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인정한 '위안부' 피해, 1965년 배상 끝났다?
1992년 인정한 '위안부' 피해, 1965년 배상 끝났다?
['일본군 위안부' 논쟁·③] 일본 식민지배 청산하지 못한 한일협정의 한계
2014.07.09 07:25:57
1992년 인정한 '위안부' 피해, 1965년 배상 끝났다?
세종대학교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로 촉발된 일본군 '위안부' 논쟁은 사실 새롭게 부각된 사안은 아니다.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김학순 씨의 증언 이후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주요 현안이었다. 이후 23년이 지난 2014년 현재에도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양국 간 첨예한 갈등 사안으로 남아 있다. 

위안부 문제가 처음 제기된 지 2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여전히 이 문제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시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프레시안>은 '일본군 위안부 논쟁' 세 번째 순서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그 한계점을 짚어봤다. 법적 책임과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에서 한일 간 주장이 엇갈리는 이유와 그 원인을 통해 향후 위안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 평화비 ⓒ연합뉴스


배상과 보상의 차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비롯한 지원 단체들은 일본군 위안부의 범죄를 인정하고 진상을 규명하며 일본 국회 결의를 통한 사죄, 법적 배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피해자들이 '보상'이 아닌 '배상'을 요구하는 이유는 두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배상'은 국가가 잘못한 상태에서 그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상'이라는 것은 국가의 잘못이 없는 상황이어도 손해를 본 국민에게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해자들과 지원 단체는 위안부 문제가 '일본'국가의 잘못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른 배상을 원하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 증언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는 일본 정부가 국가 차원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간 체결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이하 기본조약)과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협정)을 거론하며 이들에 대한 배상은 종결된 문제라고 주장한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 1965년 협정으로 '끝난' 문제인가 

1965년 체결한 협정의 제2조 3항에는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고 명시돼있다. 일본 정부는 이 조항을 들어 위안부 문제는 이 협정으로 이미 '끝난' 사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김창록 교수는 "일본 측이 1992년에야 인정한 '위안부' 피해가 1965년에 해결됐다는 것은 '넌센스'"라면서 "'위안부' 피해는 애당초 '청구권협정'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한국 측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즉, 협정을 체결했을 당시 양국이 합의했던 청구권 대상에 위안부 피해자들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는 협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협정으로 소멸된 청구권은 국가 자신의 권리와 국민의 권리에 대해 국가가 가지고 있는 '외교보호권'뿐이며, 국민 개인의 권리는 소멸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 일본은 협정 체결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일본의 이 주장을 받아들이면, 위안부 피해자들은 개인으로서 일본에 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이후 자신들이 청구권을 인정할 법적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법적 의무'라는 논리를 들고 나온 계기에 대해 김 교수는 "200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에 의해 강제 노동을 당했던 유대인 피해자들이 2010년까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헤이든 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청구권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시효'문제다. 이미 시효가 지나버렸다면 소송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캘리포니아주 의회에서 시효를 연장하는 결정이 나온 것이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해 개인의 청구권을 막을 수 있는 다른 논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일본은 개인이 청구권을 가지고는 있으나 그를 인정할 법적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이에 대한 근거는 부족한 상황이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포함해 식민 지배 책임 문제가 1965년 협정으로 이미 '해결된'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법적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협정에서 해결된 문제가 무엇인지는 나와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 정부가 협정에서 청구권과 관련해 '식민 지배에 기인하는 것에 관해서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라고 명시했다면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로 개인이 청구권을 사용해도 일본이 이를 인정할 법적 의무가 없어질 수 있다. 하지만 협정 어디에도 이러한 표현은 없다. 

협정에 이같은 표현을 쓰지 않은 이유는 식민 지배를 바라보는 일본의 시각에서 기인한다. 만일 협정에 '식민 지배에 의한 청구권'이라는 표현이 들어갔다면, 이는 곧 식민 지배로 인해 개인이 피해를 봤고 이에 대해 개인이 국가에 보상이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일본이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으로, 한반도의 일제 식민 지배가 합법이었다는 일본 정부의 기본적인 관점과 어긋난다.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던 '1965년 체제'

1965년 협정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성격 규정의 차이가 어설프게 봉합된 협정이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는 불법이고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한국과 그렇지 않다는 일본이 맞서면서 일제 식민 역사에 대한 '과거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한계점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 협정과 더불어 국교 정상화를 위한 기본조약이 체결됐는데 이 조약의 해석을 놓고도 한일 양국은 첨예한 입장 차를 보였다. 

한일 양국은 기본조약 2조에서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고 합의했다. 1910년 8월 22일은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날로, 조약문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한일병합조약을 비롯해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예를 들어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의미다. 한국은 이 조약에 따라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애당초 무효였고, 따라서 35년 동안 일본의 지배는 '불법 강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의 해석은 이와 달랐다. 일본은 영어로 된 조약문의 'already'를 강조하며, 이 조약문의 뜻을 '현재(1965년)의 시점에서 이미 무효가 되어 있다고 하는 객관적인 사실을 서술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한일병합조약이 1948년 8월 15일, 즉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까지는 실효했다고 해석했다. 또 병합조약 이전에 체결된 조약들도 각각의 조약에 규정된 조건의 성취 또는 병합조약의 발효와 함께 실효했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이같은 주장은 35년 동안의 식민 지배가 '합법'이었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 식민지 지배의 법적 근거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인데, 만일 이 조약을 '원래부터 무효였다'라고 규정하면 일본이 35년 동안 한반도에서 시행했던 입법, 행정, 사법, 경찰권 등 모든 권한의 법적인 근거가 사라지게 되고 일본은 한국의 주장처럼 한반도를 '불법 강점'한 것이 된다. 

