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JP, 요정에서 日 외교관과 밤새…
박정희- JP, 요정에서 日 외교관과 밤새…
[독서통] <불편한 회고>
2016.08.31 07:14:00
1965년 6월 22일, 한국 외무장관 이동원, 한일 회담 수석대표 김동조와 일본 외무장관 시이나 에쓰사부로, 수석대표 다카스기 신이치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한일 기본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로써 두 나라는,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처음으로, 동등한 나라 대 나라로 수교를 맺었습니다.

한일 수교 반세기가 지났습니다만, 여전히 두 나라의 심리적 거리는 멉니다. 지난해 한일 위안부 합의가 국내에서 얼마나 큰 비판을 받았는가만 생각해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 상당수는 여전히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대다수 젊은이는 왜 한국인이 이토록 분노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한국 정부는 "제대로 된 조약을 맺으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심지어 윽박지르려는 듯합니다.

물론 일본이 36년의 한반도 강점 역사를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기에, 한일 관계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일본의 사과를 받기 어려운가도 한번 따져봐야 합니다. 한일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일본의 잘못만 있었다, 라고 말하면 속은 시원합니다만, 이게 사실이라고 믿어버리고 넘어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마수로부터 해방된 후, 한일 간 70여 년의 외교 역사를 정리한 <불편한 회고>(이동준 지음, 삼인 펴냄)는 그간 한국과 일본 간 외교에서 한국 정부가 실제로 어떤 일을 했는지, 한일 간 막후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독자에게 알려줍니다. 우리가 대강 이해하고, 혹은 언론을 통해 대충 훑고 넘어간 이야기의 진실은 독자의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합니다.

한일 관계는 처음부터 잘못 씌어졌습니다. 일본이 한국에 '부분적으로나마' 사과하는 시대 대상은 1937년부터 해방까지, 즉 일제가 전쟁에 뛰어든 기간으로 한정됩니다. 1910년부터 1937년까지, 일제 강점기의 역사는 사과 대상이 아닙니다. 애초 두 나라 사이 협상이 이런 식으로 진행됐기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깊이 이 분야에 관심 갖지 않은 이라면 놀랄 만한 이야기가 이 책 곳곳에 숨겨졌습니다.

<프레시안>과 <시사통>이 공동 진행하는 '독서통'은 지난 29일 서울 서교동 <시사통> 스튜디오에서 이 책의 저자인 이동준 기타큐슈 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와 함께 어긋난 한일 외교사를 이야기했습니다.



한일 수교 반세기, 굴욕의 역사였나

김종배 : 이번 주 책은 무엇입니까?

강양구 : <불편한 회고>라는 책입니다. 부제가 이 책의 내용을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외교 사료로 보는 한일 관계 70년'입니다.

김종배 : 요즘 국면에 딱 맞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굴욕의 역사라고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강양구 : 책을 읽고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았습니다. 기가 차는 일이 많았더군요.

김종배 : 저자가 어떤 분입니까?

강양구 : 이동준 기타큐슈 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입니다. 이력이 독특하십니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셨고, 뜻한 바가 있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셨습니다. 일본에서 한반도 문제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공부하시고 지금은 일본 학생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김종배 : 저자 이동준 교수를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동준 : 네, 안녕하세요.

김종배 : <한국일보>에 연재하신 내용을 토대로 쓴 책이죠?

이동준 : 그렇습니다.

김종배 : 글 쓰신 계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이동준 : 작년이 해방 70년, 한일 수교 50년이었습니다. <한국일보>가 관련 기획을 요청했습니다. 사실 제가 한일 관계를 공부하긴 했습니다만, 이 분야를 공부한 시간이 6~7년 정도에 불과했기에 고민을 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일단 저질러 보기로 한 일이 이렇게 책으로도 이어졌습니다.

김종배 : 이 책은 철저히 사료에 기초했어요.

