. 잠수함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심연의 고요는 이들에게 어떠한 선택도 삶의 길이 될 수 없었던 세상 그 자체일 것이다.

이처럼 희곡은 소리 이미지로 극적 공간을 확장하는데, 심연을 유영하는 고래의 울음소리는 이 연극의 비극적 질문과 연관하여 깊은 울림을 남긴다. 희미한 숨소리에 무대는 점점 어두워져가는 가운데 심연을 유영하는 고래의 울음소리는 이 죽음의 무대를 길게 휘감는다. 그 소리는 미처 찾지 못한 삶의 길인가, 영영 찾지 못할 삶의 길인가.

이것은 손쉬운 극적 비약일까, <살> <빨간시>

<고래>는 밀도 높은 극적 공간, 잘 짜인 사건의 전개 그리고 강렬한 시청각적 이미지로 사건의 이면을 파고든다. 정연한 전개를 통해 힘 있게 드라마를 밀고 간다. 한편, 지난해 발표한 <살>과 <빨간시>는 시공간을 한껏 확장하면서 전개된다.

<살>은 최고의 환 딜러이면서 주체할 수 없는 식욕으로 점점 생명을 잃어가는 신우를 통해 자본주의의 위기적 상황을 집약한다. 투자와 투기의 경계가 모호해져버린 외환 시장의 딜러들, 불안정한 금융 상황을 분석하는 인터넷 논객 등 <살>은 2008년 금융 위기를 쉽게 떠올리게 한다. 전 지구적인 위기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대담한 시선은 '신우'라는 구체적 인물의 동선과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오가면서 드라마의 공간을 한껏 확장한다.

그런가 하면 <빨간시>에서는 장자연 사건과 위안부 문제를 중첩시키기 위해 '저승'이라는 공간을 끌어들인다. 어쩔 수 없이 사장의 술자리에 함께 있었던 동주는 그 자리에 불려나왔던 한 여자 연예인의 자살과 고발에 함구한 채 모든 연락을 끊고 집에 틀어 박혀 있다. 그리고 동주의 곁에는 몇 년 째 치매를 앓으면서 알 수 없는 이야기만을 띄엄띄엄 내뱉는 할머니가 있다.

제 각각의 아픔과 혼란에 갇혀 있는 두 사람은 저승사자의 실수로 할머니 대신 동주가 죽음을 맞게 되면서, 서로를 마주보게 된다. 치매를 앓던 할머니는 정신을 차리고 식구들에게 동주가 다시 돌아올 것을 기다리라 하고 할머니를 대신해 저승에 간 동주는 할머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보지 못했던 과거를 보게 된다.

이러한 전개는 궁색하고 손쉬운 극적 비약일까. 물론 연극적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지만 손쉬운 비약은 아니다. 지난 해 말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가 1000번을 맞았다. 그것은 반성하지 않은 일본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1000회를 맞을 때까지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우리의 문제이다. 그러한 속수무책은 끝나야 할 과거를 오래도록 계속되게 하고, 여전히 우리 삶의 주위에서 불쑥 불쑥 나타난다. 과거는 그냥 잊히지도 그냥 사라져 버리지도 않는다.

2006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해성은 신인 작가이지만 이미 무대 위에서 20년을 연기한 중견 배우이다. 희곡집 <고래>에는 신인 작가의 패기만만한 저돌적 필력과 중견의 깊이 있는 시선이 때로는 조화롭게 또 때로는 거칠게 충돌하면서 공존한다. 사건의 이면을 켜켜이 파고드는 극적 상황의 예리함은 패기와 깊이의 공존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연극이 날로 사적인 공간으로 퇴화하는 시절에 이해성은 분명 눈길을 끄는 작가이다. 게다가 이제 막 시작한 '신인 극작가' 이해성에게는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들보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더하게 된다. 이제 봄이 오면 그의 또 다른 신작이 무대에 오른다. 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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