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수능' 대신 수능 변별력 확보? 그 입 다물라!
'물수능' 대신 수능 변별력 확보? 그 입 다물라!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39> '물수능' 비판의 위험성과 민주주의 시대의 교육
2015.03.19 07:29:18
'물수능' 대신 수능 변별력 확보? 그 입 다물라!
갑을 관계에서 대개 갑은 돈을 주는 자, 을은 돈을 받는 자이다. 그런데 필자가 아는 예외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출판계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이다. 계약서에 갑, 을을 명시하던 시절 출판계약서의 갑은 저자, 을은 출판사였다. 이는 저작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관행이었지만, 실질적인 역관계가 그 관행과 일치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명시적인 규정은 없었으나 돈을 내는 학생이 돈을 받는 대학과 교수에 대해 철저한 을인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상 학생들로부터 월급을 받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슈퍼 갑으로 군림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교육의 전통적 특수성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대 한국 교육의 문제점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현상이다.

역사를 주제별로 분류할 때 교육사는 흔히 정치사와 함께 묶인다. 역사 속에서 교육은 한 사회의 지배 질서를 뒷받침하는 지식과 사상을 주입하고 그 질서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할 인재를 길러내는 일이었다. 따라서 한 시대의 주된 교과목만 봐도 그 시대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고대에는 귀족, 조선 시대에는 양반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현대 한국을 민주주의 사회라고 본다면 교육은 당연히 모든 기득권을 해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국의 교육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10퍼센트 정도 됐다는 조선 시대의 양반보다도 훨씬 더 낮은 비율의 기득권층을 수호하고 재생산하는 데 모든 목표가 맞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이른바 '물수능'에 대한 비판은 교육이 기득권을 수호하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사진은 2014년 11월 16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대성학원 주최로 열린 2015학년도 대학 입학 설명회를 찾은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이 주최 측에서 배부하는 배치표와 책자를 받기 위해 줄지어 선 모습. ⓒ연합뉴스



'물수능' 비판 논리의 위험성

지난해 수능이 출제 오류와 지나치게 쉬운 문제라는 두 가지 사항을 지적받으면서 그러잖아도 일정에 올라 있던 대학 구조 개편과 맞물려 수술대에 올라가 있다. 수십만 명의 운명이 걸려 있는 수능에서 잘못된 문제를 출제한다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부 과목을 '지나치게' 쉽게 출제해 변별력을 상실했다는 비판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잘 알다시피 정권을 막론하고 입시 정책의 기본 기조는 '쉬운 수능'이다. 수능 자체가 '수학 능력 시험', 즉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다. 수능을 쉽게 출제해야 공교육이 정상화되고 고질적인 사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단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그러나 막상 수능을 쉽게 출제하거나 쉬운 수능을 정착시키려고 하면 사방에서 벌떼 같이 달려들어 교육 당국을 물어뜯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그들이 사실은 전 국민의 1퍼센트 남짓에 불과한데도 '벌떼'라는 표현처럼 많고 막강하다는 느낌을 준다는 데 있다.

'변별력(辨別力)'은 그리 쉬운 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시대의 유행어가 되어 버렸다. 특히 지난해 수능이 '물수능'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더욱 애용되었다. 수능이 변별력을 잃었다는 비판의 핵심은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남과 똑같은 점수를 받거나 실수로 오히려 더 낮은 점수를 받아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할 기회를 빼앗길 위기에 놓인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어린 학생들에게 '내가 친구보다 더 많이 공부했는데 그 친구와 똑같은 점수를 받으면 억울해' 하도록 가르친다는 것이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이라는 관점에서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교육은,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은, 그런 식의 살벌한 경쟁의식을 조장하는 것보다는 공동의 성취를 위해 서로 돕고 함께 나아가도록 가르치는 데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런 '억울함'이 대학 서열화라는 살벌한 현실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물수능'에 대한 비판은 교육이 기득권을 수호하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와 직결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60만 명이 넘는 수험생 가운데 1퍼센트 남짓에 불과한 소수 학생을 둘러싼 학부모, 학교, 사교육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논리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런 비판이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보수 일간지들뿐 아니라 야권 성향의 일간지에서조차 제기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부가 하는 일은 우선 비판부터 하고 보는 것이 야권의 임무라고 생각한 게 아니라면, 정치적 성향을 떠나 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유수의 '명문 대학'을 나와야 가능한 기득권층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일까?

현실에서 수능이 쉽게 출제되어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남보다 공부를 더 게을리 한 학생이 아니라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한 학생이다. '물수능'의 피해자로 예시되는 사람은 대개 우리가 그토록 극복하려는 '비정상적' 교육 현실에 노출되었던 학생일 것이다. 그렇게 돈과 코피를 쏟아 부어 가며 정상적인 조건이라면 감당키 어려운 노력을 했는데 달랑 한 문제 때문에 인생이 파탄 나다니! 이 얼마나 비극인가? 이 얼마나 코미디인가?

