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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전쟁 무기? 미디어 오타쿠의 장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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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전쟁 무기? 미디어 오타쿠의 장광설!

[프레시안 books] 키틀러의 <광학적 미디어>

독일의 미디어 학자인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의 강의록 <광학적 미디어 : 1999년 베를린 강의>(윤원화 옮김, 현실문화 펴냄)가 작년 12월에 번역되어 나왔다. 강의가 있었던 해로부터 12년, 독일에서 출간된 지 9년 만의 일이다. 그러니 이 책은 이미 서구에서는 어느 정도 검증의 시간을 가진, 그러나 한국에는 조금쯤 늦게 도착한 '최신' 미디어 이론을 담고 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역 판본에서 발췌해 온 존 더럼 피터스의 해제를 먼저 싣고, 본문이 끝난 뒤에는 한국어판 옮긴이의 후기가 실려 있다.

25쪽에 걸쳐 실린 존 더럼 피터스의 해제는 키틀러라는 인물의 개인적 성향부터 연구의 주된 내용 그리고 그 연구의 의의까지 세심하게 설명한다. 이 해제는 방언을 쏟아내듯이 머릿속 논리를 늘어놓으며, 기존의 어떤 학문적 전통과도 친밀감을 표시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문헌을 뒤적거리는 괴팍한 노학자를 '대변'하는 글이다.

그에 따르면 키틀러는 '디지털 시대의 데리다'라는 별명답게 미디어를 이루는 수많은 요소를 하나하나 전부 해체한 뒤, 그것들이 원래 조립되어 있던 원리를 나열하면서 논리를 만드는 방식으로 그 동안 성행했던 대표적인 미디어 이론과 다른 노선을 걷는다. 이 해제는 이후 이어지는 간략한 설명과 함께 키틀러의 학문적 논리를 (영미권 독자에게 그리고 주로 영미권으로부터 미디어 이론을 이식 받은 한국의 독자에게도) 좀 더 쉽게 이해하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데, 또한 어떤 면에서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와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예고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연상이, 바로 이 책이 흔히 마주치는 일반적인 이론서와의 차이다. 강의 첫 날의 풍경으로 시작되는 본문은 굉장히 드라마틱하다. 마치 예고편에서 얼핏 그림자를 비췄던 주인공처럼 홀연히 나타나는 키틀러는, 학생들을 앉혀 놓고 총 14회의 강의 동안 다루게 될 내용을 청산유수처럼 설명한다.

오리엔테이션은 대표적인 르네상스 맨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태양을 두고 떠벌린 말을 인용하며 시작된다. 그는 '강의'라는 미디어의 속성으로 인해 앞으로 제한될 부분을 나열하기 시작하더니, 곧바로 지금껏 인간이 빛, 즉 '광학적 미디어'를 인식해 온 대부분의 방법론에 물음표를 그린다. 그리고 그 물음표에 대한 대답은 이미 익숙한 역사 속 미디어의 변화 지점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면서, 그러한 미디어에 관심을 가졌던 기존 학자들의 이론에 주석을 붙이면서 하나씩 해결해 나갈 것이라는 선언의 형식으로 구성된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조건이 가진 가치가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조차 이미 테크놀로지라는 미디어에 의해 구성되었던 것이라는 비밀을 마치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인 양 슬쩍 누설하면서 그리고 그의 미디어 이론이 맥루언의 체계에 조금은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는 힌트를 던진다.

