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가상의 이라크 도시 '알 타파르'. 바틀 이병은 머피라는 또래 소년과 함께 복무한다. 전장으로 떠나기 직전, 바틀은 머피의 어머니에게 머피를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한다.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인 두 소년은 더 중요한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전장에 오지만 현실은 그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흘러간다.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되는 무자비한 살상, 전쟁의 소모품에 불과한 무력한 개인의 연이은 죽음. "계속 일탈하는" 것 이외에는 버틸 방법이 없는 전장에서 머피는 기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에 죄책감을 느낀 바틀은 자신의 기억을 헤집으며 머피가 죽은 원인을 알아내려 한다. |
<노란 새(The Yellow Birds)>(케빈 파워스 지음, 원은주 옮김, 은행나무 펴냄)의 내용이 어떠한지 다루는 대신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 이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혹은 이 소설이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조금 돌아가자. 먼저, 이 소설을 '쓰고 있는 나'를 상상해보자. 소설 속 화자인 '나'(바틀)도 아니고, 이 책의 실제 저자 케빈 파워스도 아닌 누군가를. 목차만 봐도 알겠지만, <노란 새>처럼 소설 속 시간이 뒤섞이는 형식에서는 전체 서사를 알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다. 보통 소설 속 화자도, 실제저자도 아닌 이 누군가를 '내포저자'라고 부른다. 아래에서는 편의상 내포저자를 '나'로, 소설 속 화자를 '바틀'로 구별하겠다.
소설 속 시간에서 최후의 시점인 2009년 4월(11장) 이후에 이 소설은 '나'에 의해 쓰인다. 그보다 최소 4년 전인 2005년 8월(7장)에 '바틀'은 어머니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조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가? 너 무슨 짓을 한 거니?" 그때, '바틀'의 반응은 이랬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씨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그건 질문도 아니라고, 난 생각했다. 그게 무슨 질문이란 말인가? 답이 없는 질문에 어떻게 답한다 말인가? 그때 일어난 일들을, 단순한 사실들을, 일어난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는 것은 일종의 배신이 될 것 같았다. 균형을 잡아 줄지어 세워 놓은 순간들의 도미노, 그걸 모호하고 불확실한 원인이라는 힘으로 밀어 넘어뜨리면, 오직 추락만이 모든 물체의 운명이라는 걸 보여줄 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일은 일어났다. 모든 것은 추락했다." (190쪽)
▲ <노란 새>(케빈 파워스 지음, 원은주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
이런 관점에서 독자인 우리는 11장을 좀 더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10장에 이르기까지 몇 번 흔적을 드러냈던 내포저자로서의 '나'는 11장에서는 비교적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까지 독자가 읽은 것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틀'을 빌어 '나'가 내놓은 대답이었다. 그 대답은 '서사'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런데 이제 독자는 '나'를 통해서 이런 얘기를 듣는다. "내가…설명하려 노력하면서 사용한 모든 단어는 내가 본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은 것 같다."
독자가 지금껏 읽은 이 소설이 '나'가 전쟁을 겪으며 "본 것"과는 다르다는 얘기. 너무나도 하찮다는 말 때문에 오해하기 쉽겠지만, 이 말은 소설의 내용과 '나'가 말하지 못한 무엇(이를테면, '말로 전달할 수 없는 전쟁') 사이에 위계를 두려는 태도가 아니다. 또한 '실제 거기 있었던 것'과 말로 전달한 것 사이의 간극에 대한 절망도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바틀'은 좀 더 체념하거나 냉소하며 세상에서 멀리 물러나 있는 게 어울린다. 이때 2005년의 '바틀'과 같은 상태였던 '나'가 2009년에 이 소설을 쓰게 되는 변화는 설명하기 곤란하다. 독자가 이 서술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읽은 게 '나'가 어떻게든 말할 수 있는 전쟁 체험이라는 점이다. 더 분명하게는, 그 체험을 '서사로 만들 수 있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독자가 감정이입하며 이해해가던 '바틀'은 전쟁 체험에서 서사화가 가능한 범위의 '나'에 불과하다.
소설의 막바지에서 '나'는 실감 나게 재현한 소설 속 '현실'을 전쟁 그 자체로 여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독자에게 직접 하고 있는 셈이다. 타자와 공유하기 위해서 기억을 이야기하지만, 그 서사가 독자에게 기억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저항하고 있다. 이런 이중적인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과제를 독자에게 남겨둔 채.
<노란 새>를 이렇게 바라보게 되면, 소설의 서사를 순서대로 따라가던 독자는 자신의 공감 정도를 어떻게 자리매김할지 약간 흔들릴 것이다. 그 흔들림은 소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만들어지던 공감의 성격을 바꾼다. 아마도 공감의 성격 변화는 이 소설에 깊이 빠져들던 독자에게서 더 클 것이다.
