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박근혜 정부, 북핵 고도화 일등공신"
"이명박-박근혜 정부, 북핵 고도화 일등공신"
[정세현의 정세토크] "朴대통령, 황소에게 붉은깃발 흔드는 투우사 같아"
1994년 10월 21일. 북한과 미국 사이에 제네바 합의가 체결됐다. 이 합의로 북한이 핵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은 경수로를 건립하고 중유를 지원하며 양측은 정치·경제적 관계의 정상화를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서 북한과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만들어내면서 북한 핵 문제는 마무리 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2002년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는 미국의 의혹이 제기되면서 제네바 합의는 물거품이 돼버렸다.

이후 2005년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면서 북핵 위기가 다시 봉합되는 듯 보였으나, 미국 재무부는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예치돼있던 북한 자금을 동결하는 제재조치를 취했다. 이에 북한은 격렬히 반발했고 1년 뒤인 2006년 1차 핵실험에 돌입했다.

그렇게 시작된 북핵 문제가 20년이 넘게 흘렀다.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북한 핵 문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은 미국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009년 2차 핵실험과 이후 일어난 3, 4, 5차 핵실험 과정을 살펴보면 한국 정부의 공헌도 상당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집권기와 일치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2006년 북한의 핵실험에 놀란 미국은 그해 11월 북미 양자 접촉을 가지고 이후 2007년 2.13 합의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그 다음 해인 2008년 한국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핵개방3000'이라는 대북 정책이 등장했고, 이로 인해 6자회담의 성과도 진전을 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정 전 장관은 "2009년 새로 들어선 오바마 정부의 국무장관인 힐러리 클린턴이 평화협정 체결과 북한의 비핵화를 바꾸자는 이야기를 세 번이나 했을 때, 이명박 정부는 이를 모두 막았다"며 "한국 정부가 극렬히 반대하다 보니 미국 정부도 결국 2010년부터는 '전략적 인내'로 돌아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북한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교체기에 3차 핵실험,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4, 5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횟수가 거듭할수록 핵 능력은 고도화됐다. 5번의 핵 실험 중 4번이 보수 정권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결국 북한 핵을 방치하면서 사실상 핵 능력 고도화에 눈을 감았던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북한 핵 강화의 일등 공신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지금과 같이 제재와 압박만을 강조해서는 북한의 6차 핵실험도 막기 힘들다는 데 있다. 이번 대담을 함께한 이병철 평화협력원 부원장은 "북한이 핵실험을 한 번 더한다고 해서 박근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박근혜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안보 위기만 조장할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을 막을 방도를 제시해야 하는데 아무런 대안이 없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그는 "결국 미국은 '북한의 핵 동결 + 대화'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과에서 수술하는 식으로 핵심을 정밀 타격한다는 이른바 '서지컬 스트라이크(surgical strike)'를 하기에도 현실적으로 장애물이 많다"며 "(11월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중 누가 당선되든 일단 핵 동결을 하고 이후 모멘텀을 찾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대담은 지난 4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편집인의 사회로 진행됐다. 다음은 대담 주요 내용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9월 30일 주한미군 장성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북한의 핵이 '턱 밑의 비수'라면서 북핵이 한국에 큰 피해를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북한의 5차 핵실험이 미국의 9.11 테러와 똑같다고도 말했고요. 이것은 결국 북한 핵 위협의 본질이 북핵으로 우리를 공격하는데 있다는 것을 암시한 건데요.

재밌는 것은 일반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위협 인식이 다소 낮아졌다는 데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서 공개한 '2016 통일의식조사'를 보면 지난해 대비 북한에 대한 위협 인식도가 약 4% 정도 줄어들었고, 북한이 '협력 대상'이라는 인식은 지난해 35.2%에서 올해 43.7%로 8.5% 포인트 높아졌습니다.

