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생명은 불지옥에서 탄생했다!
최초의 생명은 불지옥에서 탄생했다!
[월요일의 '과학 고전 50'] <생명의 도약>
고등학생이었을 때, 이과생은 대학 입시에서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가운데 두 과목을 선택했다. 물리와 화학 가운데 반드시 한 과목을 포함해야했다. 대개의 학생들은 물리-지구과학이나 화학-생물의 조합으로 정했다. 나는 특이하게도 물리-화학을 선택했는데, 당시 카이스트 입시는 물리, 화학, 생물을 모두 필수로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 학생들은 생물을 물리의 반대말쯤으로 여겼다. 시험에서 물리는 원리를 적용해서 푸는 과목이고, 생물은 그냥 무작정 암기하는 과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선입견은 물리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생물학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실제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물리학과 학생들은 생물학을 이류 과학쯤으로 생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당시 물리학과가 최고의 상한가를 치던 때란 것도 이런 경향에 일조했으리라. 하지만 내가 졸업할 즈음엔 생물학의 세상이 도래해 있었다.

내가 생물학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당시 전파과학사에서 나온 <양자생물학>이란 책을 알게 되면서다. '광합성'이 그냥 화학식들의 연쇄 변환 과정을 외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전자가 광합성 단백질 위를 뛰어 다니며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이전에 생물학을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 <생명의 도약>(닉 레인 지음, 김정은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오늘 소개할 닉 레인의 <생명의 도약>(김정은 옮김, 글항아리 펴냄) 같은 책을 내가 학창시절 읽었다면 생물학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을 거다. 닉 레인은 생명과학 분야의 브라이언 그린, 리처드 도킨스라 할 만하다. 아주 쉽다고는 할 수 없지만, 깊이나 명료함에 있어 이 분야에서 최고다. 나는 그의 전작 <미토콘드리아>(김정은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를 읽고 단박에 팬이 되었다. <미토콘드리아>는 깊이 있는 내용이 많아 좀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생명의 도약>은 다루는 주제가 방대해서 그런지 전작에 비하면 오히려 술술 읽히는듯하다.

이 책은 생명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10개의 발명을 다룬다.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쓰여 있어 관심 있는 것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물론 시간 순으로 제시되어 있으니 순서대로 읽는 것을 추천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명품 10개를 고르라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바퀴, 문자, 증기기관, 트랜지스터 등을 고를 수 있을 거다. 닉 레인은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명의 기원, DNA, 광합성, 진핵세포, 성(性), 운동, 시각, 온혈성, 의식, 죽음의 열 가지를 선택했다.

첫 번째 주제는 '생명의 기원'. "최초의 생명은 어떻게 생겼을까?" 모두가 궁금해 하지만 잘 다루지 않는 질문이다. 우주론의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 만큼이나 중요하고 어렵다. 현대 과학이 자신 있게 모른다고 답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저자는 '열수분출공'에서 최초의 생명이 탄생했다는 가설을 설명한다. 열수분출공은 심해에서 땅 속의 뜨거운 물질을 뿜어내는 굴뚝 모양의 구조물을 말한다. 이 일대는 온도가 수백 도에 달하고, 양잿물이나 다름없는 강한 알칼리성을 띄고 있다. 인간은 1초도 버틸 수 없는 환경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기에 수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다.

이런 지옥 같은 환경이 어떻게 생명 탄생의 부화장이 되었을까? 이걸 이해하려면 생명과학의 핵심 원리들을 알고 있어야한다. 열수분출공에서는 기체가 부글거리며 올라오는데 수소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아세틸티오에스테르'라는 물질이 생산된다. 생물학 지식이 있는 사람은 여기서 무릎을 치겠지만, 나도 눈을 껌벅 거리기만 했으니 너무 걱정은 마시라.

지구상 생명체는 물질대사의 핵심적인 화학 반응이 동일하다. 바로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배웠던 시트르산 회로다. 원형으로 꼬리를 물고 늘어선 수많은 화합물들의 이름을 외우던 기억이 날 거다. 안타깝지만 나는 다 잊어버렸다. 보통 시트르산 회로는 유기 분자를 소비하여 수소와 이산화탄소가 생성된다. 당신 몸의 세포가 지금 이 순간에도 하고 있는 일이다.