미디어의 변화는 커뮤니케이션을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명제에 대해 키틀러는 극단적으로 반박한다. 그러한 반박의 제스처가 미디어의 변화를 점검하는 데에 좀 더 정확한 기준을 설정하기 위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키틀러는 미디어가 가진 도구적 성격, 즉 인간의 의지에 미디어가 생성, 변화해 온 것이 아니라 미디어 스스로 상보적 자세를 취하며 진화를 거듭해왔다고 주장한다. 즉, '미디어는 메시지(혹은 마사지)'라는 맥루언의 말을 받아들이며 미디어가 다루는 메시지 역시 또 다른 미디어일 뿐이어서 기술적 질서는 순전히 기술적인 체계 위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 <광학적 미디어 : 1999년 베를린 강의>(프리드리히 키틀러 지음, 윤원화 옮김, 현실문화 펴냄). ⓒ현실문화
그러나 키틀러의 방식은 맥루언보다 훨씬 더 과격하고 괴팍하다. 앞서 존 더럼 피터스가 경고했듯이 키틀러의 강의는 방대한 레퍼런스를 차곡차곡 정리하지 않는다. 키틀러는 학자라면 으레 가져야 할 엄밀함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키틀러 개인이 가진 긱(geek) 특유의 무뚝뚝하고 거만한 성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레퍼런스의 엄밀한 적용 대신에 키틀러는 독문학자 출신 특유의 매우 세련된 문헌학적 장기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축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닥치는 대로 그러모으는 데에 상상을 초월하는 탁월함을 보인다.

이제껏 일반적인 미디어 이론의 전통은 주로 미디어를 통해 변화된 환경이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그렇게 변화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의 문화학적 고찰은 물론이고 주체(Subjekt) 대신 기획(Projekt)이라는 용어를 이용하여 인터넷 시대의 인간을 설정했던 빌렘 플루서까지 인간의 신체, 특히 감각 기관과 영향을 주고받는 미디어의 속성은 20세기를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키틀러의 미디어 이론은 미디어를 주인공으로 하는 그 어떤 원전보다 훨씬 스펙터클한 스핀-오프다. 마치 조조를 주인공으로 하는 삼국지 <창천항로>처럼 키틀러의 미디어 이론은 광활한 미디어의 역사 속에서 본인이 사모해 마지않는 등장인물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주고, 그 등장인물이 저지르는 전횡을 기꺼이 허락한다. 그리고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논점의 높낮이를 리드미컬하게 구성하며 기존의 익히 알려진 미디어의 역사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이는 옛날이야기를 하듯 역사 속에서 실례를 찾아 제시하며 논지를 펼치는 미셸 푸코의 방식과도 흡사하다. 하지만 푸코의 서술 방식이 굳이 스스로의 한계를 주지할 필요 없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과 반대로 키틀러의 서술 방식은 주인공인 미디어에게 뚜렷한 사명과 목적을 부여하고, 그것을 찾아 완성시키기 위한 여정에 장애물을 만나게 한다.

키틀러는 미디어의 세 가지 기능인 저장, 전송, 처리를 중심으로 인간이 커뮤니케이션에 이용했던, 아니 이용해 온 것 같지만 인간의 사고나 행동과는 무관하게 거의 500년 동안 세상을 조직해 온 '광학적 미디어'의 연대기를 만든다. 인간의 신체에 직접 연결된 손을 사용해야만 저장, 전송, 처리가 가능했던 문자는 인간을 제어하던 방식이 카메라 옵스큐라의 수신 기능과 매직 랜턴의 송신 기능의 혁신적 기술을 맞이하고 '손가락은 그저 거들 뿐'으로 변모한 사진 촬영 장치의 발명으로 저장의 기능까지 탑재하게 된다.

거기에 시간 축을 좀 더 적극적으로 뒤흔들 수 있게 한 기계로서의 '영화'의 발명,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도출되었지만 기술적으로 훨씬 논란의 여지를 많이 담고 있는 TV까지 일필휘지로 설명한다. 키틀러는 광학적 미디어가 가진 여러 기술적 조건들을 열거하며, 끊임없이 저장, 전송, 처리로 이루어지는 모든 미디어의 요건에 부합되는 일반적인 원리라는 논리의 종착역에 다다르기 위한 알리바이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러한 알리바이의 가장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전쟁이다. 그것은 키틀러의 미디어 이론이 가진 가장 큰 변별점이자 공격의 대상이 되는 약점이기도 하다. 키틀러는 마치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시체의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는 숙련된 부검의처럼 천연덕스럽게 군사적 목적에 의해 발달된 기계와 미디어의 형태를 대응시키며 설명을 시도하는데, 이는 문화 연구와의 교집합 안에서 지지고 볶던 대부분의 미디어 이론이 사실은 문화, 즉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라 여겨지는 인본적 가치와는 별 연관이 없다는 그의 확고한 믿음으로부터 가능하다. 집요하게 TV 수상기와 군사용 레이더의 유사점을 파고드는 그의 강의를 따라가다 보면 키틀러의 관점은 수많은 과학 소설이 경계했던 세계관과 중첩되기도 한다.