강양구 : 방금 겸손의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책을 읽어보면 최근까지의 한일 관계 연구 성과도 두루 갈무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특히 식민 지배의 합법-불법 논란을 처음과 말미에 반복해서 두 차례 짚으신 부분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제가 한일 관계에 무지했음을 이 책을 보고 새삼 깨닫는 계기였습니다. 1965년 한일 수교 당시 "병합 조약 '이미' 무효"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 문구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이 문구가 왜 식민 지배가 합법이냐, 불법이냐에 관한 논란으로 이어지는지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한일 관계를 둘러싼 수많은 문제를 놓고서 왜 우리나라 정부가 국민 앞에서는 큰 소리 치지만, 국제 사회에서는 큰 소리를 못 내는지도 명확히 알았고요.

▲ 조선 황실을 주권을 일제에 갖다 바쳤다. 이후 제국주의자들에게 조선과 일제는 '한몸'이 되었다. <조선일보> 1936년 1월 1일 신년사. 출처 : 민주언론시민연합


열강 '일본의 조선 지배는 합법' 인정

김종배 : 우선, 우리의 해방부터 짚어 보죠. 일본인은 태평양 전쟁 패전을 놓고서 '성단(聖斷) 신화'를 갖고 있다고요. 성단 신화가 무슨 뜻입니까?

이동준 : 히로히토 일왕(천황)이 '성스러운 결단'을 내려 전쟁을 끝냈다는 겁니다. 전쟁을 더 진행했다면 많은 신민을 희생할 수 있으므로, 일왕이 전쟁을 스스로 끝냈다는 거죠. 히로히토를 전쟁 책임에서 빼낸 겁니다. 일본에서 일왕은 신인데, 신이 틀린 결정을 내릴 수는 없으니 이런 신화를 만든 거죠.

이런 신화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은 패망한 게 아닙니다. 일본, 특히 일왕이 능동적으로 전쟁을 끝낸 거죠. 일왕의 결단에 많은 신민이 고마워해야 합니다. 여기엔 조선인도 포함되고요.

강양구 : 종전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중이더군요. 실은 미국과 일본이 더 빨리 전쟁을 끝낼 수 있었는데, 전쟁이 늘어진 가장 큰 이유가 히로히토 일왕을 전쟁 책임에서 구하기 위한 미일 물밑 협상이 길어졌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대목과도 연결이 되네요.

이동준 : 1910년 8월 22일 조선이 망할 때, 고종 황제가 나라를 일본에 '영구히' 맡겼습니다.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죠. 이 조약 제1조가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입니다. 왜 그가 이런 결정을 했을까요?

유일한 이유가 종묘사직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집안 지키자고 나라를 일본에 바친 거죠. 나라를 바친 대신에 자기 집안을 일본 지배 계층의 일원으로 데리고 간 겁니다. 히로히토 일왕의 결정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항복 선언은 나라가 아니라, 황실을 지키려는 노력의 결과죠.

김종배 : 이 '성단'에서 결정된 게 조선의 독립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분리'였다면서요?

이동준 : 국제법적으로, 즉 당시 국제 질서인 제국주의 법으로 보면, 조선과 일본은 한 국가입니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승인을 받은) 합법이었어요. 그런데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그 후 배상 협상 과정에서 원래 한 몸이었던 조선이 일본에서 분리(separation)됐습니다. 원래 한 나라였으니 독립이 아니죠.

김종배 : 이로 인해 여러 문제가 비롯된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열강의 전후 한반도 처리, 대일 배상 문제 등이 모두 이 분리 개념에서 비롯했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이동준 : 맞습니다.

일제 강점기는 합법? 불법?

강양구 : 이와 관련해 앞서 잠시 언급한 '이미 무효' 개념을 이야기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1965년 6월 22일, 두 나라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항의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already)'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에 관해 일본은 "1948년 8월 한국 정부 성립 시에 효력을 상실했다"고 해석하지만, 한국은 "(병합 조약이) 처음부터 무효"라고 해석한다고요?

이동준 : 과거사 인식의 출발부터 다르죠. 우리 과거사 인식의 출발점은 1910년입니다. 두 나라의 병합이 일제의 강압으로 이뤄졌다고 보죠. 이후 일제의 식민 지배는 당연히 불법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제 '강점기'라고 하죠. 반면 일본은, 그리고 미국은 과거를 이렇게 보지 않습니다. 식민 지배는 두 나라 간 정상적으로 체결된 조약에 따라 이뤄졌다고 인식하죠.

