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이 좋은 텃밭'을 시작한 건 5년 전이다. 서울 생활을 접고 아내 회사가 있는 경기도 파주 심학산 근처로 이사한 게 계기가 됐다. 처음엔 아이들이 엄마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하루 두 시간 이상 늘어난다는 점과 더불어 자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겠다는 기대가 컸다. 그런데 가 보니, 자연 말고도 우리 가족을 기다리는 게 있었다. 텃밭이었다! 10분 거리의 아내 회사를 오가는 길에 매일 논과 밭을 보며 지나치다가 내 안에 있던 경작본능이 깨어난 것이다. 주말농장을 임대해 아이들과 함께 밭을 일구면, 그냥 숲을 다니는 것보다 좋을 거라는 생각도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겨울을 나고 드디어 봄. 기대한 대로다! 다섯 살, 세 살 두 아이는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농기구를 들고 땅을 팠다. 심는다기보다 쏟아 붓는 수준이었지만, 씨앗도 뿌리고 모종을 정성껏 심기도 했다. 나 역시 아이들이 흙투성이가 되어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좋은 시절은 딱 5월까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은 차에서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어치우고 나면 집에 가자고 성화를 부렸다. 나중엔 아예 주말농장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워 혼자 다녀온 적도 여러 번이었다. 왜 갑자기 이 좋은 걸 거부할까? 문제점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대와 달리 텃밭은 아이들 지내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 날씨가 그랬다. 6월이 되자 급격히 더워졌다. 비도 자주 내렸다. 각종 풀이 빠르게 자라며 '여백'을 메워버렸을 뿐만 아니라, 축축했고 온갖 벌레가 들끓었다. 잔디가 깔리고 정원수가 단정하게 자란 공원에서 노는 게 익숙했던 아이들에게 텃밭은 정글이었던 셈이다.

우리 집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주말농장 초기에는 그래도 꽤 보이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텃밭에 온 아이들도 무표정했다. 어린아이들은 과자를 달고 있었고, 조금 큰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카드게임을 하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7, 8월이 되자 젊은 엄마 아빠들도 하나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한여름의 풀과 벌레는 어른에게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완주해서 다행이야
아이들도 싫어하고 농사도 시원치 않고…. 그나마 다른 가족에 비해 나은 게 두 가지 있었다. 아내가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 덕에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했다는 것. 봄 감자부터 시작해 가을 무와 배추까지 한 바퀴 돌고 나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가족과 함께하려는 목적이라면 아이들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텃밭은 놀이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저마다 텃밭 일구는 목적이 다르겠지만, 아이를 위해 텃밭을 시작한 아빠로서는 필연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수확에 신경을 쓰면 할 일이 많아지고, 놀아달라고 하는 아이들은 텃밭의 해충처럼 골치 아픈 존재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이때까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러다 만난 게 파주도시농부학교에서 연 '텃밭 지도사 아카데미'였다. 생태적인 농사법과 더불어 아이들과 함께 텃밭 가꾸는 법을 배우는 게 프로그램의 주 내용이었다. 당시 고민과도 맞아떨어져 나름으로 열심히 들었는데, 수료한 후에는 국내 처음으로 어린농부학교를 기획해 팀장으로서 1년간 운영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식과 경험을 쌓은 후 작년에는 한 해 동안 매주 거르지 않고, 아내와 은지, 민수 두 아이와 함께 텃밭에서 지냈다.
사랑은 이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내 배가 불러야 남의 배도 부르듯 사랑을 충분히 받은 아이가 사랑을 베풀 줄도 아는 것이다. 텃밭에서도 그렇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고 느낄 때, 그러니까 더 이상 부모의 사랑을 갈구할 필요가 없을 때 주변(텃밭)으로 눈을 돌린다. 내가 작년에 첫 번째로 한 것은 텃밭에 도착해서도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찾는 대신 호미로 땅을 파고 봄나물도 캐며 오랜만에 만난 텃밭과 인사를 나눴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 스스로 밭 주변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첫째가 먼저 가지치기한 복분자 가지를 밭에 심었다. 차에서 꺼낸 우산을 땅에 꽂은 후 모자를 씌워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그 모습을 둘째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밭 한쪽에 쌓아놓은 뽕나무 가지를 가져다 똑같이 만들었다. 우산 허수아비 옆에 복분자 가지와 뽕나무 가지가 나란히 심어졌다.
