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화병, 냄비 근성…진짜 원인은??
한(恨), 화병, 냄비 근성…진짜 원인은??
[독서통] <감정 조절>
2016.08.17 07:31:20
'한국인의 냄비 근성이 문제다.' '한국인 상당수가 화병에 시달린다.' 이런 이야기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심지어 '화병'은 한국 여성에게 나타나는 우울증의 한 종류로 <정신 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에도 올라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냄비 근성, 화병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최근에 나온 책 <감정 조절>(권혜경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은 한국인의 냄비 근성, 화병이 바로 한국인의 집단 트라우마, 즉 "개인이 예측하지 못한 충격적 사건" 탓이라고 주장합니다. 일제 강점기, 분단, 전쟁, 독재 같은 고난의 현대사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받은 트라우마가 반복되고 중첩되어 집단의 트라우마로 굳어졌고, 그 결과가 바로 냄비 근성, 화병 같은 증상으로 나타났다는 얘기입니다.

이 책의 저자 권혜경 박사가 한국인의 집단 트라우마에 주목한 계기는 2014년의 세월호 참사입니다. 희생자와 그 가족뿐만 아니라 한국인 전체가 이 참사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상처를 입었는데도, 이를 사회 전체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이대로라면, 세월호 참사 역시 한국인의 마음의 상처를 심화하는 또 다른 비극으로 남을 뿐입니다.

권혜경 박사는 <감정 조절>에서 트라우마가 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설명하고,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그런 트라우마가 어떻게 집단 트라우마가 되었는지를 분석합니다. 권 박사는 개인과 사회가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까지 제시합니다.

<프레시안>과 <시사통>이 공동 진행하는 '독서통'은 <감정 조절>의 저자 권혜경 박사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난 12일 오후 서교동 독서통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감정 조절>의 저자 권혜경 박사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우선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합니다." ⓒ프레시안(최형락)




가족과 정치 얘기할 땐 친근하게

김종배 : 이번 주의 책을 소개해주시죠.

강양구 : 이번 주에 같이 읽어볼 책은 <감정 조절>입니다. 저자 권혜경 박사의 이력이 특별합니다. 미국 뉴욕에서 심리 치료 클리닉을 운영하십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국내의 정신 건강 전문가를 대상으로 트라우마 세미나를 매년 진행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모실 수 있게 된 것도 이 세미나 때문에 한국을 방문하신 덕분이에요.

김종배 : 권혜경 박사,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권혜경 : 안녕하세요.

김종배 : 대학 다니실 때는 정치학을 전공하셨는데 (심리학으로) 궤도 수정을 하셨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권혜경 : 저는 항상 '어떻게 하면 다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정치학을 공부할 때는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를 위해 사회의 틀을 바꿔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한 사람만 변해도 모두가 변하는' 걸 봤습니다. 예전과 지향은 같지만, 방법론만 바뀐 거죠.

강양구 : 이 책에 권혜경 박사의 고민이 묻어납니다. 개인의 고민을 상담하면서 사회가 어떻게 바뀔지, 그리고 사회가 바뀌면 어떻게 개인이 행복해지는지에 관해 이야기하셨어요.

김종배 : 이 질문부터 시작해 볼게요. 명절만 되면 오랜만에 만난 식구끼리 갈등이 빚어지곤 합니다. 특히 선거철에는 정치 이야기로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싸우는 경우가 많아요.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권혜경 : 일단 '(부모와 소통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순간, 일종의 틀을 만드는 겁니다. 물론 부모에게도 벽이 있지만, 나까지 벽을 세우면 소통은 더 어려워지죠.

미국에서도 이런 문제가 일어납니다. 젊은 유권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바마에게 투표하게 만들 수 있느냐'는 고민을 많이 나눴어요. 이때 정답으로 거론된 방식이 어르신에게 재롱을 떨고, 그분들이 좋아하실 일을 하라는 거였어요. 그런 식으로 마음을 열자는 겁니다.

수긍이 안 되는 걸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려 해 봤자, 감정을 방어막으로 내세우는 순간 통하지 않습니다.

강양구 : 오바마가 좋아서가 아니라, 자식이 좋아서, 손자손녀가 좋아서 오바마에게 찍도록 하라는 거군요?

