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돔, 비닐봉지가 인터넷보다 힘이 세다!
콘돔, 비닐봉지가 인터넷보다 힘이 세다!
[프레시안 books]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
2015.09.11 16:42:58
몇 달 전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두 시간 동안 남녀 고등학생들과 현대 과학기술을 놓고서 유쾌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질문이 하나 나왔다. 한 친구가 오래 전에 등장한 과학기술 발명품 가운데 새삼스럽게 다시 재발견된 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정말로 많아요!" 하고 말문을 열긴 했는데, 얼른 적절한 사례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 떠오른 것이 '콘돔'이었다. 뒤에서 강연을 지켜보던 선생님께 "잠깐 성교육을 해도 되느냐"고 양해를 구하고 나서 콘돔 이야기를 꺼냈다. 웬 콘돔이냐고? 그날 설명했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오늘날과 같은 고무 콘돔은 이미 1930년대부터 널리 쓰였다. 그런데 1956년에 경구 피임약이 개발되면서 콘돔은 더 이상 사용 가치가 없어진 듯했다. 실제로 1960년대가 되면 콘돔의 판매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낡은 기술로 폐기 처분될 상황이었던 콘돔은 1980년대가 되면서 화려하게 재등장한다.

바로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공포가 대중을 덮치면서 콘돔이 피임뿐만 아니라 성병을 예방하는 도구로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 낡고 오래된 기술이 화려하게 재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콘돔은 피임뿐만 아니라 성병을 예방하는 가장 확실한 도구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실 이 콘돔 이야기는 데이비드 에저턴의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정동욱·박민아 옮김, 휴먼사이언스 펴냄)를 읽고서 머릿속에 담아 뒀던 것이다. 우리는 항상 첨단의 새로운 과학기술만 집착하다 보니, 정작 얼마나 낡고 오래된 것들이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 잊곤 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우리의 통념을 깨준다.

살충제보다 모기장이 힘이 세다

▲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데이비드 에저턴 지음, 정동욱·박민아 옮김, 휴먼사이언스 펴냄). ⓒ휴먼사이언스

책깨나 읽은 눈 밝은 독자라면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의 한 대목('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가 언급한 에저턴의 <오래된 것의 충격(The Shock of the Old)>이 바로 여기서 소개하는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다.

그렇다면, 도대체 낡고 오래된 것들이 어떻게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일까?

먼저 말라리아 얘기부터 해보자. 말라리아는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한 전 세계 보건 당국이 가장 걱정하는 질병 가운데 하나다. 20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말라리아의 박멸을 시간문제로 보았다. DDT와 같은 신종 살충제가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를 퇴치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과학기술(살충제)은 금방 한계를 드러냈다. 세계 곳곳에서 살충제에 내성이 생긴 모기가 등장하기 시작해 1960년대 후반부터 말라리아가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결국 인류는 정말로 오래된 기술로 다시 눈을 돌려야 했다. 바로 '모기장'이 말라리아 또 모기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다시 주목 받게 된 것이다.

때로는 오래된 과학기술은 장소에 따라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20세기 화학 산업이 낳은 비닐봉지는 좋은 예이다. 비닐봉지는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대량 소비의 상징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형 할인점에서 이중, 삼중으로 물건을 포장해주느라 엄청난 양의 비닐봉지가 소비된다.

그런데 이 비닐봉지가 아프리카 대도시의 빈민촌 슬럼으로 장소를 옮기면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인다. 하수도 시스템 따위를 기대할 수 없는 케냐 대도시의 슬럼에서 비닐봉지는 '날아다니는 화장실'로 변신한다. 슬럼 주민은 화장실 대신에 비닐봉지에 일을 보고 나서 "휘휘 돌려 자기 집에서 최대한 멀리" 던진다. 오래된 과학기술이 낳은 또 다른 기적이다!

비닐봉지, 포장재 vs. 화장실 vs. 학살 도구

흔히 첨단 과학기술의 전시장으로 불리는 전쟁터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최근 비무장지대(DMZ) 지뢰로 촉발된 남북 대치 국면에서 미국의 핵 폭격기 'B-52'의 한반도 배치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런데 'B-52'는 1952년 처음 날아오른 '오래된' 비행기일 뿐만 아니라 1962년에 마지막으로 생산된 '낡은' 것이다. "초창기 B-52 조종사의 손자들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사실 남북 대치의 빌미가 된 '목함(木含)' 지뢰도 참으로 '최첨단' '디지털' 시대와는 거리가 멀다. 이름 그대로 나무로 감싼 이 지뢰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소련군이 독일군에 맞서고자 값싸게 만든 것이었다. 소련에서 북한으로 이전된 이 지뢰는 한국 전쟁 때 쓰였는데, 그것이 다시 반세기가 훨씬 지나서 남북 갈등의 빌미가 된 것이다.

인류의 추악한 얼굴을 가감 없이 보인 대학살을 둘러싼 사정은 어떨까?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이 유대인 등을 수백만 명 학살할 때, 중요한 수단은 소총과 같은 '낡은' 기술과 굶주림과 같은 '오래된' 고통이었다. 홀로코스트 하면 떠올리는 살인 가스(치클론 B)를 뿜는 가스실과 자동화된 소각장은 분명한 '혁신'이긴 했지만, 대학살의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대학살이 이뤄졌다. 방법만 놓고 보면 독일군의 학살과 같은 혁신은 없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곳곳에서 삽, 괭이, 철봉, 낫과 같은 지극히 '오래된' 도구와 총과 같은 '낡은' 기술이 학살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나마 등장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은" 질식사에 쓰인 비닐봉지였다.

이처럼 우리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전에 발명된 낡고 오래된 과학기술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삶을 송두리째 바꿀 것 같은 '새로운' 과학기술이 수없이 등장했지만, 실제로 삶을 바꾼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가 호들갑 떨면서 경탄하는 새로운 과학기술(인터넷, 컴퓨터, 3D 프린터 등)도 100년, 200년이 지난 후에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받을지 모른다.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는 이렇게 과학기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송두리째 바꿔주는 책이다. 장담하건대, 로봇, 드론 운운하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언급하는 책보다 이 책 한 권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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