현 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포함해 정치인들이 북한이 핵으로 우리를 공격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데 북핵 위협의 본질과 역사를 짚어보면 북핵은 미국의 체제 전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북한이 일종의 억지력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정세현 : 박근혜 대통령이나 윤병세 장관이 북핵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다 보니까 저런 식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외교부 장관이 북핵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까? 내년 대선을 앞두고 안보와 비(非)안보, 또는 안보 협조와 비협조 식으로 편가르기를 하려는 포석이라고 봅니다.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라 양심의 문제입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만 해도 한국 정부는 북한 핵 문제를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쓰지는 않았습니다. 북핵 문제가 터진 이후 미국과 북한이 비공개 접촉을 하려고 할 때 당시 정부가 양국의 접촉을 막았는데, 이는 피해 당사자인 대한민국 정부를 빼놓은 것에 대한 섭섭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미국과 핵을 두고 이른바 '딜'을 하려는 것만 보더라도 북한의 핵은 남한에 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도 북핵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자신들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겁니다.

실제 북한의 핵 능력이 강화된 과정을 봐도 대남용이 아니라 대미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함께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 개발에도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의 핵이 대남용이라면 이러한 무기 체계는 필요 없습니다. 바다 건너 미국을 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북한은 미국이 빨리 자신과 협상하게끔 만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북한이 핵을 발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북한이 저런 무기 체계 개발에 성공해서 미국에 단 한 발만 쏘더라도 수백, 수천 발이 자신들에게 되돌아올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 북한이 핵 능력을 강화시키는 이유가 협상용이라고 할지라도 주변 국가들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데요.

정세현 : 불안을 조성해서 미국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게 하려는 의도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주변 국가들에게는 미국을 달래서 자기들한테 유리한 결과를 나오게끔 해달라는 일종의 북한식 '중국 역할론', '한국 역할론'적인 성격을 띄고 있기도 합니다.

이병철 : 국내 정치적으로 본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마치 황소한테 붉은 깃발을 흔드는 투우사와 같은 행동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으로 오라고 하는 것은 북한 지도부 입장에서 보면 흥분하게 될만한 발언입니다.

▲ 지난 1일 충남 계룡시 계룡대 대연병장에서 열린 건군 제68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


한편 북한은 자신들의 핵이 대미용이라는 일관된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북한은 김정은 체제를 미국으로부터 보장받기 위해 핵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미국과 외교 관계 수립까지 이뤄지기를 바라는데, 핵무기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른 것들에 비해 값이 싸고 효용성이 큽니다. 또 핵무기 외에 다른 수단들은 등가성이 맞지 않기 때문에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측면도 있습니다.

북핵 문제 25년, 왜 해결하지 못했나

프레시안 : 1991년 북한의 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떠오른 이후 지난 25년 동안 남한과 미국, 일본은 모두 북한의 핵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기어이 5차 핵실험까지 진행했습니다.

정세현 : 상황이 이렇게까지 온 이유를 따져보려면 우선 북핵 문제의 뿌리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1950년대 후반 북한은 소련에 있는 핵 물리학 연구소에 과학자들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비슷한 시기인 1956년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했고 (원자력의 비군사적 사용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 이후 1960년 서울대 공과대학에 원자력 공학과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북한은 초기에 소련의 지원을 받아 기초적은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소련은 북한이 핵을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1985년 실험용 원자로를 주면서 북한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시킵니다.

이후 1989년 프랑스 위성이 북한의 핵 활동을 감지했다는 사진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북한은 미국의 감시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1990년부터 남북 총리급 회담이 시작됐죠. 남북 간 총리급 회담이 진전되면서 남북은 기본 합의서를 작성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미국은 남한에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1991년 여름 무렵 미국은 남북이 기본 합의서를 만들어서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는 것은 좋지만, 북한의 핵 활동이 상당한 정도로 진전됐기 때문에 차후에 북한의 핵 활동을 막기 위해 '비핵화 공동선언'을 동시에 추진하라고 권고합니다.