ⓒ개마고원

쉬운 수능 기조가 이어지면서 약간의 차등을 두고 분류되던 대학들끼리 '입결'(입시 결과)의 차이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줄어들었다. 문제가 비교적 어려웠던 과거 학력고사 시절에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으로 여겨지던 대학과 대학의 차이가 '한 끗' 차이로 사실상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아이들에게 각인시킨 저주받은 서열 의식은 그들에게 평등의식보다는 질시와 열등감을 심어 주고 있다. '내가 한 문제만 더 맞혔어도 저 대학에 다니는 건데!' 오죽하면 요즘 대학생의 의식 세계를 조사해 출판한 오찬호가 그 책의 제목을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으로 붙였을까?

오랫동안 사교육에 종사해 온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현실의 입시 틀을 그냥 놔둔다고 했을 때 사교육의 폐해를 줄이는 차선의 방법은 매년 입시 제도를 바꾸는 것이라고. 깜짝 놀랄,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을 얘기다. 그런데 그의 말로는 역사적으로 입시 제도에 큰 변동이 있을 때 사교육의 영향이 최소화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제도로 2, 3년만 시행하면 사교육은 완전히 적응해 입시의 강자 지위를 되찾는다고 한다.

필자는 그의 말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 경험으로 볼 때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 자신이 5공 세력에 의해 대입 본고사가 없어지고 대학 정원이 늘어나고 과외가 전면 금지되던 '대변동'의 틈을 타 지방에서 사교육 한 번 받지 않고 대학에, 그것도 남들이 괜찮다고 하는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전두환 타도 시위'를 하면서도 전두환이 아니었더라면 과연 내가 여기 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입시 제도를 매년 바꿔야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독재와 같은 수단으로 입시를 확 뒤집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러나 보수 정권이든, 진보 정권이든 쉬운 수능이라는 기조는 교육 개혁을 위한 최소한의 국가적 과제이고, 여기에 딴죽을 거는 논리는 보수든 진보든 아이들을 죽음의 경쟁으로 몰고 가는 교육 제도 편에 서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쉬운 수능은 대학 서열화를 현실의 발밑에서 허물어뜨리는 최소한의 무기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은 교육은 '차별'의 교육이 아니라 '차이'의 교육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교육은 정말 역사에서 참고할 것이 없다. 수천 년에 걸친 교육의 역사 자체가 차별화와 배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신분제를 철폐하고 군주 독재를 민주주의로 바꿔 놓은 현대 사회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의 교육이 판을 치고 '차이'의 교육으로 바뀌지 않고 있다는 것은 민주 시민으로서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독재 정권 시기에는 국가가 나서서 중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서열을 강요했다면, 1989년 과외 금지가 해제된 이래 서열화의 주범은 시장으로 바뀌었다. 독재에 반대하고 자유를 염원하던 386세대는 학부모가 되자 '홍익인간'의 이념은 멀찌감치 내팽개치고 자기 자식만을 위한 '자유로운' 교육에 매진했다. 교육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혐오하면서 돈이 얼마가 들어가든 대입 합격을 장담하는 변종 명문고 입시에, 사교육 시장에, 자신과 자식들을 내던졌다. 그 결과 2010년대 중반의 교육 현실은 1980년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

결국 그들이 추구하던 자유는 시장의 자유였다. 그러나 단언컨대 시장 논리에 맡겨서는 안 될 단 하나의 분야를 꼽으라면 그것이 바로 교육이다. 가끔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국민의 국가이다. 이 국민의 국가는 제대로 작동하기만 하면 5공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바로 그 국민의 국가가 나서서 교육을 살려야 한다.

쉬운 수능을 포함해 국민이 합의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학 서열화를 파괴하고 중등 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을 받기 위해 돈을 내는 학생(갑!)이 그 돈을 받고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학들(을!) 가운데 자기 소양을 제대로 키워줄 수 있는 곳을 고를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시대 교육의 기본 요건이다.

만약 지금의 기성세대가 교육 개혁에 실패한다면 다음 세대는 두 가지 방향에서 복수에 나설 것이 틀림없다. 하나는 기성세대보다 훨씬 더 차별을 당연시하고 악용하는 괴물이 되는 것으로, 또 하나는 그런 차별을 더 이상 용인하지 못하는 다수가 뭉쳐 기성세대가 쌓아 올린 바벨탑을 일거에 허물어버리는 혁명에 나서는 것으로.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역사에 비추어 오늘을 살피는 기획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의 의미를 새겨 보았으나 새해부터는 현대 한국 사회의 현안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되새겨 볼 예정이다. 필자는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사 오디세이


pedagogy@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