김종배 : 그러니 뒤늦게 한국이 일본에 대고 '너희가 그간 강탈한 걸 다 토해내라'고 하면 받아들이지 않겠군요.

이동준 : 그런 셈이죠. 한일 수교가 어디에서부터 잘못 됐는가를 이제 본격적으로 짚어 보죠. 태평양 전쟁 전후 처리를 위해 1951년 열린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강양구 : 한국이 이 조약 당사국으로 낄 수 있었는데, 열강의 반대로 불가능했다면서요?

이동준 : 특히 영국이 반대했죠. 미국은 한국을 당사국에 넣을지 말지 고민하다 말았고요.

김종배 : 왜 영국이 그렇게 반대한 겁니까?

이동준 : 영국은 중국, 기타 동남아시아 지역의 움직임을 신경 썼습니다. 한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해 버리면, (일본처럼 식민지를 경영한) 자국에 불리한 전례를 남길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반면, 미국은 필리핀, 괌 정도를 제외하면 보유한 식민지가 많지 않았죠. 그 차이가 있었습니다.

강화 조약은 전쟁에서 이긴 자와 진 자 간에 체결하죠. 여기에 식민지는 조금 이상한 존재입니다. 전쟁 당사국으로 넣자니 이상하고, 빼자니 역시 애매하죠. 결국, 강대국이 (한국을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른 거죠.

김종배 :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거군요. 이 문제가 과거사를 둘러싼 70년 한일 간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고요.

한국도 '일제의 식민 지배는 유효했다'는 입장?

강양구 : 대일 관계에 관해 우리가 일본 탓을 주로 많이 하고, 또 일부는 당시의 외부 환경, 즉 국제 사회의 맥락을 짚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중요하게 다루는 또 하나가 한국 역대 정부의 잘못 혹은 무능입니다. 화나는 대목이 너무 많더라고요.

김종배 : "이게 나라냐"는 말이 절로 나오는 대목이 많습니다.

▲ 초기 일본에 큰 소리 치던 이승만 정권은 한일 보상 문제 범위를 일제의 전쟁 시기로 축소해버렸다. ⓒ연합뉴스

이동준 : 우선 대일 청구권 협정부터 짚어 보죠. 청구권 행사를 위해서는 주고받을 걸 우선 계산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건국 후, 이승만 정부의 기본 입장은 '일본에 큰 규모의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장차 한일 회담에 대비해 1949년 9월 '대일 배상 요구 조서'를 작성하기도 했죠.

그런데 '배상'은 전승국이 패전국에 요구하는 겁니다. 전승국은 패전국이 잘못한 사실을 정리하고, 그 대가를 요구하죠. 하지만 한국은 앞서 짚었듯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당사국으로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전승국이 아니죠. 이로써 대일 관계에서 한국은 배상은커녕, 겨우 일부 청구권을 요구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 역시 목소리만 컸지, 뒤에서 태도는 달랐습니다. 일제 식민 지배 전체에 관한 배상이 아니라, 일제의 전쟁 행위, 즉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한국과 한국인의 피해 보상만을 요구했습니다. 따라서 1910년부터 1937년 중일 전쟁 발발까지는 협상의 논의 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김종배 : 그렇다면, 일제의 식민 지배는 유효했다는 입장이었던 건가요?

이동준 : 그건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에서 한국이 입은 피해만 논의하라는 거죠. 식민지 피해가 아닌, 전쟁 피해 보상 논의입니다.

물론 이승만 정부도 처음엔 당연히 식민지 기간 전체에 관한 피해 보상을 요구했겠죠. 하지만 미국 눈치를 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그러니 1937년부터 피해 보상 대상으로 계산한 거죠.

강양구 : 일본은 당연히 '식민 지배는 합법'이었다는 태도를 지니게 되고, 전쟁 기간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한 사실 등과 관련해 한국이 청구한 피해만 보상해주겠다는 입장을 보이게 된 거군요.