권혜경 : 그렇죠.

김종배 : 미국에서도 어르신들이 '네가 뭘 아느냐'고들 하시나 봐요?

권혜경 : 그렇죠. 하지만 계속 손자손녀가 재롱 떨고 어르신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 한 번 들으시고 말 것 두 번 들어주시죠. 노력을 한 번 하고 치우지 말고, 관계를 살리려는 노력을 두 번 하고, 세 번 하고, 열 번 하라는 겁니다.

김종배 : 언제부터인가 세대 간 정치의식의 갈등이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강양구 : 세대 간만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아는 한 50대 교수님은 동창회도 힘들다고 하시더라고요. 정치 얘기만 나오면, 동창들이 무조건 진보 정치인에게 욕부터 하니까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게 된다고요. 그러다 보니, 동창회도 안 나가게 된다더군요. 이게 개인의 문제로만 끝나면 다행인데,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사람 간 의사소통 단절 현상으로 이어지죠.

어릴 때 혼나며 큰 아이 위험 대처 능력 떨어져

김종배 : 지금까지의 얘기만으로도 이 책이 어떤 성격의 책인지 대충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고립된 개인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개인의 감정 조절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하며 이 책을 읽었습니다.

강양구 : 저는 특히 '안전'이라는 대목과 감정 조절을 연결한 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봅니다. 이 책의 부제가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서 나를 지켜내는 방법'이에요. '안전'이라는 키워드로 개인과 사회가 함께 행복해지는 방법을 책 전체에서 고민한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김종배 : 안전 이야기가 나오면서 우리는 관용어처럼 시스템 등의 이야기를 함께 하는데, 감정과 함께 이야기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안전'과 '감정'이 어떻게 연결되는 겁니까?

권혜경 : 우리가 진화하면서 가장 생존에 적합한 환경은 안전한 환경입니다. 안전이 위협받으면 어떤 식으로든 안전함을 회복하려고 우리 몸과 마음이 노력을 합니다.

이때 감정이 잘 조절되면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고, 모순된 정보를 골라낼 수 있죠. 그런데 보통은 흑백논리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일단 상대방이 적인지 아닌지를 파악해야 하니까요. 상대방의 정체가 모호할 경우에는 적으로 상정하는 게 더 안전하니, 대개의 사람은 그렇게 마음먹습니다.

김종배 : 위협 상황에서 벗어나 안전한 상황을 확보하려는 노력 자체가 감정이라는 거죠?

권혜경 : 노력 가운데 하나죠. 희로애락이 다 감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주로 분노 조절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같아요. 주의해야 할 게 있어요. 감정 조절이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은 억압하고, 늘 긍정적 생각만 하도록 하자는 게 아니에요. 슬프고, 기쁘고, 화나고, 부끄러운 모든 감정을 잘 느끼되, 특정 감정에 압도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참을 만하게 슬프고, 참을 만하게 화내라는 겁니다.

강양구 : 감정 과잉, 감정 결핍이 아닌 중용을 유지하는 게 바로 감정 조절이죠. 그런데 이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감정 조절에 실패함으로써 여러 문제가 생긴다는 거군요.

김종배 : 책을 보면, 우리가 위협에 대처하며 크게 싸우기, 도망가기, 얼어붙기의 세 가지 패턴의 방어 기제를 작동한다는 설명이 나와요. 싸운다는 건 위협에 맞선다는 거겠죠?

권혜경 : 그렇죠. 일단 위협이 닥치면 가장 먼저 작동하는 방어 기제가 싸움이죠. 그런데 상대방이 너무 강하다면 도망가기를 선택하죠. 싸우지도, 도망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는 얼어붙고요.

강양구 : 심각한 위협이 닥칠 때, 우리가 얼어붙어서 더 큰 위기에 내몰리기도 합니다. 교통사고가 그렇죠. 문만 열고 나가면 화마를 피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죽는 경우가 있어요.