한국은 미국의 이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당시는 동유럽과 소련 등이 흔들리면서 사회주의 진영 내 체제 전환의 바람이 불 때였습니다. 이에 북한은 흡수통일의 공포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실제 1989년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흡수통일에 대한 공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통일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는" 식으로 돼서는 안된다고 했죠.

바로 그 시점에 북한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흡수통일을 막을 수 있는 카드가 뭐가 있을지를 연구합니다. 그래서 얻은 결과가 바로 핵 개발인 것 같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의 군사적 위협과 동반해서 체제가 와해될 수 있다는 공포를 느낀 것이죠.

그렇게 핵을 염두에 두던 북한은 남한과 비핵화 공동선언을 체결한 뒤에 1992년 1월 김용순 당 비서를 미국에 보냈습니다. 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을 테니 수교하자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이후 북한의 핵 활동이 활성화되는 것을 보고 미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에게 특별 사찰을 요구합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이 특별 사찰이라는 핑계를 대고 자신들을 없애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1993년 NPT 탈퇴 선언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때부터 북한이 핵 활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원점으로 돌리려면 협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북미 양측의 비밀 접촉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1994년 제네바 합의를 만들어 냅니다.

이 과정만 보더라도 북한의 핵이 대남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미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고 북한과 협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북핵 카드가 대미용이라는 증거입니다.

프레시안 : 제네바 합의가 잘 이행됐다면 지금 이렇게까지 심각한 핵 위기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실제 제네바 합의는 2002년 당시 북한을 다녀온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와 북측 인사 간 의사소통의 문제로 결국 결렬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정세현 : 1994년 10월 제네바 기본 합의 이후 2002년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HEUP, Highly Enriched Uranium Program)'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 이 합의는 이행되고 있었습니다. 북한 핵 능력이 강화되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북한이 HEUP를 가동중에 있다는 의혹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당시 ABC(Anything But Clinton), 즉 전임인 빌 클린턴 대통령이 했던 정책은 무엇이든 부정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대북 정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 클린턴 정부가 플루토늄을 이용한 북한의 핵 개발을 묶어둔 것은 평가하지만, 북한이 언제든지 딴 짓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죠.

그러다가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미국은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 조직에 북한의 핵 무기와 미사일 기술이 전파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미국이 보기에 '위험한' 놈들은 사전에 잡아야 한다면서, 빌 클린턴이 북한을 엉성하게 묶어뒀기 때문에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압박해 들어가기 위해서 HEUP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이러한 의심에는 나름의 배경이 있습니다. 북한에는 세계 최대 수준의 우라늄이 매장돼 있습니다. 북한이 이 우라늄을 캐내서 고농축 프로그램을 돌리면 플루토늄을 원료로 한 핵무기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빠른 시일 내에 많은 수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02년 7월, 미국은 북한이 이를 이용해 HEUP를 돌릴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당시 존 볼튼 미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담당 차관은 한국을 방문해 북한이 HEUP를 운영하는 것 같다고 밝혔습니다. 청와대는 그에 대한 증거가 있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볼튼 차관은 북한으로 가는 화물 안에 고강도 알루미늄이 상당량 선적됐다는 송장 사본을 입수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이 고강도 알루미늄을 들여오고 있다는 것은 곧 고농축 우라늄을 만들기 위한 튜브로 봐야한다는 것이었죠.

사실 이건 논리적 비약인데요. 고강도 알루미늄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용도를 미국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겁니다. 볼튼 차관은 그러면서 이걸 가지고 북한을 압박하면 북한이 자백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오히려 좀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적실성과 합리성이 떨어지는 판단이었거든요. 한편으로 네오콘들이 저런 식으로 앞으로 한반도 문제를 풀어나가면 피곤하겠다는 정도의 생각을 했죠.