이동준 : 그렇죠. 심지어 일본이 이제 협상 지렛대를 쥐게 됩니다. 일본도 처음에는 소액의 보상은 가능하다는 입장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이 엄청난 수준의 보상을 요구하면 안 되겠다 싶으니, 반대로 '식민 지배로 오히려 일본이 한국을 도왔다'는 식의 입장을 내놓기 시작했어요. 일종의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이 나온 겁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구보타 망언'입니다. 1953년 10월 15일 도쿄에서 열린 제3차 한일회담 재산청구권위원회에서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가 "일본 측도 (한국에)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6년간 민둥산을 푸르게 만들었고, 철도를 깔았고, 수전을 늘리는 등 많은 은혜를 한국인에게 베풀었다"고 했죠. 일본의 과거사 관련 망언이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김종배 :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승만 정권이 다른 건 몰라도, 일본에 관해서는 매우 강경했다고 기억하지 않습니까? 대일 배상 요구도 강경했는데, 박정희 정권이 이를 무너트렸다고 알고 있죠. 그런데 책에서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동준 : 이승만 정권 성립 당시부터 우리 스스로 일본에 요구할 내용을 제한했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이승만 정권의 차이라면, 이승만 정권은 그래도 계산은 똑바로 했다는 정도죠. 물론 이 계산의 범위는 1937년부터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계산도 안 했죠. 기존에 계산한 걸 무시하고 '땡 처리'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실패작 한일 수교

김종배 : 이승만 정권은 일제가 강탈한 문화제 목록을 만들어 되돌려주길 요구했는데, 박정희 정권이 다 무시해버렸더군요. 이제 박정희 정권으로 넘어가 볼까요?

사실 박정희 정권 당시 한일 회담(한일기본조약)은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두 나라 수교가 시작된, 역사적 사건이니까요. 김종필-오히라 담판 등은 우리 국민이 익히 알죠. 박정희 정권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박정희가 조국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종자돈을 필요로 했고, 돈을 조달할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청구 수준을 낮췄다"고 하죠. 교수께서는 어떻게 보세요?

이동준 : 완전히 부인하긴 어렵습니다. 그런 측면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도 우리는 미국의 원조를 받았습니다. 국방비는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로 조달했습니다. 미국이 밀가루를 원조하면 정부가 이를 국민에게 팔아서 국방비로 썼죠.

그런데 미국이 비록 큰 나라라곤 하지만, 원조 자산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1950년대 말이 되면 미국의 대외 원조 능력이 한계에 달합니다. 그러니 동맹국인 일본에 원조를 부담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세계적 흐름에 따라 한국과 일본의 협상이 이뤄진 겁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떤 결단을 해 일본과 협상했다고 봐선 안 됩니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청구권 협상을 빨리 끝내라'고 압박했고, 두 나라가 이를 수락한 겁니다.

강양구 : 그 와중에 계산기라도 잘 두드렸다면 더 받을 걸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마저도 제대로 못했군요.

이동준 : 당시 한일 회담 결과 일본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총 5억 달러의 지원금을 한국에 제공했습니다. 일본이 필리핀에 배상 명목으로 지급한 8억 달러보다 못하죠. 이 중 중요한 게 무상 3억 달러입니다. 강제 동원된 노동자 등의 미수금이 3억 달러의 대부분입니다.

김종배 : 원칙대로라면 당연히 한국 정부가 당시 피해자에게 나눠줘야 하는 돈이군요. 그들의 밀린 월급이니까요.

이동준 : 맞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일본은 자신들이 나눠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반대했죠.

김종배 : 일본이 무상으로 지원해야 할 돈이 아니라, 당연히 토해내야 할 돈이군요. 부채를 해결한 것뿐입니다.

이동준 : 3억 달러의 정체가 뭐냐를 두고 일본에서도 논란이 됐습니다. 일본은 아시다시피 내각제 국가입니다. 국회에서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강양구 : 당시만 해도 일본 정치권에서는 사회당, 공산당 등 혁신계 정당의 목소리가 컸죠.