권혜경 :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방어 기제는 특정 사건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작동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떤 방어 기제를 써 왔느냐가 우리 머리에 저장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항상 야단치는 무서운 분이었어요. 아이가 야단치는 아버지에게서 도망가기가 쉽지 않죠. 그 경우 아이는 얼어붙는 방어 기제를 습득하죠. 이런 사람은 커서도 위협 상황이 닥치면 싸우거나 도망가기를 잘 쓰지 못합니다. 늘 얼어붙어버리죠.

건강한 사람이라면 상황에 따라 세 가지 방어 기제가 잘 작동합니다. 맞서야 할 때 맞서고, 도망쳐야 할 때 도망치고, 가만히 있는 게 도움이 될 때 가만히 있어요. 얼어붙기는 완전히 죽을 만큼 위협적인 상황이 닥칠 때, 우리의 시스템이 '셧 다운' 되는 겁니다. 어릴 때 지속적으로 위협에 노출되었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얼어붙는 경우가 많아요. 

▲ 세월호 참사는 사람들 가슴 깊숙한 곳에 상처를 남겼다. 이 상처를 무시할 때, 트라우마는 회복하지 못한다. ⓒ프레시안(최형락)


화병, 냄비 근성은 집단 트라우마 증세

강양구 : 한국인 특유의 감정 조절 실패 사례를 얘기해보면 좋을 듯합니다. 한국인이 앓는 병으로 화병이 있습니다. 한국 여성이 앓는 우울증의 한 증상으로 정신 질환 명칭으로 아예 등록된 병입니다. 또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인 특유의 성격으로 냄비 근성을 이야기하는 분도 많습니다.

김종배 : 화병, 냄비 근성, 또 한(恨)도 있죠. 우선 화병부터 이야기해 보죠. 화병이 우울증의 일종이라고요?

권혜경 : 화병은 특히 한국 중년 여성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우울증입니다. 이 병은 일반적인 우울증과는 증세가 약간 다릅니다.

화병을 자세히 보면 분노와 무기력감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보통 분노가 일어나면 행동이 따라오는데, 화병 환자는 그렇지 않아요.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는 상태죠. 속으로는 울화통이 터지지만, 겉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죠. 이렇게 되면,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합니다.

김종배 : 이건 한의 정서와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권혜경 : 한의 정서는 슬픔이죠. 슬픔인데,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뭔가 행동을 하기 보다는 슬픔을 참거나, 슬픔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상태죠.

강양구 : 화병이 분노하면서도 무기력감을 느끼는 것처럼, 한은 슬프지만 체념한다는 것에서 공통된 정서가 있네요.

권혜경 : 네. 둘 모두 아픈 상태지만, 그 아픔을 당연시하는 대응 자세죠.

강양구 : 반면 냄비 근성은 아주 적극적으로 성격을 표출하는 행위잖아요?

김종배 : 그 대목은 아예 책의 해당 부분을 읽어드릴게요.

"상처가 조금만 건드려져도 이전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기에 반응이 즉각적으로 오고, 더 많이 아프지만 노력해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음을 경험으로 알기에 빨리 정신 차리고 생업에 집중하는, 따라서 변화를 위한 노력에 절망하고 무감각해지는 현상이다."

냄비 근성을 이렇게 규정하셨어요.

강양구 : 놀라운 분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밑줄 두 번 긋고 읽었습니다.

김종배 : 권 박사께서는 화병, 한, 냄비 근성을 역사적, 사회적 경험으로 인해 한국 사람이 겪은 집단 트라우마의 결과로 나타나는 보편적 정서로 보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분단, 한국 전쟁, 또 군부 독재의 경험이 바로 이런 트라우마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겠죠?

권혜경 : 제가 이런 문제에 관심 가진 이유가 트라우마를 공부하면서부터입니다.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를 둘러싼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부분 유대인입니다. 중요한 연구 문헌의 저자, 교수(교사), 학생 등이 모두 유대인입니다. 트라우마를 공부하면서 유대인 동료에게 부러움을 표한 적도 여러 번 있어요. '너희는 전 세계 사람이 너희 아픔을 알고, 이를 증언하게 만들었구나.' 이렇게요.

한국인의 아픔은 어떻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외국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이런 아픔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죠. 분단의 아픔, 전쟁의 아픔, 독재 치하의 아픔을 드러내려고 하면 곧바로 (빨갱이라는 식의) 색깔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피해자는 대중으로부터 고립되고 말았죠.

