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와 장기의 국가철학과 바둑의 노마돌로지
체스와 장기의 국가철학과 바둑의 노마돌로지
[장시기의 바둑의 인문학] ③
체스와 장기의 국가철학과 바둑의 노마돌로지

"장기는 국가 또는 궁정의 놀이로 특히 중국 황제가 즐기던 것이다. 장기의 말들은 모두 코드화되어 있다. 즉 행마나 포석, 그리고 말끼리의 적대관계를 규정하는 내적 본성 또는 내적 특성을 구비하고 있다. 즉 각각의 내재적 성질을 부여받고 있다. 마는 마이고, 졸은 졸이며, 포는 포이다. 말 하나 하나는 소위 상대적 권력을 부여받은 언표의 주체와 비슷하며, 이러한 권력들은 언표행위의 주체, 즉 장기를 두는 사람 또는 놀이의 내부적 형식 속에서 조합된다. 이에 비해 바둑은 작은 낱알 아니면 알약이라고 할까? 아무튼 단순한 산술 단위에 지나지 않으며, 익명 또는 집합적인 또는 3인칭적인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로지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며, 그것이 한 명의 남자나 여자 또는 한 마리의 벼룩이나 코끼리라도 상관이 없다. 바둑알들은 주체화되어 있지 않은 기계적 배치물의 요소들로서 내적 특성과 같은 것은 전혀 지니고 있지 않으며, 오직 상황적 특성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질 들뢰즈

제 3강. 체스와 장기의 국가철학과 바둑의 노마돌로지
제 4강. 노마드의 내재성과 생명철학
제 5강. 노마드적 세계의 구성

제 3강. 체스와 장기의 국가철학과 바둑의 노마돌로지

들뢰즈의 바둑의 발견은 근본적으로 체스나 장기의 놀이와 바둑의 놀이가 지니고 있는 서로 다른 존재론적 세계의 발견이다. 체스, 혹은 장기의 세계는 국가나 왕국이지만, 바둑의 세계는 광야나 초원이거나 혹은 우주이다. 그래서 체스나 장기의 세계에 등장하는 말들의 존재는 국가나 왕국에 의하여 기관화 된 국가장치들을 대표하지만, 바둑의 세계에 등장하는 하얀 돌이나 검은 돌의 존재는 어떤 남성이나 여성, 코끼리나 사자, 침팬지, 혹은 나무나 돌을 대표한다. 이러한 존재론적 차이는 체스나 장기의 구조로 하여금 이미 코드화 되어 있는 국가철학적 세계 속에서 작동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논리체계를 구성하게 만들고, 바둑의 구조로 하여금 마치 지속적으로 흐르거나 이동하는 물이나 바람처럼 영토화와 탈영토화 그리고 재영토화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노마돌로지의 지식체계를 구성하는 토대로 만든다. 따라서 체스와 장기의 국가철학적 논리체계는 체스와 장기를 구성하는 말들, 즉 체스의 킹, 퀸, 비숍, 나이트, 룩, 폰이나 장기의 왕, 선비(혹은 내시), 차, 마, 포, 상, 졸이 국가나 왕국을 구성하는 국가인들의 존재적 논리로 드러나고, 바둑의 노마돌로지 지식체계는 바둑을 구성하는 하얀 돌과 검은 돌이 자연이나 우주를 구성하는 남성이나 여성, 혹은 바람이나 물이라는 노마드적 존재의 생성적 논리의 세계를 드러낸다.


체스와 장기의 국가철학적 논리체계는 체스와 장기의 말들이 존재하는 체스판이나 장기판의 세계를 우주나 자연이 아닌 왕국이나 국가로 축소한다. 이와는 달리 바둑의 생성적 세계는 바둑을 구성하는 하얀 돌과 검은 돌이 존재하는 바둑판의 세계를 자연과 우주로 확장시킨다. 바둑의 역사는 곧 바둑판의 우주가 확장되는 역사이다. 가로 아홉 줄과 세로 아홉 줄이 가로 열일곱 줄과 세로 열일곱 줄로 확장되고, 가로 열일곱 줄과 세로 열일곱 줄의 바둑판이 가로 열아홉 줄과 세로 열아홉 줄로 확장된 과정이 곧 바둑의 역사이다. 이러한 바둑의 역사는 바둑판 위에서 노니는 하얀 돌과 검은 돌이 서로 어울리는 바둑 기보의 역사를 세계와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인식적 발견의 역사로 만든다. 바둑의 역사를 탐구하는 바둑연구가 문용직은 바둑인들이 만든 "바둑의 발견"을 16세기와 20세기에 일본에서 일어난 두 번의 "바둑의 혁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일컫는다. 문용직이 이야기하는 16세기 일본에서 일어난 "도사쿠 바둑 혁명의 단초"(문용직 『바둑의 발견』 80)는 자연과 우주를 구성하는 바둑판에 대한 "구조주의의 발견"(문용직 89)이고, 20세기 일본에서 일어난 "우칭위엔과 기타니의 중앙의 발견"은 곧 바둑판에 대한 "패러다임의 혁명"(문용직 142)이다.


