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로 온몸 찌르고, 걸핏하면 몽둥이질"
"바늘로 온몸 찌르고, 걸핏하면 몽둥이질"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⑩

'무기수' 임방규, 푸른 죄수복을 입다

임방규를 포함해 무기수로 감형된 7명의 사형수들이 오후 늦게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사복을 벗고 푸른 죄수복으로 바꿔 입은 임방규는 그제야 '사형을 면했구나'라며 안도했다. 무기수 이하만 죄수복이 지급됐고, 곧 처형될 사형수는 사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임방규가 있는 동안 대전교도소에서는 총살 집행이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7사동에 교수대가 설치돼 있어 이곳에서 형이 집행됐다. 같은 사형이라도 군법이면 총살, 민사면 교수형에 처해진다. 결과적으로 군법에 의한 사형 집행은 적어도 이곳에서 만큼은 없었다는 얘기다.

대전에서의 수감 생활은 수년 간 이어온 복역기간 중 가장 큰 고통이었다. 환자에게는 약을 주지 않았고, 먹을 것은 늘 부족했다. 한겨울 내의는 고사하고 얇디얇은 홑옷을 입혀 추위에 떨도록 했다. 실내라지만 떠다 놓은 물이 꽁꽁 얼 정도로 사방은 냉기로 가득했고, 여기에 환기구까지 못 막게 해 감방 안은 그야말로 거대한 냉동고 같았다. 누우면 칼바람에 이빨이 달그락거려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한기가 뼈 속까지 스며들어 온 삭신이 쑤셨다.

▲한국전쟁 당시 회문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뒤 체포돼 대전교도소에 수감된 김창근 씨가 당시 생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찬대


좌익 수감자들은 대전교도소 내에서도 특별하게 취급됐다. 이들은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인 존재다. 인권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악랄한 행위가 이어졌다. 바늘로 온몸을 찌르는 고문도 서슴지 않았고, 걸핏하면 몽둥이 패대기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몸이 성한 구석이 없었다. 어떤 이는 고통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총살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졌지만, 지옥 같은 생활은 여전했다.

1955년 빨치산 '조직 사건'

1955년 2월, 대전교도소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빨치산 수감자들에 의한 일련의 '조직 사건'이 그것이다. 무기수였던 박판수(경남도당 북부지구당위원장), 이시영(충남도당 군사부장), 박양수(부여군당위원장)가 중심이 됐다. 몇몇은 은밀하게 탈옥 조직을 구성하기도 했다. 임방규는 당시 조직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1954년에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는데, 그 이전부터 조직구성은 이뤄진 것 같았다. 나는 뒤늦게 조직에 합류한 터라 핵심적인 내용은 잘 몰랐다. 다만, 총책과 공장책임자, 그리고 실정에 맞게 말단 세포 조직이 만들어졌고, 학습조직을 꾸려 교육도 이뤄졌다. 학습은 일반(지리, 역사, 문학 등)학습과 정치(사상)학습으로 구분되는데, 체포 전 도당학교에서 강의했던 분들이 조선노동당 당사도나 변증법적 유물론 등을 가르쳤다."

철공소였던 4공장에서는 단도 등의 무기도 만들어졌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충남도경은 4공장에서 발견했다며 어설픈 칼빈총을 증거물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업장 내 열악한 환경을 감안할 때 총을 제조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연루자들을 고문한 뒤 작업장에서 꺼내온 칼빈총은 보기에도 여간 시원찮았다.

▲1955년 2월 21일자 <경향신문> 사회 2면에 대전형무소 '조직 사건'에 대한 보도 내용이 실려 있다. '집단탈옥미수사건 십오일대전형무소서'라는 제목의 파란 부분이 관련 기사다. 우측은 기사를 확대한 사진. ⓒ경향신문


조직 사건에는 상당히 많은 정치범들이 연루돼 있었다. 3000여 명의 좌익 수감자 가운데 2000여 명 가까이가 여기에 포함됐다. 조직사건에 가담한 이들은 2개월 징벌을 받았고, 무기 등을 제조한 주모자들은 3년에서 5년의 가형(加刑)을 받았다. 2개월 뒤 좌익 수감자들의 징벌이 해제되면서 전향자는 다시 공장으로, 비전향자는 특별사동으로 보내졌다.


'감옥 안 감옥', 대전교도소 특별사동

조직 사건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특별사동(좌익수용자 수용사동)은 비전향자만 따로 생활하는 '감옥 안 또 다른 감옥'이다. 4사, 5사, 6사, 7사, 그리고 이후 만들어진 8사까지 모두 5개 사동이 특별사로 관리됐다.