유대인은 피해자가 미처 해소하지 못하는 아픔을 사회가 함께 짊어지도록 했습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런 노력이 부족했죠.

피해자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라

강양구 :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트라우마 치유 작업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질 수 있나요?

권혜경 : 우선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피해자가 있는 그대로 증언하도록 사회가 배려야 줘야 해요. 제가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전후 사정은 모릅니다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피해자 가족이 가장 크게 분노한 이유가 자신의 경험, 자신의 증언이 매체를 통해서 그대로 외부인에게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하게 하고, 울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울도록 해야 합니다. 절대로 "하지 마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려는 노력이 사회적 차원에서 필요합니다.

강양구 : 유대인 사례와 한국 사례가 비교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 사례의 경우, 수용소에서 그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증언하는 작업부터 광범위하게 이어졌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현대사의 상처를 겪은 이들의 증언을 듣지 않으려 했죠. 대신 '우리는 고난을 극복한 국가'라는 식으로 모두 묻고 넘어가려고만 했던 것 같습니다.

김종배 : 사회가 강제로 상처 입은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 걸 보면서 사람들은 무력감을 느끼는 일이 반복되었고, 결국 그 상처가 일종의 집단 정서가 되어버렸다고 봐야겠군요.

권혜경 : 네. 그나마 세월호 참사의 경우 소셜 미디어가 발달했으니 많은 사람이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일어난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의 사례는 철저히 대중과 분리되었고, 오랫동안 광주 시민이 고스란히 상처를 떠안고 살아야만 했죠. 그러면서 그들이 감당해야 할 트라우마가 엄청났죠. 

김종배 : 세월호의 경우도 참사 직후 거의 모든 국민이 공분하고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제 그만해라'고 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권혜경 : 그만할지 여부는 피해자가 결정하는 겁니다. 외부인이 할 이야기가 아니죠.

▲ '저들의 일'은 언제고 나의 일이 될 수 있다. 성주군민의 싸움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성주군민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교육하고, 관심 가져라

강양구 :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개인의 아픔이 이처럼 사회적 문제로 연결되는 고리를 정확히 짚는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체념이 쌓이면서 변화할 사회적 동력 자체가 소진되어 간다고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세월호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일종의 냄비 근성일 텐데, 이 역시 무력감에서 나타나는 정서겠네요. 어차피 안 된다. 이런 식의….

김종배 : 이를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요?

권혜경 : 교육과 사랑, 즉 관심입니다. 왜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느냐를 알려줘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피해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사회도 더 건강해진다는 걸 알려야죠. 나치 치하 시인이었던 마르틴 니묄러의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라는 시를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똑같습니다. 정치적 지형으로는 보수적인 성주군민이 지금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십니다. 그분들이 자신들이 피해자가 되리라고 꿈에나 생각했겠어요? 하지만 이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나도 이런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김종배 : 사드 국면에서 가장 놀랐던 게, 성주군민의 초기 불만 가운데 하나가 언론이었습니다. 왜 우리 목소리를 왜곡해서 전달하느냐는 거였죠. 

강양구 : 세월호 참사 때도 마찬가지였죠. 한국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매우 비슷한 것 같습니다.

김종배 : 실제로 성주군민 가운데 한 분이 '이제야 세월호 유족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언론에 얘기하기도 하셨습니다.

트라우마는 내리물림 된다

강양구 : 트라우마가 세대 사이에 대물림되는 메커니즘을 책에서 설명하신 부분도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권혜경 : '세대 간의 저주'라는 말도 있죠. 제대로 된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서는 삼대를 치료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제대로 된 변화를 위해서는 100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한국 환자를 치료할 때의 경험이 영화 <국제시장>을 보며 받은 인상과 매우 비슷했습니다.

▲ "잘못한 사람이 진실하게 사과하고, 이를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은 아주 중요합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한 내담자 사례입니다. 내담자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상당히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저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한 목표였죠. 내담자가 다섯 살 때 한국 전쟁이 터져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어린 나이에 내담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됐죠. 역시 도덕관념이고 뭐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죠. 이후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오셨습니다. 미국에서도 힘들게 살았죠. 오직 돈을 모으는 걸 목표로 힘든 삶을 버텼습니다.