이동준 : 네. 그래서 당시도 일본 의회에서 3억 달러의 내용이 뭐냐를 두고 설명이 오갔습니다. 기본적으로 개인 청구권입니다. 전쟁 기간 피땀 흘린 노동자,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 위안부로 끌려간 사람에게 미처 지급하지 않은 대가입니다.

▲ 일본 우익의 지원을 받은 박정희 정권은 한일 관계의 잘못된 단추를 꿰었다. 1977년 9월 29일 청와대에서 악수하는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연합뉴스


미쓰비시 정치 비자금 받은 박정희

김종배 : 국가가 그 분들에 가야 할 돈을 갈취한 셈이군요. 그런데 그 뒤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본의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았더군요.

이동준 : 네. 역사에 묻힌 사건이 매우 많습니다. 공화당 창당 자금, 자민당-CIA 관련 비자금 등에 관한 설명이 과거부터 여러 차례 제기됐습니다. 특히 청구권 자금이 들어오는 과정을 짚어 봐야 하는데, 청구권 보상이 돈으로 이뤄진 게 아닙니다. 물자를 받았습니다. 플랜트 등을 들여왔죠.

김종배 : 그런데 그 플랜트는 일본 기업이 지었고요. 그 기업은 일본 정부에 돈을 받아 나가는 식으로 처리됐고요.

이동준 : 그렇죠. 한일 관계에서는 그게 일본 정부의 지원이 됐죠. 결국, 일본 기업이 돈 번  겁니다.

강양구 : 미쓰비시와의 뒷거래 이야기를 여기서 정리하면 좋을 듯합니다. 책 내용을 읽어 보죠. 미쓰비시의 한국 대리인 역할을 한 박제욱의 증언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1965년 한일 협정 이전부터 미쓰비시는 군사 정부에 정치 자금을 제공해왔다. 사실상 미쓰비시의 한국 대리인 역할을 해온 박제욱은 "1963년 대선을 앞두고 미쓰비시로부터 100만 달러를 빌려 대선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서 박제욱이 '빌렸다'고 말한 것은 몇 년 뒤 당인리발전소 프로젝트를 미쓰비시에 주는 형식으로 갚았기 때문이다. (…) 더욱이 박제욱은 1967년 6대 대선 때도 박정희를 위해 500만 달러(현재 가치로는 3500억 원 추정)를 조달했다고 회고했다. 이 돈 역시 미쓰비시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홍콩상하이은행에서 인출한 돈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책임지고 국내로 들여왔다. 대신 김 부장은 공식 환율과 암시장 시세 간의 차액 10퍼센트를 챙겼다."


김종배 : 일종의 리베이트로군요.

이동준 : 그렇죠. 황당한 게, 미쓰비시가 일본의 큰 재벌입니다. 전쟁 전부터, 일제 강점기부터 군수 산업으로 성장한 재벌입니다. 한국인 상당수가 이 기업에 끌려가 일본 현지에서 강제 징용살이를 했습니다. 일본 각지의 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김종배 : 미국이 원자 폭탄을 떨어뜨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도 일했죠. 피폭 피해자의 상당수가 한국인인데, 강제 징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동준 : 네. 그런데 이 기업이 전후에 되살아났습니다. 미국이 해체했지만, 나중에 다시 뭉쳤죠. 미쓰비시 사사(社史)를 보면, 기가 찹니다. 미쓰비시가 어떤 일까지 했느냐면, 박정희 정권의 무역 증진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미쓰비시상사의 해외 지점 인력이 한국 물건을 팔아주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는 한국의 웬만한 기간 시설 사업권을 이 회사가 다 따냅니다.

강양구 : 당인리발전소(현 서울화력발전소) 건설, 경인선 전철화 사업, 쌍용시멘트 공장 건설, 수출공업단지 조성,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서울지하철 사업, 대한조선공사 확장 공사, 신진자동차 기술 제공, 엘리베이터 제조 기술 제공 등을 모두 미쓰비시가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반을 이 회사가 닦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네요. 이 과정에서 엄청난 리베이트가 오갔고요.

