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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내부고발자, 세계화의 묵시록을 예언하다

[프레시안 books] 로베르토 볼라뇨의 <2666>

스페인어권 문학에서 <돈키호테> 이후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엄청난 화제를 몰고 온 로베르토 볼라뇨의 유작 <2666>(송병선 옮김, 열린책들 펴냄)이 드디어 번역·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다. 1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과 복잡한 구조로 인해 '메가 소설’로 부르기도 하며, 20세기 이후 서구세계의 시공간을 가로지른다는 점에서 '글로벌 소설'로, 다양한 인물이 경험하는 사건을 통해 현실을 규정하는 근원적이고 내밀한 구조를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총체 소설'로 읽기도 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의 여러 나라는 작가의 삶의 궤적과 무관하지 않다. 볼라뇨는 칠레에서 태어났으나 열다섯 살에 가족과 함께 멕시코로 이주한다. 그러나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민주주의 사수를 위해 육로를 통해 칠레로 돌아갔다 독재정권에 투옥된다. 다시 그곳을 탈출한 후 멕시코에 거주하며 보헤미안처럼 청년 시절을 보내다 홀연 파리로 떠나 유럽 각지를 부유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정착한다. 가난을 떨치기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글을 쓰다 마침내 1990년대 후반부터 작가적 명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얼마 되어 않아 간부전이란 병을 얻고 2003년 50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 <2666>(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송병선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평생을 노마드처럼 떠돌아다닌 볼라뇨는 라틴아메리카 문단의 내부 고발자이기도 했다. 자신의 사회적 명성과 성공을 위해 세계적 반열에 선 '붐(Boom)세대' 작가들과 마술적 사실주의의 명성에 기대어 소설쓰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평생 제도권 문화의 밖에 살면서 당시 문학권력의 상징이었던 옥타비오 파스를 위시한 문단의 패거리 정치를 원색적으로 비난한 은둔형 소설가였다. 그는 이전 소설들에서 정치권력의 폭력과 부패를 누구보다도 강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동시에 독재에 침묵하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이와 결탁하는 지식인과 문인들의 행태를 고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총 5부로 구성된 <2666>은 "권태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공포의 오아시스!"라는 보들레르의 시구로 시작한다.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이 여러 인물과 에피소드가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 도시 산타테레사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세계화의 상징이 된 미국-멕시코 국경은 중심과 주변부가 만나는 지점이며,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로 인해 사막 한가운데 형성된 거대한 산업지대이자, 이민자와 마약 밀매업자들의 주요 통로 중 하나로 이 소설에서는 근대의 '악'이 다시 출현한 장소가 된다. 이곳에서는 1993년 이후 수백 명의 여성이 실종되었으며 도시와 그 주변 사막에서 주검으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다.

1부는 유럽의 문학 비평가들이 독일의 은둔 작가 아르킴볼디를 찾기 위해 산타테레사에 도착했다가 그를 찾는 대신 이 잔인한 연쇄살인을 접하게 된 후 공포에 사로잡힌다. 2부와 3부에서는 피노체트 독재를 피해 멕시코로 망명했다 산타테레사에 정착한 칠레 출신 교수와, 권투시합 취재를 위해 산타테레사에 온 미국의 흑인 신문기자가 이 비극에 간접적으로 휘말린다. 이들은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죽음의 도시를 탈출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4부는 본격적으로 100명이 넘는 살인 사건을 법의학 보고서와도 같이 하나씩 기술한다. 시신이 발견되는 순간부터 시작해 강간당한 후 교살된 시체에 대한 묘사, 주변 정황 소개,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혹은 찾지 않는) 수사, 결국 미해결 사건으로 분류되고 종결되는 과정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여성 연쇄살인이 두 나라 사이의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국제적 범죄조직의 소행일 뿐 아니라, 정부당국의 무관심과 부패가 구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조사관, 경찰, 기자, 지식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단서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희생자들은 정부나 언론이 말하는 대로 윤락여성이 아니고, 멕시코의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이민자 출신으로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마킬라도라(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원재료를 조립하고 완성품을 다시 수출하는 노동집약형 다국적 생산방식) 노동자들이었다.