이 과정에서 내담자는 한 번도 보호받는다는 경험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을 무척 사랑함에도, 어떻게 사랑을 줘야 할지 몰랐습니다. 계속해서 아이를 비난하기만 했죠. 왜 너는 먹을 게 풍부하고, 내가 학교도 보내주는데도 불만이냐고. 아이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극심한 분노를 표출했죠. '너는 배가 불렀다'는 식으로요.

그러다 보니, 아들이 심각하게 우울증과 불안 증세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예전 세대가 정신 질환을 잘 모르잖아요. 아들이 이러니 '꾀병 부린다'며 더 강하게 윽박질렀죠.

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동 복지가 잘 된 미국에서 평생을 자랐으니, 주위 친구와 늘 비교가 되는 겁니다. 나의 가정과 친구의 가정이 너무 다른 거예요. 이 격차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일깨우기 위한 효과적인 나름의 방법을 찾았어요. 어떻게? 자기 삶을 파괴하는 식으로요. 내 삶을 파괴하면 아버지가 손가락질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물론 의식적인 건 아니고, 무의식적인 선택이었지만요. 

김종배 : 개인의 삶이 결국 역사와 사회의 씨줄과 날줄 위에서 이뤄지는 것이니, 영향을 자연히 받겠죠. 문제는 이런 경험이 대물림되는 과정에서 악영향을 더 키울 수 있다는 거군요.

우리가 처음 명절 때 가족 간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다투다 결국 벽을 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결국은 원초적 경험이 다른 데서 이런 문제가 오는 거겠죠.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하면 누가 봐도 상대가 안 되는데, 어르신은 절대 믿지 않는다고. 왜? 한국 전쟁을 겪은 분에게 가장 무서운 건 탱크인데, 일단 북한에 탱크가 많으니…. (웃음)

권혜경 : 일단 감정이 자극되면, 앞서 말씀드렸듯이 논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정치 기술에도 공포 정치라는 게 있습니다. 사회가 공포를 가하면, 개인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뇌는 감정이라는 필터를 거쳐 사실을 받아들이고 판단하는데, 위협을 받으면 (판단하는 영역인) 인간의 뇌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오직 생존을 위한 파충류 뇌만 작동하게 되죠.

김종배 : 똑같은 뉴스를 두고도 감정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고요.

권혜경 : 네. 정치인 가운데도 보수적 정치인은 보통 감정을 선동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죠. 반면 진보적 정치는 논리를 펴는데 집중하고요. 그런데, 사실을 논리적으로 아무리 얘기해봤자 대중에겐 먹히지 않습니다.

김종배 : 이명박 정부 시절 자주 나온 이야기인데, 자수성가한 사람과는 함께 일하지 마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서 자기중심적이고, 내가 옳다는 신념이 너무 강하다는 거죠.

권혜경 : 임상적으로 보면, 이 역시 상처입니다. 내가 고생해서 성공하는 동안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경험을 이런 분들이 갖고 계시죠.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진실한 사과의 위력

강양구 : 앞에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교육과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가해자의 책임 묻기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권혜경 : 필요합니다. 잘못한 사람이 진실하게 사과하고, 이를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은 아주 중요합니다.

김종배 : 우리가 뉴스에서 가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나는 딴 것 바라지 않으니, 영혼이 담긴 사과 한 마디만 해라"고 외치는 장면을 봅니다. 이게 정말 그런가요?

권혜경 : 네. 절실한 요구입니다. 책에 의료 사고 피해자 사례를 담았습니다. 아주 간단한 수술이었는데, 의사의 실수로 인해 죽을 뻔한 피해자가 있어요. 이 분이 의사를 만나려 했는데, 의사는 피해자를 만나주지도 않고, 관련 기록도 숨기려 했죠. 이에 너무 분노한 피해자가 소송까지 가서 이기셨어요. 이 분이 늘 하시던 말씀이 "와서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사고는 일어날 수 있거든요. 의사가 고의로 그러지 않은 건 이분도 당연히 아십니다.