아무튼 키틀러의 여정은 본문 말미로 흐를수록 좀 더 본색을 드러낸다. 키틀러는 이상적인 형태로서의 미디어인 컴퓨터, 즉 본인이 설정한 저장, 전송, 처리의 과정이 한 번에 이루어지는 완전무결한 기계에 14주의 강의가 지향했던 목적 (혹은 맥거핀) 모두를 내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청사진이 너무 이상적인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무리한 목표를 설정했다는 것을 애써 감추지 않으며, 미디어를 사랑한 미디어 이론가로서 키틀러는 지금껏 자신이 해온 대로 퉁명스럽게 레퍼런스를 쌓으며 묵묵하게 비극적 결말을 기다린다. 그리고 마치 화석을 짜 맞추어 존재하지 않았던 공룡을 만들고 담배를 꺼내 무는 고고학자처럼 레너드 코언의 음악을 들으며 판타지의 대장정을 마감한다.

이 역대 최악의 미디어 오타쿠이자 심술쟁이 노학자를 도대체 어느 좌표에 놓고 이해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본문의 뜨거웠던 열기를 차갑게 식히는 엔딩 크레디트 역할을 하는 옮긴이의 후기가 마련되어 있다. 옮긴이는 이 거대한 판타지 서사가 결국 '옛 유럽'의 유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재 유럽의 상황을 직시하는 기획이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키틀러 자신은 유럽 계몽주의의 진정한 발상지인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오르면서 주체적 인간이 오롯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누구나 믿고 있는 그 시절부터 유럽의 인문학은 전부 미디어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폭로한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전후 세대를 살았던 유럽인으로서의 키틀러 본인을 투영할 수밖에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을 살며 전쟁의 파편이 박힌 유럽인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는 비극적 모습을 연상케 한다. 록 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유명한 경구를 인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달에는 어두운 면이 없어요. 사실 달은 전부 어두워요. 달이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태양 때문이에요."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음악과 수학>이라는 만년의 프로젝트를 반도 실행하지 못한 채, 2010년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이 한국에 발간되기 두 달 전쯤이었다. 그 기획은 현실의 어느 것도 실제로 반영하지 않고 오로지 기술적으로만 존재하는 요소, 즉 음표와 숫자와 그것을 연결 짓는 공식으로만 이루어진 키틀러의 미디어 철학의 집대성이었다. 푸코의 <성의 역사>에 비견될 만한 그 기획을 통해 키틀러는 자신이 품었던 가장 깊숙한 부분의 궁금증을 건드리는 쾌락을 누리고자 했을 것이다.

꽤 전문적인 내용이고 특유의 산만한 전개 때문에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긴장을 풀고 천천히 읽으면 특유의 마술적 서사 구조에 빠져들게 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이론서다. 물론 이론의 탈을 쓴 판타지를 조직하는 것이 '학자'의 몫인지 예언자의 몫인지, 혹은 소설가의 몫인지는 정확히 구별해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1990년대부터 갑자기 홍수를 이루기 시작해 비약적인 발전과 겉과 속의 괴리감을 모두 경험한 한국의 영상 이론 전공자라면, 키틀러가 쳐 놓은 부비트랩 안으로 들어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 영미권을 통해 수입된 프랑스 철학이나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같은 문화 연구의 전복적 매력에서 대안을 발견하곤 했던 문화 애호가들에게도, 기계 결정론자처럼 철저히 미디어의 물질성만을 그 업으로 삼던 키틀러 특유의 고집을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흥미진진한 독서의 기회를 갖게끔 해 준 출판사와 역자에게 고마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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