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미시시피 주가 낳은 위대한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야생 종려나무>에서 이렇게 말한다. "슬픔과 무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슬픔을 택하리라"고. 장 뤽 고다르의 영화 <제멋대로 해라>를 비롯하여 다른 작품에 종종 인용되기도 했던 유명한 이 어구는 톰 프랭클린의 <미시시피 미시시피> (한정아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펴냄)의 주인공 래리 오트의 삶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표현이기도 하다.
▲ <미시시피 미시시피>(톰 프랭클린 지음, 한정아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펴냄). ⓒ알에이치코리아
20여 년 전 미시시피 주의 샤봇에서 사라진 아름다운 소녀 신디 워커의 살해 용의자로 지목된 후,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살아왔던 래리는 동네 주민들이 생각하듯 아무 것도 아닌 허상은 아니었다. 그가 8일 전 사라진 티나 러더포드의 용의자로서 새삼 주목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잠재적 살인자로 배척받았던 그가 도리어 괴물 가면을 쓴 남자의 총에 가슴을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들이 보기엔 유령처럼 살아왔던, "죄를 지어본 적도, 사랑해 본 적도, 두려워해 본 적도 없이"* 살아온 듯 보였던 래리 오트가 자신의 고독과 슬픔을 안고 삶을 지켜왔다는 것을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층 더 선연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추리작가협회 골드 대거 상을 받은 <미시시피 미시시피>는 20여 년 전의 과거가 다시 현재의 비극이 되어 돌아온다는 전형적인 미스터리물의 공식을 따른다.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사건은 언제까지나 죽지 않고 잊히지도 않는다. 사라진 소녀는 연주가 끝난 후에도 공기 중에 떠도는 음률처럼 사람들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물고, 그 음악의 그림자에 홀린 듯 또 다른 소녀가 사라진다.
이 클리셰에 가까운 플롯 안에서 개별성을 실현하려는 작가들은 도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유기적인 사슬로 엮어야 하지만 무리한 연결로 인해 개연성이 떨어지는 작위적 구조를 피해야 하는 작업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톰 프랭클린은 이런 과업을 솜씨 좋게 해결하면서도 남부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차별의 역사, 혹은 역전(逆轉)된 폭력을 밀도 있게 묘사하기까지 했다.
실로 이 소설의 제목 <미시시피 미시시피>와 원제 에서 인종 갈등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원제의 '구부러진 글자(Crooked Letter)'는 알파벳 S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소설의 에피그라프에도 나와 있듯이 미시시피의 복잡한 철자를 외우는 남부 어린이들의 주술적 챈트에서 유래했다.
엠(M), 아이(I), 꼬부랑글자(S), 꼬부랑글자(S), 아이 (I)
꼬부랑글자 (S), 꼬부랑글자 (S), 아이 (I), 곱사등 (P), 곱사등 (P), 아이 (I)
꼬부랑글자는 S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이 "구부러진"이라는 단어는 미시시피의 비뚤어지고 뒤틀린 역사는 물론, 한 개인에게 가해진 부당한 억압을 의미하는 듯하다. 면화 농장으로 흑인들을 착취했던 남부는 세월이 흐르며 인종 융화 정책을 펴는 듯했으나 흑인과 백인은 여전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두고 각각 존재하고 있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에 나온 표현을 빌리면, 두 집단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상상으로밖에 알 수 없는 분리된 사회 속에 살고 있었다.
소설 속의 래리 오트, 백인 지주의 아들이었으나 마을에서 내쳐진 국외자와 사일러스, 흑인 경찰관이자 전 야구 영웅의 대조는 흔히 예상하는 지배하는 백인과 핍박받는 흑인의 구도와는 약간 다른 면이 있다. 차별은 일방향적이 아니라 양 방향적으로 서로 배척하며 세대를 이어서 학습된다.