이 유착에서 가장 황당했던 건, 박정희, 김종필과 일본 우익이 한국의 요정에서 밤새 술 마시고 놀 정도로 친했다는 겁니다. 역시 책의 내용을 정리해 보죠.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에 앞서 오노 반보쿠(당시 자민당 부총재)는 "박 대통령과는 서로 '부모와 자식'이라고 자인할 정도로 친한 사이"라면서 "아들의 화려한 무대를 볼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 그럼에도 박정희 정권과 일본 측 우익 인사들과의 '의리와 인정'의 관계는 과거 일제 강점기 시절의 요정 문화로 부활해 점점 무르익어갔다.

"그날(1962년 12월 12일) 밤 용산의 안가에서 박정희, 김종필, 오노, 나(이세키 유지로 당시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장) 이렇게 네 명이 밤새 퍼마셨다. 오노 씨는 혈압도 높고 이런 자리에서 마시고 쓰러지면 곤란하다면서 먼저 침실에서 쉬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이튿날 아침까지 여기에 있겠다고 해서 둘을 상대로 마셔야 했다. 이 두 사람이 술이 강해 과하게 마셨고 결국 정신을 잃었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거기서 자고 있었다. 재미있었다."


이동준 : 일국의 국가 수반이 다른 나라의 장관도 아니고, 처음 만난 외무 공무원, 그것도 국장급과 밤새 술 마셨다는 건 창피한 일이죠.

신군부는 허세 부린 깡패 수준

김종배 : 전두환 정부 들어 신군부가 40억 달러의 한일 '안보 경협'을 받아냈다고 합니다. 이건 무슨 돈입니까?

이동준 : 일본에서 전두환은 조금 독특하게 해석해요. 예전 군부(박정희 세력)는 만주 인맥으로 엮여서 잘 아는데, 신군부는 어떤 세력인지 모르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신군부가 일본에 돌발적인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일본을 공산 세력의 위협에 맞서 지켜주니, 그 비용을 지불하라는 겁니다.

1981년 4월 23일, 신군부가 스노베 료조 주한 일본 대사에게 처음 요구한 내용은 연간 20억 달러의 협력 금액을 5년간 내놓으라는 거였습니다. 일본에서 처음에는 '당돌하다'는 분위기였습니다. '젊은 군인들이 미쳤다'는 거죠.

김종배 : 이 대목에서 사실 저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래, 맞아. 받아내야지!'하는 생각과 더불어 한편으로는 '영락없는 조폭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동준 : 결국 신군부의 태도는 읍소로 바뀌었습니다. 일본이 돈을 못 내놓겠다고 하니, 나중에는 한 푼이라도 달라는 식으로 매달렸죠. 노신영 외교부장관은 1981년 9월 10~11일 열린 제11회 한일 각료회의에 참석한 소노다 일본 외상에게 "5년간 40억 달러도 안 되겠습니까? (…) 40억 달러 이하가 되면 제가 죽습니다"라며 매달렸습니다.

강양구 : 노신영 당시 장관 이름이 요즘에도 언론에 오르내리죠. 대선 후보로 꼽히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멘토로 말이죠. (웃음)

김종배 : 그래서 결국 40억 달러를 받아냈죠?

이동준 : 받았습니다만, 역시 돈으로 받은 게 아닙니다. 만주군 장교 시절 박정희의 직속상관이었던 세지마 류조가 막후에서 '40억 달러 맞추기' 프로젝트를 진행하죠. 그 결과, 1989년까지 7년에 걸쳐 일본 정부 차관 18억5000만 달러, 일본수출입은행 융자 21억5000만 달러(평균 금리 6%대)가 신군부 시절 사회기반시설 확충에 투입됐습니다.

한일 협정에서 '받았다'는 건, '한국이 일본에 구조적으로 종속된다'는 뜻입니다. 일본의 플랜트가 한국에 들어온다면, 앞으로도 한국은 계속 일본에 종속되죠. 당장 관련 설비의 유지, 보수 등을 위해라도 한국은 일본을 지켜봐야 하니까요.

