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인터뷰] 100호 맞이한 <역사비평> 산증인 서중석 교수
2012.09.03 10:07:00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1990년대 한 대학의 과방(科房) 한쪽에는 낡은 책장이 놓여 있었다. 표지가 떨어져나간 노래책, 세상의 모순을 날이 선 시선으로 바라보던 인문사회과학 책들과 팸플릿이 가득하던 책장 한쪽에 새 잡지 20여 권이 줄지어 서 있었다. 순번을 맞춰 서 있던 그 잡지는 계간 <역사비평>이었다. 대학에 첫발을 내디딘 새내기들을 위해 선배들이 마련해준 선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책장 속 <역사비평>엔 손때가 묻었고 순번은 뒤섞였다. 때때로 몇 권은 학생들의 자취방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역사비평>은 학회 세미나 '커리'(커리큘럼의 준말)로 애용됐고, 역사와 관련해 궁금증이 생겼을 때 우선 뒤적이는 잡지로 자리매김했다. 해가 바뀌어 다음 새내기들이 들어온 후 <역사비평>의 손때는 더 짙어졌다. 기자가 다닌 역사 관련 학과의 풍경이었다.

그러한 <역사비평>이 100호(2012년 가을호)를 맞이했다. 1987년 부정기간행물(무크지)로 첫선을 보인 후 25년 동안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발간한 결과다. 역사 연구 성과의 대중화를 목표로 한 진보 성향의 이 묵직한 잡지는 부박한 시대를 거슬러 우직하게 한 걸음씩 걸어왔다.

<역사비평>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있다.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다.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인 서 교수는 한국 현대사를 전공해 국내에서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연구자로 꼽힌다.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금기이던 시대를 거슬러 현대사 연구를 개척한 서 교수는 <역사비평> 초대 주간을 맡아 53호까지 <역사비평>을 이끌었다.

서 교수는 20대에 대학을 졸업해 대학원에 진학하는 순탄한 과정을 밟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 때이던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휘말려 옥살이를 했다. 학교에서도 제적됐다가 뒤늦게 복교돼 30대 중반이던 1984년 대학을 졸업했다. 그 사이, 1979년부터 <신동아> 기자로도 활약하는 등 현실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은 한국 현대사 연구의 밑거름이 됐다.

8월 27일, 서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서 교수는 <역사비평> 25년에 대해 돌아보고, 현대사 연구와 교육이 오늘날 처한 상황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박근혜 후보의 역사 인식 문제, 장준하 의문사 의혹, 이명박 정부의 역사 관련 정책과 한일 관계 등 역사 관련 현안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의견을 밝혔다. 장준하와 관련, 서 교수는 함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겪었던 일도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서 교수는 생사의 기로에 놓인 진보정당 운동에 대해 다시 한 번 애정 어린 조언을 전했다.

아래는 서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의 주요 내용이다.

▲ 서중석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6월항쟁 와중에 탄생한 <역사비평>…현대사에 대한 수요 굉장했다"

프레시안 : <역사비평>이 어느덧 100호를 맞이했다.

서중석 : <역사비평>은 6월항쟁 와중에 탄생했다. 격변기였다. 학술운동도 활발하던 때였다. 전체 변혁운동의 일부분으로서 학술운동이 기여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일제 시기와 해방 직후의 변혁운동에 주목하자는 관점이 있었다. 난 그런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왜곡된 근현대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묻혀 있던 부분을 재조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현대사를 연구하고 보급해 국민들이 폭넓게 현대사를 인식하게 하면,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데 많이 기여할 것이라고 봤다.

처음에는 <역사비평> 편집진 자체가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로 구성됐다. 역사문제연구소도 그러했다. <역사비평>이 초반에는 역사학도보다 일반 지식 사회에 더 영향을 많이 줬다. (<역사비평>이 탄생하기 전에도) 지식인들이 <실천문학>, <창작과비평> 등을 통해 현실 비판을 했지만, 그 바탕이 되는 현대사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운동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역사비평>에서 분단 문제, 북한 정권의 탄생 과정, 해방 직후 미국과 미군정, 친일파, 4.3사건, 여순사건, 광주항쟁 등 굵직한 사안을 많이 다뤘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는 현대사에 대한 수요가 굉장했다. <역사비평>을 통해 그것을 충족시키느라 신바람도 났지만 힘도 들었다. 겁난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이걸 어디까지 다뤄야 하나' 하는 고민을 회의석상에서 참 많이 나눴다. 그 시기에 적어도 근현대사와 관련해서는 사회적으로 갈망하는 것들을 풀어주는 역할을 <역사비평>이 어느 정도 했다고 본다. 격려도 많이 받았다.