"다음 주에 또 오자" 그다음, 첫째가 밭에서 발견한 놀이는 미술놀이였다. 밭에 제법 굵은 나무가 굴러다니고 있었는데, 그걸 들고 오더니 덤불을 태우고 남은 재를 묻히기 시작했다. 재가 잘 묻지 않자 물을 부어 갠 후 손바닥으로 칠을 했다. 손바닥이 새까매졌는데, 그걸 또 일부러 얼굴에 묻히고 봐달라며 헤 웃었다.
그 사이 둘째는 곰보배추를 캐는 엄마를 따라다녔다. 잎이 딱 곰보가 난 것처럼 생긴 곰보배추는 기관지와 폐 관련 질병에 특효가 있는 천연 항생제로 알려진 풀이다. 함께 텃밭을 일구는 이웃들이 아내에게 설명해주는 걸 둘째가 귀담아들은 모양이었다. 어느 틈엔가 뿌리째 뽑은 곰보배추 하나를 가져다 씻는가 싶더니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무슨 맛일까 싶어 나도 잎 하나를 얻어 먹어봤는데, 비릿한 맛도 맛이지만 흙이 가득 씹혔다. 틀림없이 둘째 입에도 흙이 씹힐 텐데 맛있다는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잘됐다' 싶어, 이번엔 내가 먼저 작년에 심어두었던 도라지를 두 뿌리 캐다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좋아하며 씻으러 갔다. 껍질을 벗기지 않은 생도라지는 어른도 먹기 힘든데, 이 녀석은 온갖 인상을 다 쓰면서도 참고 결국 다 씹어 삼켰다.
점심으로 닭백숙도 먹고 불놀이도 하고, 그렇게 세 시간 정도 놀고 난 첫째는 밭을 떠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다음 주에 또 오자." 텃밭에 다닌 지 4년째인데, 첫째가 밭에 오자고 먼저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 주를 그렇게 성공적으로 보낸 나는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밭에서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사계절 생태놀이>(붉나무 지음·그림, 길벗어린이 펴냄), <식물과 함께 놀자>(나가타 하루미 지음, 박정선 옮김, 비룡소 펴냄), <자연미술>(안드레아스 귀틀러 지음, 강성희·도복선 옮김, 피피엔 펴냄), 월간 <개똥이네 놀이터>(보리출판사 펴냄) 같은 책을 참고 해서 텃밭에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놀이를 준비했다. 놀다 보니, 책에는 나오지 않은 새로운 놀이도 개발할 수 있게 됐다. 외줄 그네를 설치해 타고, 풀대를 꺾어다 만든 펜대로 그림 그리기도 했다. 가을에는 추수가 끝난 논에서 이삭을 주워 팝라이스를 해먹고, 볏짚을 쌓아놓고 뒹굴기도 했다. 논 한가운데 공룡알처럼 생긴 볏짚 곤포사일리지(Baling silage, 梱包 silage)에 아이들을 올려주면 한 시간이 지나도록 내려올 줄 몰랐다.

어린 농부로 거듭나는 아이들
텃밭에 적응하자 아이들은 아예 신발을 벗고 놀았다. 뛰어다니다 풀의 그루터기를 밟아 아파하는 걸 보기도 했지만, 모른 척했다. 물론 이렇게 놀다 보면 사고가 나기도 한다. 한번은 둘째 녀석이 토끼풀꽃에 모여든 벌을 보고, 파리인 줄 알고 밟으려다가 쏘이기도 했다. 발바닥에 꽂힌 벌침을 뽑으며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공짜로 벌침을 맞은 데다 생명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을 테니까.
