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에 출간된 알랭 바디우의 문제작 <세기>(박정태 옮김, 이학사 펴냄) 한글 번역본은 20세기의 끝에서 시작해 21세기의 시작에서 끝난 바디우의 강의(1998~2001)를 엮은 책이다. 이 강의는 파리에 있는 국제 철학 학교의 세미나인 동시에 파리 8대학 철학과의 대학원 강의였다.
바디우의 강의는 무척 흥미롭다. 플라톤의 전통을 고수하는 바디우는, 철학을 '말'의 지평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모든 글쓰기에 앞서 그 내용을 대중 앞에서 말한다. 바디우의 거의 모든 책은 어디선가 말한 것들이고, 이 말은 사유의 시험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강의는 지루하지 않다. 연극의 예찬자인 그는 항상 자신의 강의를 연출하며, 청중에게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나 역시 그의 강의를 들으면, 무척 어려운 연극 한편을 본 듯한 감흥에 사로잡히곤 했던 기억이 있다.
이 주제에 대한 강의가 한창이던 1999년 말에 나는 어떤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이 강의가 겨누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20세기를 말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짐작컨대, 오늘날 한국의 독자들 역시 이와 비슷한 의문으로 이 책을 펼칠 것이다.
▲ <세기>(알랭 바디우 지음, 박정태 옮김, 이학사 펴냄). ⓒ이학사
대다수 사람들이 기억하는 20세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전쟁과 냉전의 시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의 시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20세기 초에 시작하여 20세기 말에 끝이 난다. 모든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 해방 전쟁은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와 더불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역사로 널리 인정되었고, 자본주의의 궁극적 승리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승리로 간주되었다. 이제 사회주의와 나치즘은 인류에게 가해진 궁극적 범죄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의회민주주의와 그것을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신성불가침의 신화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세기의 끝에, 유럽의 모든 미디어와 보수 이데올로그들은 일제히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을 범죄적 결과를 초래한 위험한 이념으로 간주하면서, 혁명의 이념과 그 이념에 충실한 투사들을 비난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그들의 논거는 간단했다. '인류에 반하는 범죄가 있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구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의 눈을 기만하는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다.' 바디우는 바로 그 정세에 개입한다. 그는 혁명을 향한 정열을 이어가고, 세계를 변화시키려 하는 모든 이들을 흔들어 깨우고자 20세기의 위대한 사유들을 검토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20세기를 아주 독특한 시각으로 성찰한다. 예컨대 그는 사실의 질서에서 20세기를 조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유의 질서에서 20세기가 만들어냈던 독특한 주체성을 다시 사유한다. 여기서 '다시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사유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유가 종결된 어떤 것을 새롭게 사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공산주의의 세기이건, 전체주의의 세기이건, 아니면 자본주의의 승리로 결론지어지는 세기이건 그 구체적인 사태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20세기가 사유한 것이 어떤 주체성으로 표출되고, 어떤 주체적 실천으로 이어졌는가이다. 공산주의의 몰락과 나치즘의 악몽, 자본주의의 종국적 승리라는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난 세기의 실천적 주체성 또는 그 이념과 이념을 둘러싼 싸움을 오늘날 다시 사유함으로써 마침내 찾아온 무사유(無思惟)의 시대에 새로운 사유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바디우는 20세기가 사유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한다.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모든 열정을 예술과 정치에서 나타난 사유의 시도들 안에서 길어내어 그것을 냉정하게 다시-사유하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바디우에게 20세기는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으로 점철된 세기였다. 문제는 낡은 세계를 파괴하고, 세계를 완성시키는 데 있었다. 19세기의 사유가 약속했던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특히 마르크스의 해방된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니체의 초인(Uebermensch))은 20세기에 실현되어야 했다. 필요한 것은 단절이고, 모든 것은 이 단절의 이름으로 합리화된다. 전쟁과 살육의 잔혹성, 투쟁과 파괴의 격렬함은 새로운 세계와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다.
바로 이러한 열정,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전취하기 위한 열정을 바디우는 '실재에 대한 열정(passion du réel)'이라고 부른다. '실재에 대한 열정'은 <세기>를 관통하고 있는 열쇠 개념으로서, 존재하지도 않고, 말로 할 수도 없는 어떤 것, 비일관적이고 명명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서의 실재에 가닿으려는 20세기의 주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바디우는 이 개념을 통해 20세기의 독특한 정치적·예술적 시도들을 다시 사유한다. 스탈린의 '숙청'은 단순히 범죄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숙청이 보여준 극단적 정화의 모습 뒤에는 실재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다시 말해 그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것을 참칭하는 의심스러운 유사물(가장假裝, semblant)을 제거하려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재에의 열정이 단순히 정치의 과정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의 모든 위대한 예술은 이 실재를 드러내기 위한 열정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부터 말레비치의 기하학적 추상화,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위대한 예술은 낡은 것들과 단절하고 새로운 인간과 세계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시도로 점철되어 있다.
▲ 철학자 알랭 바디우. ⓒSiren-Com
그렇게 20세기의 예술은 정치와 만났고,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와 연동되었다. 예컨대 그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의 낡은 것들과 단절하여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기. 실재를 전취하기.
이러한 시도들은 실패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모든 혁명적 시도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모든 인간을 동물적 인간으로 만들려는 가장 저급한 사유에 지배당하고 있다. 바디우에게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여 혁명적 사유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세기>는 바로 그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우리는 20세기의 실패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새로운 세계의 전망을 새롭게 검토하기 위해, 20세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승리하기 위해, 바디우는 20세기의 사유들을 다시 사유한다. 모든 자본주의 이데올로그와 여론을 조직하는 미디어가 강요하는 것과는 달리, 그 사유는 끝나지 않았다. 종결을 넘어 새로운 사유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지난 세기에 대한 성찰이다. 바디우는 자신의 성찰 속에서 우리가 충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버리고 가야할 것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말해주고 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역시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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