문용직이 이야기하는 16세기 일본의 "도사쿠 바둑 혁명"이 만든 "구조주의의 발견"은 20세기 전반부를 구성하는 프랑스 인문학의 구조주의적 세계관과 동일하며, 20세기 일본에서 일어난 "우칭위엔과 기타니의 중앙의 발견"이 만든 "패러다임의 혁명"은 1962년에 출판된 토마스 쿤(Thomas Samuel Khun)의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가 암시하는 것처럼 질 들뢰즈의 등장과 레이먼드 윌리암스의 문화연구가 시작된 1960년대, 즉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서구적 근대 인문학의 탈구조주의적 전환과 동일하다. 이런 측면에서 푸코가 "언젠가 이 세기는 질 들뢰즈의 시대로 일컬어질 것이다"라는 말은 20세기 초반의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시대와 19세기 후반의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시대를 암시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서구적 근대 인문학의 탈구조주의적 전환을 토대로 한 질 들뢰즈의 노마돌로지 지식론이 서구적 근대의 구조주의적 세계에 갇혀 있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공산당 선언』이 내포하고 있는 지식체계를 넘어서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넘어선 새로운 지식체계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푸코의 "질 들뢰즈의 시대"라는 선언은 또한 체스나 장기의 국가철학적 논리체계의 구조처럼 프로이드와 마르크스의 지식체계가 국가철학적 논리체계의 구조 속에 포획되어 있으며, 들뢰즈의 생명 철학이나 몸 철학이 바둑에 내재하고 있는 구조와 구조, 혹은 구조 너머의 또 다른 구조를 지닌 노마돌로지의 지식체계를 드러낸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국가철학적 지식체계와 노마돌로지 지식체계가 서로 대립하는 상호 상반된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등장하는 "리비도(libido)의 발견", 즉 "무의식이라는 욕망의 발견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적 혁명"이라고 이야기하고, 비록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죽기 전의 마지막 저서를 『마르크스의 위대함(The Greatness of Marx)』으로 계획하였다. 문제는 국가철학적 논리체계에 토대를 둔 마르크스주의의 지식인들이나 프로이트주의의 정신분석학자들이 서구적 근대의 제국주의나 아류 제국주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들뢰즈의 노마돌로지 지식체계를 배척하고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바둑과 체스, 혹은 장기와 바둑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바둑의 노마돌로지 지식체계는 장기나 체스의 국가철학적 지식체계를 내포하고 있지만, 체스나 장기의 국가철학적 지식체계는 바둑의 노마돌로지 지식체계를 배척하고 억압한다. 바둑은 네 개의 귀와 변, 그리고 중앙에서 체스나 장기와 같은 수많은 국가와 왕국의 구조를 건설하고 해체하는 과정이며, 국가와 국가나 왕국과 왕국을 서로 연결하거나 분리하는 과정이다. 즉, 바둑판 위에서 바둑을 두는 과정은 인류의 역사나 각각의 개체들이 살아가는 과정처럼 서로 다른 수십 개의 바둑판과 체스판이 구성되었다가 해체되는 과정과 더불어 각각의 구조들이 서로 교환되거나 새로운 것으로 변화하고 생성되는 과정이다.


장기와 체스의 국가철학적 논리체계가 바둑의 노마돌로지 논리체계를 배척하거나 억압하고, 바둑의 노마돌로지 논리체계가 장기와 체스의 국가철학적 논리체계를 포용하고 있는 것은 장기나 체스의 말들이 왕국이나 국가의 국가장치로 기관화 된 현실적 지배와 피지배 관계의 존재, 즉 국가인이거나 가족인, 혹은 사회인이라는 정착민을 장기판이나 체스판이라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의 토대로 가정하고 있는 반면에 바둑의 하얀 돌과 검은 돌은 현실적 지배와 피지배 관계 이전의 자연과 우주의 모든 세계를 떠돌면서 자연과 우주의 모든 세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모든 평등한 개체들, 즉 자유롭게 영토화와 탈영토화 그리고 재영토화의 과정에 있는 노마드의 존재들을 바둑판이라는 대지와 자연 그리고 우주를 구성하는 바둑판이라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의 토대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스나 장기의 국가철학이 지니고 있는 논리적 토대처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왕이나 여왕, 혹은 사제나 기사, 혹은 장교나 졸병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현실적인 서구적 근대 국가체제가 구성하고 있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혹은 판사나 검사, 교수나 학생,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등등의 현실적 존재가 과거의 먼 옛날에 이미 정해져 있는 인간의 본질인가?