2005년 무렵 '나'는 전쟁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의 패턴으로 짜 맞출 수 없었다. 그 어떤 패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이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무언가를 얘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가 이해하는 자신의 삶은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박물관의 큐레이터" 같았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내 인생은 줄어들고 작아졌다.
'나'는 감옥에 있는 동안 전쟁과 관련한 특정 사건이 떠오르면 감방 벽에 낙서를 해두는 습관이 생긴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전쟁을 하나의 패턴으로 조립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그 낙서들을 어떤 종류의 패턴으로도 조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리 그 낙서들이 늘어나도 거기에 패턴이 존재하진 않았다. 기억은 도래하고 범람하고 잠식한다. 그렇게 "모든 것은 와해된다." 자신이 속한 "현재는 완전히 잊고" 마는 삶만이 주어진다. '나'에게 전쟁 체험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바로 그것이 전쟁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가 내린 대답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독자인 우리는 전쟁의 기억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되물어야 한다. '나'에게 "그 낙서들은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것들을 연결 짓는 건 잘못"이라면, 우리가 조립을, 서사를, 이해를 바라는 것은 그저 타자인 우리의 욕망은 아닐까. 마치 이따금 감방에 들른 간수(타자)가 그 낙서들을 패턴이라고 보았듯이.
물론, '나'는 이제 "왜 그들이 이것을 패턴이라 보았는지" 타자의 욕망을 이해한다. 어쩌면 그 점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해와는 상관없이 '나'와 독자 사이의 간극은 여전하다. 이 어쩔 수 없는 간극 앞에서 독자는 어찌할까. 할 수 있는 것은 간수들처럼 "낙서에 의미가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고,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나'가 비로소 말로 할 수 있게 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고, 아직 말로 할 수 없는 '나'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 나누어 갖기 위해 조심스레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소설에서는 결코 말해지지 않은 '나'의 "인생을 이루는 길고 기록되지 않은 순간들이 내내 상영되고 있는 줄도 몰랐던 영화처럼 하나씩 스쳐 지나"가는 상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그리고 독자인 우리에게, <노란 새>는 머프의 어머니가 감옥에 있는 '바틀'을 면회 왔을 때 건네준 "지도"와 같다. 이 지도는 시간이 미치는 작은 영향들과 한 장소의 의미를 설명하기엔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기억들로 형성된 환상을 가리킨다. 이 지도는 조금씩 사실과 먼 그림이 되고, 점점 더 기억을 형편없이 2차원으로 번역한 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지도는 모든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로 곧 쓸모없어질 것이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짧게 정리하자. <노란 새>는 재현되기를 거부하는 체험을 어떻게든 이야기함으로써, 오히려 거기에는 언어로는 아직 재현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여전히 현재형인 '나'의 트라우마는 그제야 독자에게 이어질 가능성이 생긴다. 이 가능성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는 선뜻 말하기 어렵다.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의 말처럼, "만약 기억한다는 것이 자신의 몸으로는 겪어보지 못한 '상처'를 자신이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과 같은 일이라면, 상처 입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상처에 의해 상처 입는 일이 될 것"일 테니.
덧붙여서)
<노란 새>의 어떤 '정직성'도 주목할 만하다. 고통을 전시하면 독자들은 훨씬 생생히 전쟁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 전쟁은 '나'의 전쟁이 아니라 누군가의 판타지를 충족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의 팔다리가 어떻게 잘려나가고 시체폭탄이 어떤 모양새이고 하는 것들을 더 자세히, 더 생생히, 더 적나라하게 얼마든지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바틀'의 위치와 한계 안에서만 서술하는 긴장과 절제를 놓치지 않는다.
말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다는 태도로 서술하려고 한다면, 그때 소설은 스스로를 배반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폭력적으로 틈입해 들어오는 전쟁의 기억에서, 자신만이 풀어낼 수 있는 서사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는 방식으로, 상처 이후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해내는 시도를 한다.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공진호 옮김, 문학동네 펴냄)의 인물 '바틀비'에게 바치는 오마주인 게 분명한 '바틀'에서부터, 전쟁소설에서 습관적으로 기대는 상투적인 설정들에서 멀어지려는 태도를 비롯해 흥미로운 부분이 여럿이다.
그런데 이런 정직성에 관한 판단은 조금 매끄럽지 못한 한국어 문장 탓에 흐려지곤 했다. 이게 소설의 약점인지 번역 탓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오역은 아니더라도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문장들을 변명 삼고, 다음 기회를 기다릴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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