4사는 76호의 독방만으로 구성돼 있고, 여사(女舍)와 교수대가 있던 7사는 허물어져 특별사동으로 개조됐다. 특별사 보루대 지하에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돼 밤낮으로 고문이 이뤄졌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또 어떤 생활을 하는지는 오직 내부자만이 확인이 가능하다. 잡범은 일체 수용하지 않는 특별사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한국전쟁 초기 남부군으로 활동한 김창근 씨가 대전교도소(당시는 대전형무소) 특별사동 독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찬대


특별사동 내 비전향자들에 대한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가혹했다. 강제 전향을 위해 온갖 수단이 동원됐고, 갖가지 악랄한 행위가 이어졌다. '징벌방'이라고 해서 2년 넘게 독방에 가둔 경우도 있었다. 양팔을 벌리면 손이 벽에 닿을 만큼 좁고 습한 방에서 몇 년을 그렇게 생활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 그래도 서로 의지하면서 버틸 텐데, 캄캄한 독방에서 몇 개월을 혼자 지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느 샌가 정신이 돌아버린다. 그곳에 있으면서 듣는 얘기라곤 '전향하면 빼주겠다'는 말이었다. 정말 많이 외롭고 무서웠다."

광주포로수용소에서 10년형을 받고 광주교도소를 거쳐 대전교도소로 옮겨온 김창근은 독방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광주수용소에 있을 때 엄청난 구타에 시달렸고, 장작개비로 두들겨 맞아 어깨뼈가 부러지면서 의식을 잃기도 했다. 계속된 구타와 고문에 나이도, 이름도, 본인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렸다. 재판을 어떻게 받았는지조차 기억이 없다. 대전으로 이감될 때는 누군가에게 업혀왔고, 자신의 형기도 이곳 대전에서 처음 알았다. 과거 일제강점기 일본 순사들의 고문이 그러했듯, 당시 빨치산 수감자들을 대하는 간수(또는 헌병)들은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쉽게 파멸시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

▲ 대전형무소 특별사동에 수감된 비전향자들은 독방에서 몇 년 간 고초를 받기도 했다.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해 서울 서대문형무소 독방의 모습을 촬영한 것. ⓒ정찬대



독방 생활과 원명기 동지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고, 이불은 일제강점기 독방에서 쓰인 독거용 이불이 사용됐다. 원체 이불이 작은 탓에 덮으면 옆이 붕 뜨고, 발목은 밖으로 삐져나왔다. 덩치가 큰 사람은 여간 고생이 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불이고 옷이고 죄다 솜이 틀어져 군데군데 뭉쳐있고, 그럴 때면 걸레를 찢어 푼 올로 실을 만들어 틀어진 솜을 다시 잡았다. 바늘은 제본한 책의 철사를 뜯거나, 대나무를 쪼개 만들어 사용했다. 언제부턴가 간수들이 이를 알고 책도 싹 걷어가 버렸다.

76호 독방, 이곳에 임방규도 수용됐다. 끝 방인 76호에는 온도계가 있어 간수들이 수시로 온도를 체크했다. 저녁 12시 무렵이면 독방 안은 수감자들이 발을 동동거리는 소리가 '둥둥'거렸다. 너무 추운 탓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방 안에서 뛰고 있는 것이다.

한겨울 독방 온도는 영하 7도까지 내려갔다. 자고나면 파란 이불 위에 하얗게 서리가 끼었고, 변통도 얼어붙었다. 또 차갑게 굳은 밥이 식기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꽁꽁 언 밥을 먹는 것도 보통 곤욕이 아니었다.

독방 내 환기통은 두 군데다. 위(천장)에 하나, 밑에 하나. 한쪽 벽은 발로, 또 다른 한쪽은 팔로 버티며 천장까지 올라가 구멍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간수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며 감방 내 환기통을 확인했다. 그런 다음 막힌 환기구가 보이면 여지없이 구타가 이어졌다. 


▲ 옥사 문 옆에 설치된 패통은 간수에게 감방 내 위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됐다. 사진은 서울 서대문형무소 옥사에 설치된 패통(확대사진 참조)의 모습. ⓒ정찬대


일반 잡범과는 달리 특별사동 수감자들은 한 사람씩 목욕을 시켰다. 하지만 손가락조차도 넣을 수 없을 만큼 펄펄 끊인 물을 일부러 탕에 받아둔 탓에 몸을 씻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를 항의하면 항의한다고 또 두들겨 맞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알몸으로 눕힌 채 찬물을 끼얹는 고문도 수시로 이뤄졌다.

독방은 햇볕 한 움큼 들어오지 않는 우울한 공간이다. 여기에 습한 곰팡이 냄새까지 더해져 쾌쾌했다. 고요함 속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거친 포효 소리뿐이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정적을 깨고 패통이 툭하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간수를 부르는 표식이다.

"뭐야?"
"도저히 추워서 못살겠소, 전향하겠소."
"죽게 생기니까 기어 나오는구만…." 


간수가 빈정대듯 말했다.


73호에 수감된 전남 화순 원명기 동지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한 동지가 이렇게 또 전향하구나 생각하니 임방규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이튿날 간수가 73호 독방의 철문을 땄다.

"전향서 쓰게 나와!"

그러자 원명기가 대뜸 "날 풀렸는데…."라며 빈둥댔다.


임방규를 포함해 독방에 있던 수감자 모두가 한참을 껄껄거렸다. 그는 끝까지 전향하지 않은 채 만기 출소했고, 사회에 돌려보내진 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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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신념이 담긴 글은 울림을 주며, 울림은 다시 여론이 됩니다. 글을 쓰는 궁극적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을 연재 중이며, 오늘도 순응과 저항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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