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간첩이야?" 아내도 아들도 날 버렸다
"아빠 간첩이야?" 아내도 아들도 날 버렸다
[나는 간첩이 아닙니다 ④] 간첩 누명이 부른 불행

고문은 끝났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희망고문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수용 생활을 성실히 하면 곧 나간다"

대성공사 심문관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나가겠지, 조금만 참으면 감금 생활이 끝나겠지'. 하루하루를 손에 꼽았습니다.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3년 6개월. 1974년 북한을 벗어난 김관섭 할아버지는 1978년에야 대성공사에서 나왔습니다. (☞관련 기사 : "날 고문한 자의 모친상에 다녀왔습니다")

김 할아버지가 대성공사에 갇혀 있는 사이 다른 탈북자들이 몇 명이나 들어왔다 나갔습니다. 그가 아는 한, 자신이 대성공사 최장기 수용자였습니다. 왜 유독 자신만 이렇게 오래 갇혀있었어야 했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서서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항의해서 나갈 수 있는 것이라면 진작 내보내줬을 거란 생각에서였습니다. 끔찍했던 고문의 기억들도 떠올랐습니다.


▲귀순자 공적확인 결과. ⓒ김관섭


심문관들이 말한 대로, 그는 '모범수'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조사관들을 대신해 열심히 조서를 썼고, 반공 강연 강사로 불려 나갈 때마다 열심히 '멸북'을 외쳤습니다. 수용 생활을 잘했다며 심문관들이 책을 쓰라고 권할 정도였습니다.

북한을 탈출했으니 틀림없이 북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식으로 남한 사람이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대성공사에서 '열심히' 했던 모든 일은 하루라도 빨리 남한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한 일이었습니다. 남한 정부에, 남한 정보기관에 그는 알아서 기었습니다. 대성공사에서 지낸 3년 6개월은 그를 이렇게 길들였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남한 사람'이 됐지만…


국가는 사과 한마디가 없었습니다. 보상도 없었습니다. 간첩으로 몰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어렵사리 남한 사회에 풀려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차디찬 홀대였습니다.

탈북자들은 '귀순 용사'라며 대접받던 시절이었습니다. 대성공사만 나가면 자신 역시 좋은 대접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착지원금은 다른 탈북자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고, '귀순 용사'라며 떠들어대는 언론의 환대도 없었습니다. 보통 군 출신은 경력을 인정받아 군에 들어갔지만, 북한군 중대장 출신 경력에도 그는 예외로 남았습니다. '간첩' 의심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대성공사를 나가기만 하면 뒤를 봐줄 것처럼 얘기하던 조사관들도 그를 외면했습니다. 이미 3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가 아는 북한 정보들을 가져갈 만큼 다 가져간 뒤였습니다. 그러니 조사관들이 먼저 연락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가끔 본인 경조사 때나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자유 광명을 찾았지만, 남한 사회에 풀려 나온 그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나 다름없었습니다. 대성공사에 있을 적엔, 이곳만 나가면 뭐든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서 한 일이라곤 총 드는 일밖에 없던 그가 민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남한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수없이 외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대성공사를 나왔어도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여전했습니다.


▲대성공사 옥상에 달린 CCTV. ⓒ프레시안(최형락)


"자유민주주의 옹호하는 것과 '간첩 누명' 항의하는 것은 별개"

맨몸으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기술도 없는 그는 대성공사에서 하던 대로 반공 강연에 나갔습니다.

"내가 매는 맞았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안보 강연을 했어요. 기업체에서 하는 강연은 돈은 많이 주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국가에 충성하는 마음이 컸으니 국정 교육만 했습니다. 그게 제 자부심이었어요."

쥐꼬리만 한 급료 중 일부는 대성공사 직원들이 떼갔습니다. "우리들이 소개해준 거나 다름없지 않느냐. 기름값이라도 하자"며 중개료 명목으로 알아서 몇 푼 챙긴 겁니다. 괘씸했지만 백수 처지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일거리가 들어오는 대로 군대, 학교, 촌 동네 할 것 없이 찾아가 외쳤습니다. '북한은 나쁘다'고.