프레시안 : 25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역사비평>을 둘러싼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서중석 : 1990년대 중반 들어 학술운동도 약화되고 진보 운동도 그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역사비평>도 앞으로 소재가 줄어드는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들을 했었다. 그런데 해방 50주년이던 1995년 이후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 냉전 세력이 이승만 살리기, 박정희 살리기를 강하게 추진했다. 그러면서 다시 우리 할 일이 늘어났다.

1997년에는 6월항쟁 10주년을 맞아 1년 내내 특집을 했다. 갑오농민전쟁을 비롯한 한국 변혁 운동 특집을 하거나 세계의 민중혁명, 6월항쟁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 등을 다뤘다. 6월항쟁은 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분수령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 평화, 인권을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됐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가 크다. 난 1980년대 내내 우리가 광주항쟁의 정신 속에서 살았던 것과 똑같은 의미로 (1987년 이후에는) 6월항쟁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본다.

2000년에 53호를 끝으로 <역사비평> 주간을 그만두는데, 그해에는 6.15남북정상회담이 있지 않았나. 내가 주간을 할 때까지는, 계속 할 일이 생긴 셈이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학술운동이 사그라지고 학계가 더 분화하면서 <역사비평>의 역할이 다소 축소되지 않았나 한다. (전문적인) 학술지화하면서 역사학도(만)의 <역사비평>처럼 보이는 면이 있게 됐다. 대학에서 논문 심사가 더 까다로워진 것도 한 원인이다.

▲ 25년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독자를 찾은 <역사비평>. ⓒ프레시안(최형락)

"현대사를 올바르게 연구하면 세상이 많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프레시안 : 현대사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도 줄어들었다.

서중석 : 아, 진짜 고민이 많다. <조선일보>도 자기들 식으로 개탄하지 않나. 6.25전쟁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우리는 광주항쟁, 6월항쟁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개탄한다. 내가 수업 시간에 꼭 이야기한다. '자네들은 그야말로 6월항쟁의 최대 수혜자인데 어째서 6월항쟁과 우리 현대사를 그리도 모르는가'라고. 이렇게 강조하는데, 잘 먹혀들지 않는다.

현대사를 올바르게 연구하고 가르치면 세상이 많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몇 십 년의 경험 속에서 이젠 알게 됐다. 내가 숙명으로 해야 하는 작업이지만, 이게 잘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사에 잘못이 많다고만 이야기하니까 재미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학생도 있다. 그런데 우리 근현대사, 문제점도 많지만 자랑스러운 점도 많다. 우리가 이만큼 해냈다는 것, 이건 대단한 것이다.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 들어 현대사 인식을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도 많았다.

서중석 : 이명박 정권이 출범할 때는, 그 지지층이 그렇게까지 강한 수구 냉전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있는 줄은 몰랐다. 물론 이승만 살리기, 박정희 살리기를 보며 '세상이 변했는데 저 사람들은 아직도 옛날 속에 살고 있구나' 하는 강한 느낌은 받았다.

이명박 정권이 새로 연구된 것들을 참작하면서 그걸 보수적으로 해석해 참다운 보수주의를 심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거기서 제일 중요한 건 반성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는 이데올로그들에게 중고등학교 등을 다니면서 현대사를 재교육하게 했다. 사용 중인 교과서를 거의 강압적으로 고쳐 쓰라고 요구했다. 교육의 자율성, 역사 인식의 중립성을 정면으로 위기에 빠뜨렸다. 그리고 건국절 문제가 강하게 등장했다. 일부에서는 건국에 기여한 친일파를 서훈하자는 주장까지 했다.

역사란 여러 주장이 나올 수 있다. 다만 구체적인 사실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면서 설명해야지, 권력과 언론의 횡포에 의존해 역사 인식을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이명박 정권, 뉴라이트, <조선일보>의 큰 문제는 그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했던 방식을 차용해 권력의 힘으로 역사 인식 등을 바꾸려 한 것 아닌가. 그럼 안 된다. 학문의 세계는 학자에게, 교육의 세계는 교육자에게 맡겨야 한다.

▲ "5.16을 구국의 결단으로 보는 건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박정희는 행운아…박근혜 역사 인식, 상당히 잘못돼 있다"

프레시안 : 경제 발전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할도 논란거리였다.

서중석 : 한국 현대사의 역동성, 국내외적인 환경 등을 제외하고 경제 발전 문제를 설명할 수는 없다. 박정희는 굉장한 행운아라고 본다. 현대사의 중추를 차지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18년을 지배하지 않았나. 4월혁명으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가 새롭게 도약하는 국내적 조건이 있었고, 국제적으로도 자본주의가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를 맞이한 때 아닌가. 한일회담에서 얻은 성과와 월남 파병으로 얻은 대가 등을 경제에 투입할 수 있었던 건, 그때 누가 대통령을 했더라도 그 시기에 했을 것이라고 본다. 한일회담 타결과 월남 파병은 한국이 분단 체제로 있던 속에서 하게끔 돼 있었다.