사실 아이들 놀이는 기본적으로 파괴와 위험을 동반하는데, 위기상황이 아니라면 되도록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도 부모의 역할 중 하나다. 높이 올라가면 떨어질 위험이 있고 함부로 만지면 손을 베이거나 찔릴 위험이 있다. 하지만 다치지 않는 방법은 그 위험을 아예 차단하는 게 아니라 겪어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 몸을 다룰 줄 알게 된다. 그래야 자신감이 생기고 자존감을 갖게 된다. 텃밭에서 아이와 잘 놀려면, 서툴러도 지켜봐야 하고, 더러워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한다.
요즘엔 한 자녀만 키우는 집이 많다 보니, 아이들도 부모에게 더 의지하게 된다. 아이들이 텃밭에 잘 적응하게 하려면, 텃밭친구를 사귀게 해주는 것도 좋다. 공동육아를 하는 곳에서 텃밭교육이 잘 이루어지는 이유다. 어린농부학교를 할 때도 또래 친구들 덕분에 관심을 갖고 용기 내는 아이들이 많았다. 형이 하는 모습을 보고, 난생처음 벌레도 잡아보고 과감하게 비탈길에서 미끄럼도 탄다. 가족텃밭을 할 때도 어울릴 친구가 있으면, 아이들은 스스로 놀 거리를 찾아 나서 어른들이 준비한 놀이가 필요 없게 된다.
물론 텃밭에서 마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웃에게 피해를 줘선 안 되고 셋째(작물) 생각도 해야 한다. 특히 텃밭을 계속하려면 농사를 더 잘 짓는 방법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 수확해서 먹는 재미를 느끼는 게 중요한데, 그러려면 아이들 못지않게 작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필요하다. 정말 중요한 건, 아이들과 함께 가기로 했다면 천천히 가는 길이 더 빠른 길이라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밭에서 언제까지나 천덕꾸러기로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그렇다. 텃밭에 오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또 나이를 한 살 더 먹을수록 아이들도 이 공간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어린 농부'로 거듭나게 된다.
아이들과 함께 텃밭을 가꾸다 보면 알게 된다. 텃밭에서의 활동이 아이들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일과 놀이의 중간단계를 '노작'(勞作, occupation. 19세기 말 유럽의 지식 중심 교육에 반대해 케르셴슈타이너, 프뢰벨, 페스탈로치 등에 의해 주창된 교육철학으로 유럽에선 여전히 중요한 교육과정이다)이라고도 하는데, 텃밭 활동은 어린아이들도 직접 해볼 수 있다. 어린 농부가 되어 각종 농기구를 다루며 채소를 심고 가꾸고 수확하면서 아이들은 다양한 동식물을 가까이하게 되고, 물·흙·나무·잎 같은 자연물을 장난감 삼아 놀기도 한다. 자신이 직접 기른 채소를 따서 바로 맛을 보거나 굽거나 무치는 간단한 요리로 다양한 미각체험을 할 수도 있다. 한 점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땀을 식히며 몸과 마음을 채워간다. 그렇게 키운 오감·관찰력·사고력·기억력·자연친화력이 살아가는데 유용한 자원이 될 뿐만 아니라, 살아가며 겪게 될 위기를 희망으로 바꾸는 창의력이 되지 않을까.
간혹 주변에서 나를 보며 말하곤 한다. 아이를 위해 참 열심이라고.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텃밭에서 아이들과 놀면 누구보다 내가 즐겁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10분을 놀아주기도 힘든데, 텃밭에서는 불에 넣어둔 감자나 옥수수가 탄다면 모를까 내가 먼저 그만 놀자고 한 적이 없다. 노작은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일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른이 일을 통해 놀이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감히 권한다. 잘 놀고 싶으면 가족과 함께 텃밭을 일궈보라고.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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