강양구 : 방송을 얼핏 들으신 분은 미쓰비시가 한국에 투자한 내역을 보고 '미쓰비시가 한국을 많이 도와줬구나'하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만, 이 기업이 왜 정치 자금까지 지원했겠습니까. 한국을 자신의 하청 기지로 만들려 한 거죠.

이동준 : 지금도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우리의 기업 역량이 과거보다 많이 탄탄해졌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기업 상당수가 여전히 일본 기업의 기술 지원을 받습니다. 이렇게 제공 받은 기술 수준에서 발버둥 쳐 봤자죠.

아베의 생각 '조선과 일본은 한 몸'?

김종배 : 우리가 지금은 주로 한일 협정의 큰 줄기만 짚어가고 있는데, 책을 보시면 여러 다양한 사건에 관해 많은 사실 자료가 추가되었습니다. 이 책은 밑줄 쳐 가면서, 꼼꼼히 읽어야 합니다.

이제 책 내용 이외의 것도 여쭙고자 합니다. 아베 신조의 선조 두 분이 이 책에 등장합니다. 기시 노부스케 전 자민당 총리(A급 전범 용의자)가 외할아버지고, '비핵 3원칙'으로 유명한 사토 에이사쿠는 외종조부죠. 일종의 세습 정치인인데, 아베 신조를 어떤 인물로 봐야 할까요?

이동준 : 우리는 아베를 극단적인 우익 정치인으로만 보는데, 저는 그 정도 인물로 보지는 않습니다. 상당히 현실적인, 권력 지향적 보수 인사로 봅니다. 제 주변의 많은 일본 지식인들은 지금 일본이 아베의 (국수주의적) 사기에 놀아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안이 없는 겁니다.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해 자민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로 자민당은 '보통 국가 일본'을 추구합니다. 보통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미-일 안보 조약을 깨고, 군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아베는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오히려 대미 종속을 강화하면서 보통 국가가 되자고 합니다. 조금 이상합니다. 모순적인 정치인이죠.

김종배 : 그렇다면, 아베의 대 한국관은 어떻습니까. 두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생각이 있을 텐데요?

이동준 : 아베는 스스로를 '조슈 번(長州藩)의 적자'로 칭합니다. 조슈 번은 지금은 야마구치 현인데,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당시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의 중심지였습니다. 국수주의적이었던 당시 막부와 자신을 동일시한 거죠.

지금 야마구치 현은 인구 200만 명에 불과한 자치단체입니다. 이런 작은 현에서 일본 역대 총리의 40% 정도를 배출했습니다. 지금도 일본 정치계 지연의 핵심입니다. 이 정도로 권력 지향이 강합니다. 지금의 일본을 우리가 만들었다는 의식이 강하죠.

이들이 생각하는 '조선반도'는 현대 한국인의 가치관과 많이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를 하수로 봅니다. 극단적으로는 '조선과 일본은 한 몸'이라고 지금도 생각하는 면이 있습니다. 아베 역시 이 가치관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봐야 합니다.

▲ 일본 주류 정치권의 대 한국 역사관에 얼마나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까.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보통 국가'로의 길을 착착 밟고 있다. ⓒ연합뉴스


'안보 위해 위안부 합의 중요하다'는 한국의 전문가(?)

김종배 : 한일 위안부 합의 얘기를 해 보죠.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출연하기로 했어요. 어떻게 평가하세요?

이동준 : 제가 약 2주 정도 전 <한국일보>에 칼럼을 써서 욕을 좀 먹었습니다. (웃음) 지난 7월 31일 도쿄대학교에서 한국과 일본의 한일 관계 전문가들이 모여서 한일 정부가 지난해 말 '완전하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하기로 한 위안부 합의의 핵심인 '새로 출범할 위안부 재단에 어떻게 혼을 불어넣을까'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이 심포지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한국에서 온 한일 관계 전문가라는 분 대부분이 "위안부 재단을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시더라고요. 근거가 황당해요. "한일 관계가 나빠지면 안보에 위기가 온다"는 겁니다.