프레시안 : 대선이 코앞이다. (경선) 후보들의 역사 인식, 어떻게 보나.

서중석 : 문재인, 김두관 (경선) 후보의 역사 인식은 대체로 무난한 것 같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의 역사 인식과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선 5.16을 '구국의 결단',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는 건 상당히 잘못된 생각이다. 아버지한테 너무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5.16정권이 선전한 것 중 가장 큰 게 '장면 정권은 혼란에 빠졌고, 그런 혼란과 좌경화의 위험 속에서 구국의 결단을 내렸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4월혁명 후 그렇게 많은 데모와 진상 규명 요구가 있었던 것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승만 정권 때 보도연맹 사건 등 규모가 큰 집단 학살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경찰 등의 억압적 조치 때문에 민(民)들이 아주 고통스럽게 살았다. 한마디로 억눌리고 왜곡된 것들의 진상이 규명돼야 할 부분들이 많았고, 자기 권리를 주장해야 할 부분도 많이 있었다. 4월혁명 이후 이런 것들이 터진 건 자연스러운 일로 봐야 한다. 혼란이라고 이야기할 게 아니다. 우리 역사가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것을 거치면서 성숙해진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그 고통을 감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혼란 문제만 해도, 장면 정권이 들어선 1960년 8월 23일 이후 점점 약화된다. 데모도 많이 줄어든다. 통계로도 나타난다. 1961년에 와서는 '어째서인지 데모가 안 보인다'는 기사가 신문에 날 정도였다. 5.16쿠데타 세력은 4.19 (1주년) 때 데모로 사회가 혼란해지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그래서 부추기기까지 했는데, 그런 데모가 안 일어났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내부를 정리해가고 혼란도 약화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장면 정권 출범 때부터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새로운 해방이라고도 볼 수 있다. 폭넓게 자유를 획득했고, 통일운동과 노동운동도 활발했다. 법치주의가 자리 잡으려 한 게 장면 정권 때다. 이승만 정권 때는 무법과 탈법의 시대였다. 또한 장면 정권은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했다. 경제 건설은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모토였다. 이렇게 한국 사회가 크게 변모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5.16쿠데타 후 박정희 정권은 경제 제일주의를 승계했지만, 다른 부문에서는 4월혁명 정신에 역행하고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바를 가로막았다. 그런 의미에서도 '5.16=구국의 결단'으로 보는 건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프레시안 : 아버지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딸에게 과도하게 묻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서중석 : '박근혜에게 유신 체제 책임을 묻는 건 연좌제 아니냐'고 보는 이도 있는데, 그건 참 잘못된 인식이다. 박근혜는 유신 체제에서 1974년 8.15 (육영수 피격 사망) 이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유신 체제를 이끌어가는 데 큰 기둥 역할을 한 것이다. 퍼스트레이디는 허깨비가 아니다. 박근혜의 행동과 발언은 유신 후기에 무게 있게 영향을 줬다.

그리고 정수장학회만 하더라도, 5.16세력이 김지태에게 어떻게 했는지 등을 국가기관에서 명백하게 밝혔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또한 박정희에 대한 지지와 박근혜에 대한 지지가 많이 겹친다. 박정희의 정치가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선거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박근혜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 '불통'이라고 하는데, 그건 유신 때 박정희와 아주 비슷한 모습이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유신 체제 평가는 후세에 맡기면 된다고도 하는데, 그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저들이 유신 쿠데타를 통해 헌법을 유린하고 인권을 억누르고 긴급조치로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건 삼척동자도 판단할 수 있는 사안 아닌가. 무엇 때문에 그 평가를 후세의 역사가에게 맡긴다는 건가.

▲ "'잡범'이라고 불리던 일반 죄수들이 장준하 선생에게 그렇게 박수를 보내더라." ⓒ프레시안(최형락)

"박근혜 자신을 위해서도 장준하 의문사 진상 규명에 협조해야"

프레시안 : 장준하 의문사 의혹이 다시 부각됐다.

서중석 : 특검제 비슷하게 새 위원회를 만들어 사인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장준하가 서거할 때는 굉장히 험악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진상 규명이 불가능했다. 2000년대 들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비로소 거론했지만, 그때도 시신을 재검사해 핵심을 파헤치기가 어려웠다. 사건 당시 권력 핵심에 접근하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조사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이장하면서 시신을 처음으로 발굴한 것 아닌가. 객관적으로 재조사하는 게 좋다.