이후 10월 3일 제임스 켈리 차관보를 특사로 한 미국 대표단 20명이 북한을 방문합니다. 이들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에게 고강도 알루미늄이 북한에 들어갔다는 송장을 제시하며 HEUP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물어봅니다. 이에 대해 김계관 부상은 그런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고, 자기들은 제네바 기본 합의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실 당시 북한 전력 사정으로 봤을 때 전기가 많이 필요한 HEUP를 운영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이 없다고 하는데도 미국의 추궁은 계속됐고, 결국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이튿날 당시 외무부 제1부상인 강석주는 미국 대표단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은 주권 국가이며 NPT 탈퇴 선언도 했기 때문에 당신들이 문제 삼는 프로그램을 가지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통역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강석주는 "We are entitled to possess such a program and more than that"이라고, 즉 "우리는 그러한 프로그램(HEUP)뿐만 아니라 그것보다 더한 것도 가질 자격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통역 과정에서 'are entitled to'(자격이 있다)가 빠진 채 'possess'(보유하다)만 남은 겁니다.

당시 통역을 맡았던 김동현 미국 국무부 선임통역관에 따르면 당시 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미국 측 대표단이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드디어 북한의 자백을 받아냈다'는 생각이었겠죠.

▲ 1993년 3월 NPT 탈퇴 선언을 계기로 북핵 문제는 국제사회의 정식 의제로 등장하게 된다. 북한은 그 후 탈퇴를 보류했다가 2003년 1월 다시 NPT 탈퇴를 선언한다. 사진은 2003년 1월 11일 평양에서 열린 NPT 탈퇴 지지 100만 명 군중 대회 모습.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과 접촉을 끝낸 미국 대표단은 한국에 내려와서 북한이 HEUP 운영을 자백했다고 전했습니다. 이에 당시 김대중 정부는 미국이 지금 제기한 우라늄 농축 문제는 그것대로 풀어 나가고 지금까지 진행돼왔던 남북관계는 계속 진전시켜나간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미국 대표단은 당시 한국 정부와 접촉을 끝내고 돌아가면서 절대로 이 이야기를 언론에 흘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북한이 자백은 했지만, 한미 간에 완전히 정책이 조율돼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는 비밀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향후 한미 간에 긴밀하게 협의하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그해 10월 19일부터 21일까지는 평양에서 제8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예정돼있었습니다. 당시 회담 수석대표였던 저는 북한이 어떻게 자백을 하게됐는지에 대해 비공개 접촉을 통해서라도 경위를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북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전망이 보여야 남북관계를 함께 가져 가면서 병행 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국 시간으로 16일 에 북한이 HEUP 운영을 시인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보고 남북 장관급 회담이 19일인 것을 알고 일부러 이 시점을 노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HEUP가 남북관계 개선 속도를 조절하는 카드라는 생각이 들었죠.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장관급 회담은 개최됐습니다. 19일 평양에 도착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당신들이 HEUP 운영을 시인하면서 미국과 한국이 발칵 뒤집혔고, 남북관계를 개선‧발전 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통일부 입장에서는 날벼락 같은 일이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답을 주겠다고 하더니만 다음날 아침에 김정일이 지방에 있다고 답이 왔습니다. 그러면서 대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단 회담 대표단 5명을 이끌고 김영남을 만나러 갔습니다. 처음에 전체 면담 10분, 단독면담 10분 정도 하기로 하고 일단 시작했습니다. 15분 정도 티타임을 가진 뒤에 나는 김영남 위원장에게 둘이 따로 이야기하자고 했습니다.

50분 동안 김영남과 독대를 하면서 격렬하지만 정중하게 따졌습니다. 미국이 이렇게 나온 경위를 설명해달라, 어떻게 그런 위험 천만한 일을 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김영남은 자신들은 분명 HEUP가 없는데 미국이 자기들을 압박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들은 주권국가고 NPT 탈퇴를 선언했는데 미국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을 우리가 못 가질 이유가 뭐가 있냐고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저는 그런 대답 말고 실체적 진실을 말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김영남은 미국이 압박하니까 그런 거라면서 기존 대답을 되풀이했습니다. 이후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 영문판은 당시 북측 대표단이 미국 대표단에게 "We are entitled~"(자격이 있다)라고 말했는데 미국은 이를 북한이 HEUP를 보유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보도했습니다.

