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초콜릿 먹고 숨진 여인-살인 동기도, 범인도 6명?
독 초콜릿 먹고 숨진 여인-살인 동기도, 범인도 6명?
[윤영천의 '하우, 미스터리'] 앤서니 버클리 콕스의 <독 초콜릿 사건>
독 초콜릿 먹고 숨진 여인-살인 동기도, 범인도 6명?
1. 
1930년, 한 무리의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모임을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저녁을 함께하며 담소를 나눴다. 집필 중인 작품에 대한 고민, 출판사나 관계자에 대한 점잖은 뒷말, 주목받는 작가나 작품에 대한 비평 등 다양한 얘기들이 오갔다. 작은 규모로 조용하게 운영되는 모임이었기에 가입 절차는 꽤 까다로웠다. 반드시 기존 회원 두 명의 추천이 필요했으며 전체 회원의 승인이 있어야만 가입할 수 있었다. 최종 단계로 회장과 회원들 앞에서 '서약식'도 거쳐야 했다. 작가로서 정정당당한 품위를 지킬 것을 맹세하고, 작품이 부디 잘되길 바란다는 축복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모임의 정식 회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이 모임은 '추리 클럽(Detection Club)'으로, 황금기를 아름답게 수놓은 영국 미스터리의 거장들이 대거 회원으로 참여했다. G. K. 체스터튼, 애거서 크리스티, 도로시 L. 세이어스, 앤서니 버클리 콕스, 로널드 녹스, F. W. 크로포츠, 아서 모리슨, H. C. 베일리, 엠마 오르치, 오스틴 프리먼 등이 한자리에 모여 얘기를 나누다니, 상상만으로도 황홀해지는 그림이다. 

초대 회장은 풍채 좋은 G. K. 체스터튼이 맡았고, '클럽 최초의 미국인'이라는 영예는 존 딕슨 카가 차지했다. 추리 클럽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여덟 번째 회장 사이먼 브렛(Simon Brett)이 15년째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2. 

▲ <독 초콜릿 사건>(앤서니 버클리 콕스 지음, 손정원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동서문화사

황금기 미스터리의 형식적 틀을 제시한 '추리 클럽'의 창립자는 다름 아닌 앤서니 버클리 콕스였다. 그는 마치 이 모임의 탄생을 의도한 듯 1929년, 범죄 연구회 회원들이 각자의 추리를 펼치는 <독 초콜릿 사건>(앤서니 버클리 콕스 지음, 손정원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을 발표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대가들에 비해 앤서니 버클리 콕스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925년 아마추어 탐정 로저 셰링엄(Roger Sheringham)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The Layton Court Mystery』를 발표한 이래 15년 동안, '앤서니 버클리'와 '프랜시스 아일즈'(악명 높은 밀수꾼의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라는 두 개의 필명으로 활동했다. 장·단편을 포함해 서른 편 남짓한 작품을 써냈으며 기발하고 신선한 작풍으로 미스터리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앤서니 버클리 콕스는 저널리스트였다. 그의 작품 속에 종종 등장하는 <데일리 텔레그래프>지의 기자였고, 냉소적인 유머와 기발한 풍자로 유명했던 잡지 <펀치>에 'A. B. 콕스'라는 필명으로 개성 넘치는 글을 기고하곤 했다. 타고난 성품인지, 저널리스트 특유의 태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확실히 반골 기질을 지닌 작가였다. 

앤서니 버클리 콕스는 당시 온갖 규칙으로 뒤덮인 미스터리를 분석적이면서도 냉소적으로 바라봤다. 그동안 간과돼왔던 '심리적 요소'를 중요시했으며,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장르를 비틀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3. 
1925년에 발표한 단편 '복수의 기회(The Avenging Chance)'를 장편으로 매만진 <독 초콜릿 사건>은 앤서니 버클리 콕스가 어떤 재능을 가진 작가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건-탐정의 개입-해결'이라는 기존의 단선적인 구조를 훌쩍 뛰어넘은 이 작품은 대략 이렇게 시작된다.

상류층 전용 클럽인 레인보우 클럽에 그레엄 벤딕스가 들어선다. 그는 우편물 몇 통을 찾아들고 읽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뒤이어 난봉꾼으로 소문난 유스티스 경이 역시 우편물을 찾아들고 자리를 잡는다. 유스티스 경에게는 뜻밖의 소포가 와 있었다. '메이슨 부자 상회'에서 보낸 초콜릿인 듯했고, 미식가들에게 품평을 듣고 싶다는 친절한 메시지도 동봉돼 있었다. 

이를 가소롭게 여긴 유스티스 경은 초콜릿을 버리려 했지만, 마침 벤딕스가 아내와의 내기에 져 초콜릿을 사가야 한다며 그것을 받아 간다. 이후 클럽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낸 벤딕스는 점심시간 즈음에서 초콜릿을 들고 집으로 향한다. 