독립군 출신 장준하는 친일 황국 군인이던 박정희의 숙명적인 라이벌이었다(관련 기사 : 박근혜 '아킬레스건', 장준하는 누구?). 특히 장준하의 반유신 활동은 다른 어떤 사람하고도 차이가 났다. 1974년 12월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했는데, 분위기가 대단했다. 바로 김종필 총리가 서명 운동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고, 얼마 후 박정희까지 나섰다. 그리고 곧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한다. 그게 다 장준하의 반유신 운동 후 일어났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소에 있을 때 놀란 적이 있다. 한쪽에서 막 박수가 일어나더라. 저게 뭔가 싶어 가봤다. '잡범'이라고 불리던 일반 죄수들이 잠깐 운동 시간에 바깥에 나간 장 선생에게 그렇게 박수를 보내더라. '이래서 박정희 정권이 장 선생을 두려워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 : 서 교수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10개월여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 시기에 장준하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프레시안 :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씨는 "타살이라고 결론 내려진다 해도 박근혜 후보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박 후보가 나라를 운영하는 입장이 된다면 그 당시와 연결해 분명히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서중석 : (박근혜 후보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뭐가 있겠나. 그렇지만 반유신 운동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의 의문사이기 때문에 이 (진상 규명) 문제에 박근혜 후보가 협조하는 건 꼭 필요하다. 응당 해야 한다. (박근혜가 장준하의) 죽음과는 관계가 없지만, 유신 체제와는 관계가 깊기 때문에 그렇다. 박근혜 후보 자신을 위해서도, (장준하 의문사의 진상을 규명할) 위원회를 만드는 데 협조해야 한다.

프레시안 : 최근 한일 관계가 냉각됐다.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이명박 정부의 대일본정책은 엉망진창이다. 정권 초기에는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식의 발언들을 했다. '저래서 되는가, 따질 건 따져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문제가 나왔다. 한일 간의 군사 협력 문제는 매우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사안인데,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와 균형 잡힌 외교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한쪽으로 치우친 외교를 했다.

독도 방문 후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이 일왕 사죄 발언이다. 일본인에게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걸 넘어서, 독도 방문과 논리적으로 연관이 안 되는 발언이었다. 꼭 제기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제기해야 하는데, 이 시점에 그걸 제기해 일본의 우경화에 힘을 실어준 측면이 있다. 물론 일본 잘못도 크지만, 이명박 정권이 외교 문제를 참 어렵게 만들어놓았다. '위안부' 문제에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 내 진보 세력의 입지도 팍 줄여놓았다.

ⓒ프레시안(최형락)

"진보세력, 현대사를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프레시안 : 그간 진보정당 운동에 애정 어린 조언을 해왔다. 진보정당 운동이 최근 다시 어려움에 빠졌다.

서중석 : (질문을 들을 때부터 한숨) 참담하다. 또 이렇게 되다니, 진보세력이 참 꼬이는 게 많다는 생각을 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차지하는 걸 보고 감개무량했다. 그래서 <역사비평>에 원고를 썼다. 북한에 대해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고 민주노동당에 주문했다. 다른 세력보다 북한을 잘 알고 이해하는 세력이 비판한다면, 북한에서도 귀담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몇 가지 생각할 게 있다. 한국 진보세력은 정치력을 갖추기가 참 어려운 상황에서 커왔다. 일제 때도 지하투쟁을 했고, 해방 직후에도 여운형 계열을 빼고는 진보세력의 정치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박정희 정권 이후에도 '투쟁'이라고 계속 외칠 수밖에 없는 측면이 많았다. 제대로 정치 활동을 할 기회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진보세력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지 못하는 면이 있다. 한국의 진보세력 사이에서는 일제 때건 1980년대건 섹티즘(sectism, 파당주의)이 강하게 작용했다. 분파 싸움도 여러 차례 벌어졌다. (지금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나는 걸 보며) '과거의 유산이 너무 많이 발목을 잡는구나'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진보세력이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구나'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학창 시절에 지하투쟁을 할 때 가졌던 도식적인 흑백논리와 지식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이렇게 된 데에는 주체사상도 영향을 준 것 같다. 주체사상은 참 단순한 주장인데….

근현대사의 역정, 즉 진보세력이 어디서 국민적 지지를 받고 어디서 몰락했는가 하는 문제를 객관적으로 이해했다면 2008년이나 올해 같은 사태가 과연 일어났을까. 내부 논쟁은 있어야 하지만, 그걸 외화할 때는 폭넓은 정치력이 나타나야 한다. 그 기본은 현대사에 대한 이해다.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지식 아닌가. 진보세력은 학문적으로(특히 역사와 철학) 무장하고, 내가 왜 민중과 고통을 같이해야 하는가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큰 자산이자 힘이다. 그래야 정체성을 똑바로 세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참 황당하게 무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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