'북한 인민군 중대장 출신' 꼬리표 덕에 그의 반공 교육은 입소문을 탔습니다. 대성공사에서 나온 이듬해인 1979년에 했던 강연만 200번이었습니다. 30년이 흘러 강연 횟수를 헤아려보니 4000회, 수강 인원은 13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그의 명함에 찍혔던 직함도 여럿입니다.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국민홍보위원, 통일부 통일교육 전문위원, 민방위 소양강사…. 안보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남한이 옳고 북한이 그르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없이 안보 강의를 하는 동안에도, 고문당하고 3년 넘게 수용 생활했던 일은 억울하고 분했다고 토로했습니다.

"제가 남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것과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든 국가에 항의하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간첩이 아닌 거로 밝혀졌을 때 국가가 바로 사과하고 적절한 보상을 했더라면, 죽을 때가 다 된 제가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겁니다."


▲김관섭 씨가 지자체 등에서 받은 공로상. ⓒ프레시안(서어리)


두 번의 결혼 실패, 아들의 가출… 간첩 누명이 가져온 불행

안보 강사로 자리를 잡을 무렵인 1979년, 결혼소개소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당시 귀순 용사는 인기가 좋아 어렵지 않게 상대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아내는 아들을 낳은 지 4개월 만에 집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말도 안 하고 떠났으니, 왜 나를 떠났을까 혼자 생각만 했죠. 아마 돈 때문인 것 같더라고요. 다른 귀순 용사들은 환영식도 삐까뻔쩍하게 하고 정착지원금도 잘 받고 잘 나가니까 나도 그럴 거라고 믿고 결혼했을 텐데, 실제로는 그렇질 않았으니까요."

아내가 없으니 당장 아이 키우는 일이 막막했습니다. 안보 강연에 나갈 때마다 아는 탈북자에게 아이를 맡겼습니다. 얼마 되지 않던 수입은 몽땅 보육료로 썼습니다. 보육료에 월세에 허리가 휠 지경이었습니다. 적은 돈이나마 뭐라도 수입이 될 만한 부업을 찾을까 하면 사기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주변에 도와주는 남한 사람이 없으니, 남한 사정에 훤할 리 없었습니다. 그의 옆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남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다시 결혼 상대를 찾았습니다. 이혼 후 10년 만에 재혼에 성공했지만, 두 번째 결혼 생활 역시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처가 식구들은 다른 탈북자들과 달리 수입이 적고 수용 생활이 길었던 그를 수상하게 바라봤습니다.

의심이 길어지자, 그는 마지못해 아내에게 간첩으로 몰려 고생했던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정말 어렵게 꺼낸 얘기였습니다. 그러나 이해와 공감을 바라고 솔직하게 터놓은 이야기는 되레 독이 됐습니다. 아내와 처남은 그를 진짜 간첩으로 의심했습니다. 처남은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에게도 '네 아버지가 간첩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사춘기가 한창이었던 아들은 결국 집을 나갔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성 기능도 좋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불만은 쌓여갔고, 그는 다시 이혼 전철을 밟아야 했습니다.

자신을 떠난 처자식들이 원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론 그들의 선택이 이해가 됐습니다. 체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관섭 씨가 과거 학교에서 통일교육을 하는 모습. ⓒ김관섭


교통사고 당하고도, 병원 대신 안보강연

불행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998년 어느 날, 그는 여느 때처럼 강연장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갑자기 차가 나타나 그를 들이받았습니다. 한순간 몸이 붕 떴다 '쿵' 하고 떨어졌습니다. 다리가 부러졌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병원 대신 안보 교육장으로 갔습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북한 군대에 대해 설명하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까무룩 정신을 놓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곤봉으로 맞은 후유증 탓에 허벅지 통증을 겪던 그는 결국 지체장애인 판정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들자 그동안 간간이 들어오던 강연마저 끊겼습니다. 현재 여든을 넘긴 김 할아버지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6평짜리 단칸방에서 혼자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혼자 잠이 듭니다.

"제 인생이 너무 비참합니다. 북에 있는 가족들과도 생이별하고 왔는데 남한에서도 가정이 파탄 났으니…. 이제 저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돈도 없고, 가족도 없고 잘 걷지도 못해요. 이렇게 어렵게 살려고 남한 온 건 아닌데. 내가 간첩으로 몰리지만 않았어도 다른 귀순 용사들처럼 대접받고 잘 살았을 텐데…."


▲김관섭 씨. ⓒ프레시안(서어리)


* 이 기사는 미디어 다음과 공동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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