초콜릿을 함께 먹은 벤딕스 내외는 혀가 타는 듯한 강한 맛에 깜짝 놀란다. 어지러움을 느끼며 클럽으로 돌아온 벤딕스는 유스티스 경 앞에서 혼절하고, 그보다 더 많은 초콜릿을 먹은 벤딕스 부인은 사망한다. 초콜릿 안에는 니트로벤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포장지 같은 사소한 것들을 빼면 어떠한 증거도 없는 상황. 범인이 누구를 죽이려 했는지 짐작하기도 애매한 사건이다. 사건을 담당한 모리스비 경감은 '범죄 연구회'의 회장인 로저 셰링엄에게 비공식적으로 사건을 의뢰한다. 

범죄학에 탁월한 지식을 가진 이들이 모인, 시험으로 회원을 선출하는, 13명이 정원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6명만 합격한, 거룩한 '범죄 연구회'의 회장인 로저 셰링엄은 한없는 자부심을 느끼며 회원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당연히 모두 만장일치로 찬성.

저명한 형사 변호사 찰스 와일드먼, 뛰어난 극작가 필더 플레밍, 범죄학에 대한 지식이 탁월한 미스터리 작가 필명 핼로게이트 블래드리, 여류 소설가 엘리어스 더머즈, 아마추어 애호가 앰블러즈 치터윅, 그리고 회장 로저 셰링엄. 여섯 명의 회원들은 순서를 정하고, 나름의 조사를 마친 후에 각자 추론을 펼친다.

▲ <독 초콜릿 사건>의 출간 초기 광고 전단지.


4. 
여섯 명이 지목한 범인은 모두 다르다. 각각 주목한 동기가 다르고 적용한 추론 방법 또한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신기한 건, 여섯 가지 추론이 모두 그럴 듯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더욱 신기한 건, 여섯 가지 추론을 아우른 하나의 정답을 작가가 따로 준비해놓았다는 점이다. 

정답이 하나인 문제나 정답이 여러 개로 해석될 수 있는 문제를 내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정답이 없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앤서니 버클리 콕스는 평범한 미스터리 작품을 쓰는 것보다 다섯 배 정도 어려워 보이는 이 까다로운 작업을 매끄럽게 해낸다. 

미스터리가 하나의 게임이고, 문제와 정답으로 구성돼 있다면 당연히 정답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보통 작가가 잘못된 해석을 의도하기도 하지만, 전혀 의도하지 않는 정답을 내미는 노련한 독자들도 있다. '미스터리 소설에서 절대적인 하나의 정답은 가능한가?'라는 주제는 한참 후에 거론된다. 황금기의 한복판에 선 1930년대 작가가 그 난감한 주제를 톡톡 건드리며 씩 웃고 있다. <독 초콜릿 사건>은 '천재적'이라는 말 외에 다른 수식어를 찾기는 어려울 듯하다. 

수수께끼와 그 해결에만 집중한 미스터리 작품은 계속해서 희석과 확산을 반복한다. 세계 대전이라는 어쩔 수 없는 사건도 있었고, 하드보일드라는 다소 과격한 반발도 있었다. 앤서니 버클리 콕스는 '수수께끼와 그 해결'이라는 미스터리의 정수는 잊지 않으면서, 퍼즐 놀이의 나락에 떨어지는 작품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낸다. 미스터리 구조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시선과, 유난히 강조했던 '심리적 요소'들은 굳어버린 당대의 미스터리에 현대성을 부여했고, 장르의 정수를 간직한 작품들이 후대로 부드럽게 수평 이동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함께 읽어볼 만한 작품들

▲ <두 번째 총성>(앤서니 버클리 지음, 윤혜영 옮김, 크롭써클 펴냄). ⓒ크롭써클

-<두 번째 총성>(앤서니 버클리 지음, 윤혜영 옮김, 크롭써클 펴냄)
<독 초콜릿 사건> 이듬해 발간된 작품으로, 수수께끼 해결보다 심리적인 면을 중시하는 앤서니 버클리 콕스의 신념이 더욱 도드라진 작품이다. 유명한 탐정소설 작가의 별장에 모인 사람들이 살인 연극을 기획하고 피해자 역할을 맡은 사람이 실제 시체로 발견된다. 제한적인 1인칭 시점, 두 발의 총성 사이에 숨겨진 비밀. 반전에 반전을 더하는 결말이 백미이다. 

-<시행착오>(앤서니 버클리 콕스 지음, 황종호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토드 헌터는 어느 날 주치의로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죽음에 대해 진지한 고민에 빠진 그는 남은 시간에 가치 있는 행동을 하고자, 사회에 해가 되는 인물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경찰은 엉뚱한 사람을 체포하고, 토드 헌터는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 자신을 고발하게 되는데……. 앤서니 버클리 콕스 특유의 유쾌한 설정이 살아 있는 작품.

-<살의>(프랜시스 아일즈 지음, 유영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흔히 세계 3대 도서 추리소설로 꼽히는 작품이다. 도서 추리소설은 범인과 범죄의 전모를 독자 앞에 드러내고 '어떻게'에 집중하는 형식의 미스터리이다. 프랜시스 아일즈는 '방법'보다는 범죄자의 '심리'에 더 집중한다. <살의>는 치밀하고 꼼꼼한 묘사를 통해 인간 내부의 본성을 고발하는 심리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eon@pressian.com 다른 글 보기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