아마도 열수분출공에서는 시트르산 회로의 역전이 일어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주위에 널린 여러 분자들로부터 생명에 필요한 유기분자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실제 열수분출공 근처 사는 세균에서 이런 역전이 흔히 관측된다고 한다. 여전히 많은 부분이 가설로 점철되어 있지만, 최초의 생명체를 추적하는 최신 이론의 윤곽이나 방법을 맛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이야기는 'DNA'. 생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DNA에 대한 기초 지식은 가지고 있을 거다. 나 같은 물리학자도 DNA에서 RNA를 통해 단백질로 이어지는 생물학의 중심 원리쯤은 알고 있다. RNA를 이루는 3개의 염기가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며, 아미노산이 모이면 단백질이 되고, 단백질이 우리 몸의 모든 화학반응을 제어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 책에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코돈이라 불리는 3개의 염기 순서에 의미가 있다는 거다.

염기에는 A, C, G, U 네 종류가 있다. 여기서 세 개를 골라 나열하여 만들어지는 가능한 코돈의 수는 4×4×4=64가지다. 이것으로 지정해야 하는 아미노산은 모두 20개니까, 하나의 아미노산에 여러 개의 코돈이 중복하여 대응된다. 놀랍게도 코돈 속에는 아미노산과 관련한 생명의 역사가 숨어있다.

예를 들어, 코돈의 첫 번째 염기는 전구(前驅) 물질과 관련 있다. 세포에서는 아미노산이 몇 가지 전구물질에서 시작하여 일련의 생화학적 단계를 통해 아미노산들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같은 전구물질에서 만들어지는 아미노산들을 지정하는 코돈의 첫 번째 문자가 같다. 예를 들어 피루부산이라는 전구물질에서 만들어지는 아미노산은 모두 U로 시작하는 식이다.

두 번째 문자는 아미노산이 물에 녹는지 녹지 않는지와 연관된다. 이것은 단백질의 3차원 구조와 관련한 중요한 정보다. 끝으로 코돈의 세 번째 염기는 주로 중복된다. 세 번째 염기를 바꾸어도 아미노산이 바뀌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예를 들어, 'GC'로 시작하는 코돈의 경우 세 번째 염기와 상관없이 모두 '알라닌'이라는 아미노산을 지정한다. 최초의 생명체가 2개의 염기로 된 코돈을 쓰다가 나중에 3개의 염기를 쓰는 쪽으로 진화했을까? 사실 복잡한 아미노산 5개를 제외한 15개의 아미노산에 종결코돈을 더한 16개라는 숫자는 두 개의 염기만으로 지정할 수 있다. 정말 흥미롭다!

세 번째 이야기는 '광합성'. 닉 레인이 설명하는 광합성의 개념은 정말 단순하다. 그의 말을 옮겨 보자.

"이산화탄소에 전자 몇 개를 첨가하고 전하의 균형을 위해서 양성자 몇 개를 함께 넣어주면, 갑자기 당(糖)이 만들어진다."

우리에게 친숙한 식물은 물에서 전자를 얻는다. 물론 물이 순순히 전자를 내놓을 리 없으니 태양에서 내리쬐는 자외선이 필요하다. 그러면 폐기물로 산소가 발생한다.

지구상에 시아노박테리아가 광합성을 시작한 이래 지구의 산소 농도는 증가해왔다. 산소는 반응성이 강하여 위험한 물질로 산소에 적응하지 못한 생물은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산소를 사용하면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지금과 같이 (박테리아에 비해) 거대한 생물이 생길 수 있었던 것도 산소 호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닉 레인이 풀어내는 광합성의 생화학 이야기를 읽다보면 본격적으로 생물학을 공부하고 싶어질 정도다. 지금까지 생명의 도약 10가지 가운데 3가지의 맛만 보았다. 나머지 7가지가 궁금해질 거다.

물리학은 보편적 이치를 찾지만, 생물학은 다양성을 탐구한다고 한다. 생명에 다양성이 생기는 이유는 진화 때문이다. 진화는 그냥 무작위적인 적응이다. 그렇다면 생명에는 보편성이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생명의 보편성은 모든 것이 최초 하나의 생명체에서 진화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진화의 고비에서 문턱을 넘은 첫 번째 생명체가 있었기에 이후의 생명들은 그 생명체의 특성을 공유한다. 이처럼 진화는 다양성과 함께 보편성도 만든다. 생명 현상에 들어있는 보편성의 비밀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물리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tyio@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