볼라뇨는 NAFTA의 결과로 사막 한가운데에 펼쳐진 공장지대의 '상대적인 경제적 활력'을 목도하면서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적어도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축복' 뒤에 도사리고 있는 제도적 무관심으로 인해 대부분이 여성인 이들 노동자들은 저임금, 권리의 박탈, 공공서비스와 복지의 부족, 치안의 부재라는 열악한 상황에서 살아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폭력과 범죄에 쉽게 노출되고 죽음의 위협에까지 직면하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실제 일어났던 연쇄살인의 비극을 세계화라는 경제체제의 변화와 연결하여 추론한다. 이런 방식으로 여성 살해가 단순히 멕시코라는 한 국가의 변방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사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복지와 분배보다는 성장과 축적의 패러다임인 신자유주의로의 회귀가 초래한 비극적인 결과의 단적인 예임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주검의 연속적 발견으로 인해 시민 자신들도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만, 거대한 범죄조직과 공범 관계에 있는 정부 및 경찰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사건 해결을 바라기보다는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강요가 아닌 이 자발적 침묵이야말로 거대한 폭력의 순환구조를 재생산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임을 드러내면서, <2666>은 탐정소설의 형식을 넘어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세계화 시대의 사회심리를 탐구하는 묵시록으로 나아간다.

볼라뇨는 다양한 현대의 '공포증'을 열거하면서 산타테레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공포 공포증'에 집단적으로 사로잡혀 있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이 지닌 공포를 두려워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공포를 계속 생각하면서 살아야만 하고, 이런 두려움이 가시화되면 두려움이 두려움을 낳는 체제가 만들어지고, 당신은 그런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2666> 4부, 712쪽)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라는 덫에 걸려 도시 전체가 두려움의 체계를 증식하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이자 괴물이 되어가며, 이 구조에서는 모두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그 결과 침묵 속에서 사람 사이의 소통이 사라지고, 타인을 자신의 공포와 폭력을 투사하고 전이시키는 대상으로 삼게 된다.

이 현상은 이민자에 대한 공공연한 혐오와 차별로 드러난다.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가기 위해 산타테레사에 온 한 엘살바도르 이민자는 이곳에서 시체를 발견하고 신고했지만 오히려 살인 혐의로 수감된다. 며칠 후 풀려난 그는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국경선을 넘다 "아리조나의 사막에서 길을 잃고 말았고, 사흘 간 걸은 끝에 완전히 탈진한 몸으로 파타고니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한 농장주가 자기 땅에 토했다는 이유로 그를 마구 때렸다. 이후 그는 보안관에게 인도되었고, 하루 동안 유치장에 갇혔다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편안하게 죽는 것밖에 없었고, 그는 그렇게 했다."(<2666> 4부, 729쪽)

노동의 탈국가적, 탈민족적 이동을 촉진한 세계화로 인해 더 가깝고 친밀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와 이상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경계와 국경이 증식되고 강화되는 역설적 결과에 직면한다. 이렇게 볼라뇨가 형상화하는 산타테레사는 세계화가 심화되고 이주와 이동이 확대됨에 따라 지구 각지에서 일어나는 공통된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설의 마지막 장은, 미스터리로 남겨졌던 은둔 작가 아르킴볼디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20세기 유럽으로 돌아간다. 젊은 시절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징집되어 소련으로 파병되는데, 버려진 마을에서 러시아 혁명에 뛰어든 한 작가의 비망록을 발견한다. 평등과 자유를 갈망했던 젊은 이상주의자들이 문학적 상상력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마저 박탈당한 채 반혁명분자로 몰려 목숨을 잃는 상황을 고발한다. 이들에게 러시아 혁명은 배반의 다른 이름이며, "꿈이 아니라, 꿈의 눈꺼풀 뒤에 숨은 악몽"(<2666> 5부, 1367쪽)이라고 고백한다.