프레시안 : 통역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HEUP를 보유했다는 말만 믿고 다른 검증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요.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상당히 공격적이었는데, 이런 정책이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요?

정세현 : 2001년 부시 대통령 집권 이후 김대중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그 때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해 신뢰하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남북 정상회담 이후 빠른 속도로 진전되던 남북관계에 계속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딴지를 거니까 정부도 남북관계 개선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2001년 9.11 테러가 난 이후 그다음해인 2002년 부시 대통령은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지정했습니다. 자칫 남북관계마저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 위기에서 그해 2월 20일 김대중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부시 대통령을 설득했고 결국 북한을 침공하지 않겠다, 대화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냅니다.

▲ 김대중(왼쪽) 대통령과 미국 부시 대통령이 지난 2001년 3월 열린 정상회담 중 백악관 집무실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을 마친후 악수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이렇게 남북관계가 과거의 흐름을 회복하게 되면서 당시 일본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도 2002년 9월 평양에 방문합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이러한 해빙 분위기가 네오콘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해 10월 북한을 방문하고 HEUP에 대한 북한의 자백을 받아냈다며 북한의 반발을 유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정부는 남북관계는 남북관계대로 끌고 가면서 북핵 문제를 어떻게 해서든 풀어 보려고 했습니다. 미국은 HEUP를 기정사실화하고 북한을 압박하면서 더 이상의 핵 능력을 막기 위해 회담이 필요하다며 2003년 3월 중국 베이징에서 미국과 북한, 중국이 참여한 3자회담을 열었습니다.

처음에 미국은 자신과 남북한, 중국을 포함한 4자회담을 제안했는데, 북한이 남한은 결정권도 없으니까 같이 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반응하면서, 미국과 양자 회담을 하자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이 베이징에서 만나려면 중국은 '옵서버' 형식으로 있어야 한다고 해서 3자회담이 열리게 된 겁니다.

그런데 북한과 미국, 중국이 이야기하던 도중 북한의 김계관 부상이 미국의 켈리 차관보를 불렀답니다. 켈리 차관보에 따르면 김계관 부상은 자신들이 곧 핵무기를 만들 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발언으로 회담은 종료됐습니다.

이후 미국은 미국과 중국, 한국, 일본이 동시에 북한을 상대로 압박해 들어가야 한다는 5자회담을 제안합니다. 2003년 4월 제10차 장관급 회담이 있기 전에 켈리 차관보가 저를 만나러 오더니 자기들이 제안한 5자 회담에 북한이 응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 역시 북한의 핵무기가 대미용이라는 증거입니다.

여하튼 그래서 저는 평양에 가서 5자회담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북한 측 수석대표가 요즘 중국이 좀 이상하다면서, 중국이 미국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투덜대더군요. 그래서 제가 비공개 회담 자리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내가 볼때는 베이징만큼 평양 편을 들어주는 나라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정 그렇게 중국이 못마땅하면 중국이 미국 편을 들지 못하게 러시아를 끼워서 회담을 하는 방안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후에 북한이 마치 자기들이 주동적으로 만든 것처럼 6자회담 제안을 하기도 했죠.

2002년 HEUP를 터뜨린 후 2003년에 3자회담을 주도하고 5자회담 아이디어를 내놓는 등 미국은 북핵 문제 해결에 주역이 되려고 했습니다. 지나놓고 보니 미국은 북핵 문제를 협상 또는 적당한 압박을 가미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 다시 망친 북한 비핵화, 누구의 책임인가

프레시안 : 제네바 합의가 파기의 수순을 밟았지만 2005년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면서 북핵 문제 해결의 고리가 다시 끼워지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미국 재무부가 방코델타아시아(BDA) 제재 카드를 꺼내 들면서 이후 북한은 핵 능력 강화에 속도를 냈고, 결국 2006년 10월 9일 핵실험으로 이어졌습니다. 2005년에 북한 핵을 막을 기회를 또 한번 놓친 것 아닌가요?