흑인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여태까지 생각도 못 했던 재미있는 일이었다. 래리는 학군 재조정 이후로 계속 흑인 아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교회는 아직도 흑백을 분리했지만 학교는 그러지 않았다. 가끔 래리는 어른들이 자기들은 흑인들과 어울리지 않으면서 아이들은 왜 섞어놓는 건지 궁금했다. 2년 전, 샤봇 중학교로 전학 온 첫날 현관에서 백인 남학생 한 명이 뒤에서 다가와 "정글에 온 것을 환영한다." 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89쪽)
▲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래리는 결국 흑인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사일러스와 친구,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었으나 두 사람 사이의 틈은 개인의 인격과 노력으로 메우기에는 미시시피 강처럼 길고 넓었다. 천식이 있고 스티븐 킹의 소설을 좋아하는 래리는 흑인 다수의 학교에서 괴상하고 연약한 구성원으로 백인에게도 흑인에게도 따돌림 당한다. 유령의 집 행사에서 유령 역할을 해내지만 그가 가면을 들고 떠날 때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유일하게 사귀었던 친구 사일러스와는 부모 대의 역사로 인해 우정을 지속할 수도 없었고, 래리의 아버지인 칼은 냉혹하게도 두 사람의 싸움과 적대감을 부추긴다. 그리고 급기야 래리는 실패한 첫 데이트 상대인 신디 워커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동네에서 "괴물 래리"로 불리게 된다. 이처럼 차별과 소외는 인종, 계급, 개인 특성 등 중첩된 층위를 오가며 언제나 가장 약한 자를 노려서 괴물로 만든다.
<미시시피 미시시피>는 우리가 현실적이고 어쩔 도리가 없는 일면이라고 정당화하는 사회적 편견이 한 인간을 고독한 괴물로 만드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래리가 혐의를 받았을 때 진실을 아는 자를 포함, 아무도 그를 위해 변호해 주려 나서지 않았다. 오랜 세월, 그가 무성한 숲 속에 아무도 오지 않는 정비소를 열며 혼자 살고 있었을 때, 어떤 친구도 그를 방문해주지 않았다. 20년 후 티나 러더포드가 실종되었을 때, 모두 그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 폭력은 가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당하는 사람에게도 학습된다. 래리는 이 모든 고통을 그저 말없이 견딘다. 애초에 인간의 온기는 몰랐고, 원하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그러나 어느 날 또 다른 고독한 자의 방문으로 래리는 비로소 고독을 자각한다.
(…) 단식 이틀, 사흘째가 되면 허기로 인한 고통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고통의 기억으로 변하다가 나중에는 기억의 기억이 되었다. 음식을 다시 입에 넣을 때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배가 고픈지, 속이 얼마나 비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월리스의 방문으로 래리는 외로움도 일종의 단식이라는 것을, 그토록 오랫동안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초라하고 맛이 없는 음식이라도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자기 몸이 얼마나 먹을 것을 갈망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굶주리고 있으면서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323쪽)
치유란 말이 범람하기는 하지만, <미시시피 미시시피>는 이렇게 사회에서 내버려진 연약한 개인을 공동체 안으로 도로 불러들이는 과정을 통해 차별과 소외로 상처 입은 사회 자체를 치유하는 소설이다. 또,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서로 외면했던 두 남자가 자기들의 아픔을 딛고 서로 형제가 되어주는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사일러스는 래리가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를 외면했지만, 그에게도 어린 시절 래리의 엄마가 던진 낡은 외투가 남긴 상처가 있었다. 친구였던 래리에게서 "깜둥이"라는 말을 들었던 괴로운 기억이 있었다. 괴물은 자신들이 내던진 자가 아니라, 그를 내버린 자기 자신들임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치유와 성장이 이루어진다.
"잠깐만요." 프렌치가 가죽 벨트를 다시 채우기 시작하자 래리가 말했다. "우린 친구였어. 그렇지, 사일러스?"
<미시시피 미시시피>에 등장하는 두 건의 실종 사건은 래리와 사일러스의 개인적 수난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폭력의 이면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20년 전 사라진 신디 워커 실종의 진상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고, 현재 사라진 티나 러더포드가 어디에 있을지도 소설 중반 이후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두 사건이 고리로 연결될 때, 과거의 악행에 눈 감으면 그 사슬은 언제까지나 끊어지지 않고 계속 새로운 괴물과 새로운 희생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거(過去)가 현재로 반복되지 않고 진정으로 지나가는 건 오로지 옛 상처가 다 나았을 때뿐이라는 건 모두가 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Land)은 인간의 잘못을 덮는 나름의 방법을 갖고 있었다." 어떤 실수와 잘못은 이제 땅 속에 뼈와 함께 묻혀 찾아낼 수 없고, 그 위에는 무성히 풀만 자라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연이 덮은 잘못을 끄집어내어서 바로잡는 게 또 인간이다. 그저 친구가 갖고 싶었을 뿐인 한 소년을 기나긴 외로움에 몰아넣은 잘못, 우리 안의 괴물을 내버려 둔 잘못, 그렇게 혐오를 대물림해 온 잘못. 이 모든 잘못을 흙 속에 묻고 그 위에 숲을 만들어 모르는 척하고 싶어도 결국은 파내서 고백하기, 그게 바로 인간의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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