이러한 양측의 인식 차이는 1965년 협정 체결 결과로 일본이 한국에 전달한 '협정자금'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한국은 일본이 무상으로 전달한 3억 달러의 협정자금에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의 성격이 있다고 규정했다. 김창록 교수의 논문 '한일 과거청산의 법적 구조' 에는 1965년 8월 당시 장기영 경제기획원장관이 "3억 불은 배상이다. 실질적으로 배상"이라고 발언했다고 서술돼있다. 

하지만 일본은 이 금액을 '배상금'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일본이 이를 배상금으로 규정할 경우 자신들의 식민 지배가 불법적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상'으로 건네준 3억 달러를 '경제협력'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 교수는 위 논문에서 "그래서 일본 정부가 동원한 논리가 '독립축하금'"이었다고 설명한다. 

결국 1965년 기본조약과 협정은 한일 양국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해 어떠한 부분도 합의하지 못하며 과거 청산을 하지 못한,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조약·협정이었다. 김 교수는 논문에서 기본조약과 협정에 대해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대해 어떤 합의도 도출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청구권 해결의 성격도 애매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청구권 협정의 해결 대상이 법적으로는 '영토의 분리·분할에서 오는 재정상 및 민사상의 청구권'이라는 데는 합의를 봤지만, 그것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합의가 도출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결과적으로 한일 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과거 청산은 청구권 문제에서도 논란의 여지를 만들었고, 이는 고스란히 식민지 시대 일제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고통으로 되돌아갔다. 

제대로 과거 청산하지 못한 이유, 미국에도 있다? 

한국 정부가 1965년 협정에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제대로 된 책임추궁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대학교 한상일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2010년 출간된 <의제로 본 한일회담>(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지음, 선인 펴냄) 에 수록된 논문 '제5차 한일회담과 청구권 문제'에서 한국 정부가 확실한 원칙과 전략 없이 청구권 문제 해결을 서둘렀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일본에 대한 책임 추궁이 힘들어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논문에서 1960년 제5차 한일회담을 했을 당시 민주당 정권이 "경제적 안정을 이룩하고 경제개발정책을 조기에 실시하기 위하여 일본의 자금과 기술을 끌어들인다는 데 급급하여 청구권 문제의 해결을 서둘렀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조는 5.16쿠데타 이후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추궁이 힘들어진 것을 단지 한국 정부의 문제만으로 돌리기 힘든 국제정치적인 상황도 있다.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당시 미국의 국제질서 전략에 의해 일본의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45년 패전 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상을 통해 주권을 회복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전범국으로서 일본이 저지른 행위들에 대한 명확한 청산은 이뤄지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상은 두 가지 조약을 탄생시켰고 '샌프란시스코 체제'라는 전후질서를 만들어냈다. 협상이 만들어낸 조약으로 우선 2차대전 때 맞서 싸웠던 일본과 48개 '연합국' 간에 맺어진 다자간 평화조약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미국과 일본 양자 간 안보조약인데,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미국에 "일본 및 인근 지역에 군사력을 보유할"권리를 허용했으며,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하고 촉구했다.

▲ 지난해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기념일에 참석한 아베 총리가 일왕 내외에 인사를 표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날 행사를 정부 주관으로 치렀다. ⓒAP=연합뉴스


하지만 이 조약 어디에도 일본의 식민 지배 책임을 묻는 조항은 없었다. 이는 미국의 냉전 전략에서 찾을 수 있는데, 미국은 일본을 '대(對)소련, 대(對)중국 봉쇄'라는 자신들의 전략을 이행하는 '하위 협력자'로 만들기 위해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 추궁 없이 일본을 주권국가로 탈바꿈시켰다. 게다가 이 조약을 체결하는 협상 과정에서 일본 식민 지배의 최대 피해자였던 한국과 중국은 배제시켰다. 

전후질서를 만든 첫 단계에서부터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은 일본은 과거사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문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저명한 일본 역사학자인 존 W. 다우어 MIT 명예교수는 지난 2013년 발표한 '샌프란시스코 체제: 미-일-중 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에서 이렇게 만들어진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일본과 다른 편의 중국 및 한국을 서로 멀어지게"했다며 이것이 가져온 장기적 결과는 매우 유해했다고 평가했다.(☞ 관련 기사 보기 : 동아시아의 불화, 그 근원은 미국

다우어 교수는 "2차 대전 후 유럽에서의 서독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들과 화해하거나 지역공동체를 이룩할 수 없었다. 평화 만들기가 지연됐던 것"이라며 "(일본의) 제국주의와 침략, 그리고 착취가 낳은 쓰라린 상처와 뼈아픈 유산들은 곪아 터질 때까지 방치됐다"고 분석했다. 

다우어 교수의 진단대로 시작부터 뒤틀려버린 '샌프란시스코 체제' 이후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본의 식민 지배 책임은 어디에서도 제대로 규명되거나 청산되지 않았다. 이는 이후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요원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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