정세현 : 부시 정부의 대북 압박 정책이 계속되는 동안 북한은 내밀하게 핵을 개발해왔습니다. 그래도 한국과 중국이 나서서 남북 관계를 레버리지로 삼아 북한과 미국을 설득했고 2005년 9.19 공동성명까지 만들어 냈죠.

그런데 그 이튿날 미국이 북한의 방코델타아시아(BDA) 계좌를 인출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북한이 9.19 공동성명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죠. 결국 1년 후에 1차 핵실험이 발생합니다.

결국 9.19 공동성명 파기의 원인은 미국이 제공한 셈입니다. 특히 미국 재무부, 네오콘이 주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 백악관이나 국무부는 9.19 공동성명의 내용대로 북한의 비핵화 끌어내기 위해서 미북 수교, 일북 수교를 권고하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것을 결심해서 성명에 서명했지만 결과는 핵실험으로 이어진 겁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북한의 핵실험에 놀란 미국은 2006년 11월 북미 양자 접촉을 가집니다. 이후 2007년 2.13 합의를 이끌어냅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인 2008년 한국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핵개방3000'이라는 대북 정책이 등장했습니다. 9.19 공동성명이 미국 정부 때문에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면, 이번엔 한국 정부로 인해 6자회담의 성과가 진전을 보기 어려워진 겁니다.

즉 북핵 위기가 터진 초기에는 미국이 북한의 핵 능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여러 계기를 제공했고, 이후 이를 가속화되도록 만든 것은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이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로 인해 미국에서도 2010년부터 대북정책이 '전략적 인내'로 돌아서 버렸습니다.

프레시안 : 2009년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이 평화협정 체결과 북한 비핵화를 맞바꾸자고 세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당시 이명박 정부가 이를 받지 않았죠. 결과적으로 25년 동안 한반도 주변 국가들이 모두 '북핵 불용'을 외치면서도 북핵 능력이 증강됐던 것은 2008년 전에는 미국 정부의 책임이 크지만, 2008년 이후로는 한국 정부의 책임인 것 같습니다.

정세현 : 분명 2006년 1차 핵실험은 이를 유도한 미국의 책임이 큽니다. 2002년에 HEUP 의혹을 제기해서 북한을 압박해 들어가고, 2003년 1월 중유 중단 선언 이후 제네바 합의도 미국이 파기했습니다. 뒤에 6자회담도 성사됐지만 6자회담의 합의문은 BDA 제재로 미국이 사실상 깨버렸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제기한 HEUP 의혹은 그 실상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차 핵실험 이후 자료를 분석해본 결과 핵 실험에 쓰인 재료는 우라늄이 아닌 플루토늄이었다는 것이 미국 언론 보도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는 슬그머니 '고농축'이라는 표현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2009년 5월 25일 2차 핵실험부터는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 때문입니다. 2008년 12월 베이징에서 6자회담 수석대표가 만난 이후 더 이상의 접촉이 없었는데 한국 정부가 '비핵개방3000' 원칙을 견지하는 바람에 미국도 어쩌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정권이 교체됐습니다.

새로 들어선 오바마 정부의 국무장관인 힐러리 클린턴이 평화협정 체결과 북한의 비핵화를 바꾸자는 이야기를 세 번이나 했을 때, 이명박 정부는 이를 모두 막았습니다. 한국 정부가 극렬히 반대하다 보니 미국 정부도 결국 2010년부터는 전략적 인내로 돌아섰습니다.

전략적 인내가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줬지만, 사실 이를 끌어낸 것은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전략적 인내의 범위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데다가 전임 정부가 걸어 놓은 '비핵개방 3000'을 물려받으면서 이명박 정부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북핵 능력 강화의 조건을 만들어버렸죠.

그리고 북한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교체기에 3차 핵실험,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4,5차 핵실험을 실시했습니다. 횟수가 거듭할수록 핵 능력은 고도화됐습니다. 5번의 핵 실험 중 4번이 보수 정권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결국 북한 핵을 방치하면서 사실상 핵 능력 고도화에 눈을 감았던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북한 핵 강화의 일등 공신인 셈입니다.