이후 독일이 패전하자 송환되어 수용소에 수감된 아르킴볼디는 그곳에서 나치에 노동자들을 제공하던 조직의 부소장을 만나 상부의 명령을 받고 유대인 학살을 지시했다는 고백을 듣는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파시즘 앞에 침묵하고 이를 넘어 자발적으로 동조하는 전체주의에 탄식한다.

"역사는 결정적인 순간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저 순간들, 즉 극악무도함 속에서 서로 경쟁하는 짧은 막간의 번식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야."(<2666> 5부, 1487쪽)

아르킴볼디는 이 야만의 역사를 증언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어떤 권력과도 타협하지 않기 위해 은둔을 선택한다.

볼라뇨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이해하기위해 산타테레사의 여성연쇄살인을 20세기 전체주의의 경험과 병치시킨다. 외부로부터의 억압을 넘어 주체가 자발적으로 위협에 공조하고 참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것은 독재와는 전혀 다른 국면, 즉 두려움과 침묵의 정치학으로 작동한다. 강간과 살인이라는 산타테레사 사건이 비록 '비정치적'이지만, 멕시코 국경이 가져오는 공포는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나타난 전체주의의 망령인 셈이다.

이런 시대적 해석은 볼라뇨의 역사관과도 연결된다. 근대의 시간이 직선적 궤적을 통해 진보와 발전의 이상을 구현한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오히려 진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야만'이 자신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며 폭력을 분출하고 인간관계를 절멸시키는 것이 근대의 핵심이라고 볼라뇨는 말하고 있다.

야만의 20세기 서구세계를 관통하면서 볼라뇨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폭력 앞에 침묵하는 무능한 지식인, 작가, 문인들에게도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따라서 그의 현실인식은 비관적이며 냉소와 조롱으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동시에 아르킴볼디와 같이 '악'에 굴복하지 않고 야만과 정면으로 맞서는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패배주의적 태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지독한 절망은 현실을 극복하려는 열망으로 연결되며, 이 정신은 타협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볼라뇨의 삶의 궤적과도 닮아있다.

▲ <2666>의 스페인판 표지. ⓒAnagrama
볼라뇨는 죽기 직전 출판사의 경제적 사정과 홀로 남겨질 자녀를 위해 이 책을 다섯 권으로 나누어 출판해 줄 것으로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편집자는 작품의 통일성과 연결성을 고려해 다섯 부분을 한데 묶어 한 권의 장편으로 펴냈다. 한국에서는 소설가의 유언대로 다시 다섯 권으로 나누어 출간되었다.

또 한 가지! 스페인어 원작의 표지가 산타테레사 주위를 둘러싼 사막에서 외부와 고립된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여인이 그려진 삽화를 담고 있는데 반해, 한글 번역본의 표지그림에서 어둠 속을 질주하는 말은 악마 모양을 한 몸통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진보와 야만, 혹은 진보 속의 야만이라는 근대의 양면성과 세계화의 이중성을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 이것은 <2666>을 읽는 한국 독자들에게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1960~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붐세대는 유럽문학의 실험성과 지역의 토착적 성격을 혼합하여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서사기법을 내놓았다. 이들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좌절하는 것을 목도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독과 환멸이라는 언어로 표현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전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한 세대가 지나 볼라뇨는 실패한 국가기획과 더불어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광포한 힘에 라틴아메리카가 공포와 파국에 이르는 현실을 도저한 분노로, 때로는 냉정한 시선으로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지난 시기가 배출한 화석화된 지식인을 넘어서는 대안적인 모습을 절망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보르헤스의 독창적인 세계 해석과 천부적 이야기꾼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매료되었던 한국 독자라면 이제 볼라뇨라는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그러나 아쉽게도 이미 고인(故人)이 되어버린 반항 작가의 세계에 도전해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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