물론 유교의 국가철학이나 서구적 근대의 국가철학이 지니고 있는 지식의 논리체계는 장기나 체스의 놀이체계보다 더욱 정교하게 국가인이거나 사회인, 혹은 가족인이라는 정착민의 존재론적 사유체계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상적 도(道)와 현실적 덕(德)이라는 공자와 맹자의 도와 덕의 이분법이 왕과 백성, 양반과 평민, 남성과 여성 등등의 존재론적 이분법을 양산하는 유교적 국가철학의 존재론적 토대가 되듯이 기독교의 신화적인 초월적 신과 그 형상으로 빚은 인간의 조상 아담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든 이브, 플라톤의 초월적인 이데아와 그것의 모방인 현실이라는 신과 인간의 이분법이나 이데아와 현실의 이분법은 서구적 근대의 모든 존재론적 이분법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신플라톤주의의 데카르트의 존재론이 표방하고 있는 영원한 정신(이상)과 그 형상의 몸(물질), 혹은 헤겔의 현실적 세계를 구성하는 주인과 노예이거나 마르크스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프로이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아빠-엄마-나의 가족주의적 삼각형의 구도 등등의 서구적 근대 국가철학의 존재론적 토대는 장기와 체스의 말들이 지니고 있는 국가철학의 존재론적 토대를 단순히 형이상학적 사유의 개념으로 승화시킨 것일 뿐이다. 따라서 서구적 근대의 국가철학적 사유방식은 과거의 중국이나 조선에서 활용되었던 유교적 국가철학의 대학이나 과거시험제도 등등의 국가장치를 서구적 근대의 대학이나 공무원시험제도 등등의 국가장치로 변형시키면서 서구적 근대의 지배적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알파고와 이세돌이 대결하게 만든 오늘날의 바둑의 세계를 구성하게 만든 두 번의 "바둑 혁명"이 왜 바둑의 고향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중국이나 그 문화를 가장 먼저 습득한 조선에서 일어나지 못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서구적 근대의 인문학을 구성하는 헤겔의 법철학이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혹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지식이 들뢰즈의 노마돌로지 지식을 억압하고 배척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 알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일본의 "고(碁)"와는 달리 20세기 이전까지 중국의 바둑은 "사전배석제(事前配石制)"의 "치(棋)였으며, 조선의 바둑은 "순장(巡將)바둑"이었다. 중국의 "사전배석제" 바둑과 조선의 "순장바둑"은 서구적 근대 국가가 건설되기 이전까지 중국과 조선을 지배했던 유교적 국가철학의 바둑에 대한 억압과 배척의 방식이거나 들뢰즈가 말하는 "국가 또는 궁정의 놀이로 특히 중국의 황제(나 조선의 국왕, 혹은 선비)가 즐기던" 장기의 영향이다. 따라서 15-16세기 이후부터 중국의 "사전배석제"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자유롭게 바둑을 두기 시작한 일본은 "17 줄에서 19 줄로 변화된" 바둑판과 더불어 "유학 이전의 세계관등을 반상 위에 구체적으로 그렸으리라"(문용직 『바둑의 발견 2』 31) 보는 "예술적 지식의 상상력을 통한 세계 인식의 방법"(문용직 69)이 중국이나 조선과 달리 두 번의 "바둑 혁명"을 구성하도록 만든 것이다.