프레시안 : 한국의 대북 정책이 바뀌지 않는다면 미국의 정책도 바뀌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이병철 : 한국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미국의 대북 핵 정책에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 동안 북한의 핵 능력은 고도화됐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수 정권에 책임이 있습니다. '무대응' 내지 '무전략'으로 대응했던 것이죠.

정세현 : 북핵 문제는 기본적으로 북한이 미국과 '빅 딜'을 위해 꺼낸 카드인데, 미국과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최대 당사국인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결국 문제 해결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책임이 우리한테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미 관계의 긴밀성을 이용해서 우리가 미국을 설득해서 북핵 문제 해결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는 책임이 우리한테 있다는 겁니다.

물론 문제 해결의 결정권은 미국에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제대로 나서지 않는다면 동맹국가를 이용해서 미국을 설득해야 합니다. 미국이 조금만 양보하고, 북한이 해달라는 것 조금만 들어주면 우리가 마음 편히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미국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정작 미국 내에서는 전략적 인내 정책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외교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미국외교협회(CFR, Council on Foreign Relations)는 지난달 발표한 대북 정책 태스크포스(TF)팀의 보고서를 통해 전략적 인내가 실패했다고 규정했습니다. 이제 한 달 뒤에 미국 대선이 열리고, 정부가 바뀔 텐데 향후 북핵 문제는 어떤 국면을 맞이하게 될까요?

이병철 : 결국 미국은 '북한의 핵 동결 + 대화'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외과에서 수술하는 식으로 핵심을 정밀 타격한다는 이른바 '서지컬 스트라이크(surgical strike)'를 하기에도 현실적으로 장애물이 많습니다. 결국 핵 동결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중 누가 당선되든 일단 핵 동결을 하고 이후 모멘텀을 찾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이병철 평화협력원 부원장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미국의 차기 행정부가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내년 중반기 이후부터 움직임이 있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나오는데요.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요?

정세현 : 박근혜 정부가 내년이면 임기를 6~7개월 남겨 놓은 시점이 될텐데, 기존 입장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을 겁니다. 미국이 끌고 가는 대로 협조해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북한이 미국의 새 정부 및 한국에 들어서는 새 정부와 협상력을 높인답시고 핵 실험을 한 번 더 해버리면 설사 CFR에서 여러 협상 방향이 나온다고 해도 박근혜 정부가 미국의 의도대로 가기는 어려워질 것으로 보입니다.

프레시안 : 북한이 추가 핵실험을 할 가능성은 있을까요?

정세현 : 지난 1월에 4차 핵실험을 감행한 뒤에 8개월이 지난 9월에 5차 핵실험을 했는데, 주기가 짧아진다면 빠르면 내년 봄에도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새 정부 들어서서 동아태 차관보가 결정되기 전에 혹은 한국의 대선 직전에 맞춰서 미국과 한국이 손 쓸 시간이 없는 틈새 기간을 이용해서 감행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핵 능력 강화를 기정사실로 할 수 있구요. 6자회담을 다시 하든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맞바꾸는 형식을 취하든 몸값을 높이고 비핵화가 아니라 핵 동결 선에서 협상하려면 6, 7차까지 핵실험이 필요합니다.

5차 핵실험 한지 한 달로 접어들고 있는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안 협의는 시작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도 북한의 핵실험 결심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북한은 안보리 결의를 지켜보면서 자신들에게 별다른 영향이 없는 결의안이 만들어진다면 6차 핵실험을 하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즉 더 이상 유엔 차원에서 자신을 제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마음 놓고 차수를 거듭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병철 : 문제는 앞으로 북한이 핵실험을 한 번 더한다고 해서 박근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안보 위기만 조장할 겁니다. 북한의 핵실험을 막을 방도를 제시해야 하는데 아무런 대안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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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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