국가의 이익에는 여러 가지가 있죠. 경제, 안보 문제도 있겠지만, 위안부 문제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할머니들께서 무려 20년이나 거리에 나오셔서 자기 목소리를 내셨어요. 유일한 요구 조건이 간단합니다. 사과하라는 겁니다. 돈 달라는 게 아닙니다. 법적 책임을 인정하라는 건데, 이번 '합의'에는 그 내용이 빠졌습니다.

김종배 : 일반적인 해석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삼각 동맹 강화를 위해 한일 양국을 압박해서 이번 합의가 이뤄졌다는 겁니다.

이동준 : 그 해석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교적 측면에서 보자면, 박근혜 대통령 초기 2년 정도의 태도는 '위안부 문제는 1000년이 지나더라도 제대로 해결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한일 관계를 풀 수 없게 된 셈이죠. 이 정도로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결국 결과가 이렇습니다. 작년 위안부 합의 이후부터 갑자기, 기존 목표치에 한참 미달하는 이 결과를 받아들이라고 국민에게 강요합니다.

김종배 : 우리가 한일 관계 70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말도 되지 않는 막후 협상 과정에 한숨을 쉬었는데, 이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는 듯합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바로 단적인 예입니다.

강양구 : 구조 역시 과거를 고스란히 반복합니다. 초반에는 정권이 목소리를 세게 내지만, 미국이 헛기침 한 번 하면 바로 수위를 낮추고, 일본이 이를 교묘하게 받아서 자신에게 유리한 카드를 내밀고, 한국은 이를 덥석 받는 식이죠.

이동준 : 1965년 한일 협정과 이번 위안부 합의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중요한 합의에 이해 당사자가 빠졌습니다. 1965년에는 징용 피해자 등 개인 청구 주권자의 목소리가 완전히 배제됐고, 이번에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이익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죠. 당사자가 없는 합의가 이뤄진 겁니다.

▲ <불편한 회고>(이동준 지음, 삼인 펴냄) ⓒ프레시안

국민의 이익을 외교적으로 반영하는 게 외교 합의에서 정부의 역할입니다. 이를 방기하거나, 오히려 국민을 힘으로 눌러버린다면, 이는 합의가 아닙니다. 정권이 바뀌거나 시간이 흐른다고 묻힐 게 아닙니다.

강양구 : 앞으로도 수많은 일제 강점기 피해자의 후손이 개별적으로 목소리를 낼 테고, 이는 결국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되겠죠. 더구나 지금도 1910년부터 1937년의 피해에 관해서는 어떤 식으로 요구할 것이냐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위정자들의 바람과 달리 한일 관계의 시한폭탄은 앞으로도 여기저기에 산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래를 생각해야 할 한-북-일 삼각 꼬리

김종배 : 서평단 질문도 받아 보죠.

서평단 : 한국과 일본 관계에서 북한이 중요한 요소가 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북한과 일본의 관계는 어땠는가
도 간단히 알고 싶습니다.

이동준 : 우리는 일본이 한국만 바라본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일본은 항상 북한도 봅니다. 일본의 파트너는 한국이 아니라 한반도죠.

아베 정권이 들어선 후 일본이 군국주의화하는 냄새를 풍기는데, 이런 움직임은 특히 북한 사정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일어납니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고요. 한국의 대북 정책에 연동되어 북한이 변하죠. 세 나라가 상호 영향을 미칩니다.

김종배 : 오늘 <불편한 회고>에 담긴 여러 역사적 사실 가운데 아주 일부만 짚어 봤습니다. 두 나라 외교사를 되짚어 보면, 한일 관계가 지난 70년 간 얼마나 엉터리로 맺어졌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강양구 : 신문 연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니 만큼, 일반 독자가 읽기에도 부담 없는 내용입니다. 찬찬히 읽어보시면, 지금 우리가 선 자리, 앞으로 이어질 한일 관계에 관해 여러 통찰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김종배 : 교수님,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동준 : 고맙습니다.
이대희 기자 eday@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기자가 되면 거지부터 왕까지 누구나 만난다고 들었다. 거지한테 혼나고 왕은 안 만나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