두 번의 "바둑 혁명"이 왜 바둑의 고향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중국이나 그 문화를 가장 먼저 습득한 조선에서 일어나지 않고, 일본에서 일어났는가의 질문에 대한 문용직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왜 한국은 중국을 답습하여 (일본처럼) 패러다임의 혁명을 추구하지 않았을까...순장바둑은 계가방식이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과도 다르다는 것이 역시 중요한 포인트이다. 각자의 집 안에 있는 돌은 단수되는 자리만 피하고 자타(自他) 구별 없이 꺼내어, 남은 집만을 계산하여 집이 많은 쪽이 이기는 방식을 사용한다. 돌을 아무리 많이 죽여도 되며, 상대 진영에서 되는 수 안되는 수 다 동원해도 손해가 없는 것이다. 매우 독특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 일본과 같이 영토 전쟁이기는 하되 돌의 효율에 대한 관념은 싹틀 수가 없다. 전투와 전투만을 반복한다...게다가 포진을 먼저 배치한 후 대국을 시작한다. 중국보다도 더 많은 돌을 미리 반상에 두어 놓는 것이다. 어찌 자유로운 사고가 발전할 수 있겠는가."(문용직 『바둑의 발견』 74) 문용직의 대답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당시의 조선이 중국의 강력한 국가철학적 사유방식이 만든 힘(권력) 바둑에서 벗어나 중국과 다른 "계가방식"을 통하여 "영토"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였지만, 중국보다도 더 강력한 유교적 국가철학의 사유방식이 과거의 "중국보다도 더 많은 돌을 미리 반상에 두어 놓는" "포진을 먼저 배치한 후 대국을 시작"하기 때문에 두 번의 "바둑혁명"을 만든 과거의 일본처럼 "자유로운 사고가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중국이나 조선이 만든 유교적 국가철학의 주체인 "나"나 "우리"가 동이(東夷), 서이(西夷), 남이(南夷), 북이(北夷) 등등의 "너"나 "그들"을 오랑캐로 추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너"나 "그들" 이후의 개념이듯이 서구적 근대의 국가철학이 만든 "주체"나 "주권", 혹은 "인권" 등등의 근대적 개념들은 이방인이나 비서구적 세계, 혹은 야만 등등을 배제하고 식민화하기 위하여 "너"나 "그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한 이후에 만들어진 권력의 자기 방어적 사유의 개념이다. 따라서 장기나 체스에서 "너"나 "그들"이 만들어진 이후에 등장하는 체스의 킹, 퀸, 비숍, 나이트, 룩, 폰이나 장기의 왕, 선비(혹은 내시), 차, 마, 포, 상, 졸의 "주체"나 "주권", 혹은 "인권"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철학의 정착민이라는 "언표행위의 주체"라는 서구적 근대의 사유방식에서 벗어나 "나"나 "너", 혹은 "우리"나 "그들"을 노마드라는 "익명 또는 집합적인 3인칭", 즉 "한 명의 남자나 여자 또는 한 마리의 벼룩이나 코끼리라도 상관없는" 노마드의 생명 그 자체로 사유하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서구적 근대의 물리학에서 벗어나 탈근대의 지구적 물리학을 연구하는 장회익 교수가 이야기하는 세계나 우주를 구성하는 "온 생명(global life)"과 "낱생명(individual life)"(장회익 『삶과 온생명』 192)의 상호생성적 섭생이나 양생의 삶의 방식, 혹은 생명의 존재방식뿐만 아니라 각 개체들의 가족적이고 사회적이며 국가적인 변화와 생성의 과정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착민의 존재론을 토대로 한 체스와 장기는 코드화되어 있지만, 노마드 존재론의 바둑은 탈영토화와 재영토화 과정의 지속적인 혁명을 내재화하고 있다. 따라서 체스나 장기의 정착민적 존재론의 제국주의적이거나 식민주의적 국가철학이 아닌 바둑의 노마드 존재론이 지니는 노마돌로지의 자유로운 사고는 닫힌 공간이 아닌 열린 공간의 시간적이거나 역사적인 변화를 통하여 지속적인 탈영토화와 재영화의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일상의 혁명을 사유하는 방식이다. 서구적 근대 인문학이나 근대의 대학 학문구조가 국가철학적으로 코드화되어 있는, 즉 정착민적 존재의 "상대적 권력을 부여받은 언표의 주체"가 국가나 사회 혹은 가족이라는 닫힌 공간 속에서 코드화되어 있는 권력의 코드화와 재코드화 그리고 이중코드화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노마돌로지의 탈근대 인문학이나 탈근대의 대학이 지니는 형상의 창조를 토대로 하는 예술적 지식과 지속적으로 새로운 개념들을 창출하는 철학적 지식과 새로운 형상과 개념을 토대로 새로운 기능을 관찰하고 발견하는 과학적 지식의 상호 조화의 구성은 지속적으로 과거를 재구성하고 미래를 재형성하는 노마드적 삶의 방식, 혹은 노마드적 생명의 존재방식, 개인이나 가족 그리고 사회와 국가가 지니는 "존재의 기술"을 끊임없이 구성하고 재구성하는, 지식인 스스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을 수행하는 지식이다.


▲ 체스의 위상과 명칭 : 킹, 퀸, 비숍, 나이트, 룩, 폰 


▲ 장기의 위상과 명칭 : 왕, 차, 마, 상, 포, 사, 졸


▲ 바둑의 위상과 명칭 : 검은돌, 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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