강양구 :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도 진심어린 사과를 못 받았기에 더 큰 상처를 입으셨죠. 옥시와 같은 기업이 계속 '돈을 얼마 주겠다'는 식으로만 접근하는데 크게 분노하시더군요. 그런데, 이런 장면을 보고 많은 사람은 '돈 받을 만큼 받았으면 됐지, 뭘 더 달라는 거냐'는 식으로 생각들 하시더라고요.

권혜경 : 제3자로서 자기는 나름대로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죠. 감정의 메커니즘을 모르는 거죠. 상대방의 감정만 제대로 알아준다면, 사회적 기회비용도 크게 줄어듭니다. 진실한 사과 한 마디만 해결될 일이, 법적 소송으로 가는 경우가 빈번하니까요.

잘 후회하면 분노를 다스릴 수 있다

김종배 : 여기서부터 서평단 질문을 잠시 받겠습니다.

서평자 : 우리가 방어 기제로서 싸우기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싸우다가 실패하는 결과가 두려워서 피하곤 하잖아요. 세월호 집회 현장에 싸우러 나갈 수 있지만, 그 과정이 너무 불편하고, 결과도 두렵거든요.

권혜경 :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할 겁니다. 싸우려고 했는데 안전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도망가기를 선택합니다. 싸우기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뭐냐? 안전하면 싸우게 됩니다. 싸우는 게 안전하다는 걸 알게 되면, 우리는 분노할 때 마땅히 분노를 표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를 사회가 인위적으로 막으면, 오히려 내부적으로 점점 불만이 커지죠.

그럼, 보다 안전하게 싸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연대죠. 여럿이 모이면 싸움이 더 쉬워지죠.

서평단 :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는 개인 차원의 방법이 있을까요?

권혜경 : 내가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했던 상황을 다시 한 번 복기해보는 게 좋습니다. 그때 내가 어떻게 대응하는 게 좋았을까 상상하는 게 치유에 도움 됩니다. 우리 뇌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상상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분노를 많이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나중에 비슷한 일이 닥쳤을 때 감정 조절하는 게 쉬워지죠.

우선 감정 조절을 잘 하기 위해 내가 어떤 방어 기제를 자주 쓰느냐를 알아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화를 버럭 내실 테고, 또 어떤 분은 뭔가 때리거나 마구 달리시는 등의 행동을 취하십니다. 이런 분은 화가 나면 특정 행동을 하도록 교감 신경(액셀러레이터)이 발달하신 거예요.

그런데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브레이크)이 균형을 갖춰주는 게 우리에게 좋거든요. 따라서 활동적인 분은 부교감 신경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죠. 심호흡이나 명상으로 감정 조절을 하는 훈련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일상에서 생각나실 때마다 심호흡 훈련을 하시면 몸이 기억해서, 화날 때도 적절히 반응하게 됩니다.

▲ <감정 조절>(권혜경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반대로 화날 때 잠을 자거나, 일단 문제를 회피하려는 분이 계시죠. 이분들은 습관적으로 화나면 부교감 신경이 작동하는 경우예요. 이런 분은 교감 신경을 활성화하도록 달리기 같은 운동에 습관을 들이시는 게 좋습니다.

강양구 : 살다 보면,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많은 갈등을 일으키는 이들이 부부 사이잖아요. 책에 보면 부부 관계를 위한 부분도 있더군요. 원만한 부부관계를 위한 팁을 주신다면요? 

권혜경 : 상대방의 유형을 이해하면 원만한 관계를 꾸려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대체로 아내는 집착형이고, 남편은 회피형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은 집착형이 원하는 걸 주면 됩니다.

보통 부부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상대방이 원하는 걸 주지 않고, 내가 원하는 걸 주고는 '나는 상대에게 이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그러니까 선물은 늘 오가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선물을 받지 않았죠.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는 게 중요합니다. (웃음)

김종배 : 오늘 독서통은 <감정 조절>이라는 책으로 꾸몄습니다. 나와 주신 권혜경 박사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권혜경 : 감사합니다.
이대희 기자 eday@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기자가 되면 거지부터 왕까지 누구나 만난다고 들었다. 거지한테 혼나고 왕은 안 만나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