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여직원 80% "성폭력 경험 있다"
출판사 여직원 80% "성폭력 경험 있다"
갑을관계가 성폭력 주원인... 성폭력 근절 노력도 없어
2016.11.10 17:06:38
한 출판사 편집자 A씨는 유명 원로 작가를 접대하는 술자리에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회사 대표는 그 작가에게 "선생님, 우리 애들 얼굴도 몸매도 너무 예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직원들을 접대부 취급하는 발언이었다. 

출판사 직원 B는 사측으로부터 일방적인 퇴사 통보를 받았다. 불합리함을 제기하자 인사 관리자는 B에게 유명 연예인 커플을 예로 들며 "퇴근하고 따로 만나 사랑해 보고 얘기하자"고 말했다. 출판 노동계에 따르면, 인사권을 무기로 성폭력을 시도하는 행위는 수습사원이나 인턴 등을 상대로 인사권자가 흔히 쓰는 수법이다. 

편집자 C씨는 한 신문사 기자 출신인 저자 D와의 술자리를 잊지 못한다. D는 여성 접대부가 나오는 단란주점에서 술 접대를 출판사에 요구했다. 여성 편집자들은 마지못해 술자리에 갔다. 술이 들어가자 D는 C에게 "내가 오늘 홍콩 보내줄게"라며 성폭력을 가했다. 

성폭력을 견디며 성장한 C씨는 이후 성폭력 가해자가 됐다. C는 이후 인사권자가 되어 새로 뽑은 남자 직원들에게 "너희보다 잘하는 (여자) 애들 많았는데, 결혼하고 애 낳는 걸 보니 골치 아파서 (실력이 모자란) 너희를 뽑았다"고 말했다. 

출판 노동자 70%가 성폭력 피해자

출판계 노동자의 68.4%가 성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의 경우, 10명 중 8명이 성폭력 피해자로 조사됐다. 피해자들의 연이은 폭로로 인해 문단 내 성폭력 문제가 드러난 가운데, 출판계 전반에 걸쳐 만연한 성폭력을 막기 위한 법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10일 전국언론노동조합(김환균 위원장)과 더불어민주당 권미혁 의원실이 국회의원회관에서 출판계 성폭력 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한 자료를 보면, 출판 노동자 중 직접적인 성폭력 경험이 없었던 이의 비율은 31.6%에 불과했다. 

이번 조사는 지난 달 27일부터 지난 5일까지 구글독스를 이용한 온라인 설문으로 이뤄졌다. 전체 253명의 응답을 조사 표본으로 삼았다. 응답자의 79.8%(201명)는 여성이었고, 20.2%(51명)는 남성이었다. 

특히 성폭력 피해는 여성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에게서 두드러졌다. 남성 응답자 중 직접적 성폭력 경험이 없었다고 응답한 이는 31명(60.8%)이었으나, 여성 중 성폭력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는 이는 46명(22.9%)에 불과했다. 여성 노동자 중 77.1%가 성폭력 피해자였던 셈이다. 

고용형태별로 보면, 정규직 노동자 중 성폭력 피해를 당한 이는 62.7%였다. 비정규직은 81.5%가 성폭력 경험이 있었다. 취업 형태가 불리할수록 성폭력 피해 가능성이 컸던 셈이다. 

성폭력 사례로는 언어적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이가 131명(53.7%, 복수응답)으로 가장 많았다. 신체적 성폭력(78명, 32.0%), 술 따르기·노래 부르기·안마 강요·강압적 데이트 신청 등 성적 서비스 강요 성폭력(67명, 27.5%) 비중도 컸다. 소수 응답자 중에는 성관계를 강요당한 사례도 있었다. 

갑을 관계가 성폭력 주원인

이와 관련, 언론노조 서울경기출판지부는 출판산업의 특성을 성폭력이 만연한 원인의 하나라고 꼽았다. 

여성 노동자 비율이 높고(2014년 기준 출판사업체 종사자 3만524명 중 1만5588명이 여성), 5~10인 수준의 영세사업체 비율이 높으며, 외주 노동자 규모가 크며, 노동 특성상 저자 등 회사 외부 인사와의 접촉이 잦아, 상대적 약자인 여성 노동자와 비정규 노동자가 성폭력에 취약한 구조라는 뜻이다. 

실제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5 성희롱 실태조사>에 따르면, 공공기관이나 민간사업체에 종사하는 노동자 7844명 중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이의 비중은 여성 9.6%, 남성 1.8%에 불과해 출판계 실태와 크게 대조를 보였다. 

성별로 인한 차별도 만연했다. 응답자 247명 중 '차별받은 경험이 없다'고 응답한 이는 52명(21.1%, 복수응답)에 불과했다. 채용, 승진 등 인사상 불이익을 경험한 이는 56명(22.7%)이었으며 임금, 복지 등 근로조건의 불평등을 경험한 이는 66명(26.7%)에 달했다. 손님이 오면 커피를 타게 하는 등 부당한 업무를 지시받은 이는 83명(33.6%)이었다. 일상적으로 성차별적 발언을 들었다는 이는 138명(55.9%)에 달했다. 

출판 노동자들은 특히 갑을 관계가 만연한 성폭력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설문조사에서 접수된 성폭력 가해자 중 직장 상사가 94명(56.6%)으로 가장 많았으며, 사업주가 가해자였던 경우도 67명(40.4%)에 달했다. 

특히 저자·역자가 성폭력 가해자인 경우도 74명(44.6%)이었다. 출판계에서 저자가 부당한 요구를 하더라도, 편집자 등 출판 노동자가 이를 거부하기 힘든 갑을 관계가 굳어졌음을 추정 가능한 대목이다. 

응답자 250명 중 '저자, 거래처, 상사 등 가해자와의 불평등 관계(갑을 관계)'가 성폭력을 낳는다고 응답한 이는 221명(88.4%, 복수응답)에 달했다. '문단 및 출판계 인적 네트워크의 폐쇄성'이 문제라는 응답자도 153명(61.2%)이었다. 낮은 고용 안정성, 성희롱 예방교육의 부재 등도 중요 원인으로 꼽혔다. 

ⓒ연합뉴스


성폭력 근절 노력은 이뤄지지 않아

이처럼 성폭력이 만연한데도, 출판계에서 이를 해소하려는 노력은 이뤄지지 않았다.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았다는 이는 응답자 173명 중 과반 수준(54.9%)에 그쳤다. 성희롱 교육을 받긴 했으나, 실효성이 없었다는 응답자 비중이 39.3%에 달해, 비록 성희롱 예방 교육이 이뤄지더라도 효율성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자들에 따르면, 간단한 설문지를 전달하고 이를 읽었음을 사인하는 형식으로 성희롱 예방 교육이 이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실상 실정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셈이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10인 이상 사업장에서는 연 1회 이상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갑을관계 하에서 성폭력이 일어나는 등의 문제로 인해, 성폭력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공론화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도 문제로 꼽혔다. 실제 응답자 163명 중 성폭력 발생 시 문제 제기를 한 이의 비중은 22.7%에 불과했다. 문제를 제기했으나, 만족스러운 사후 조치가 이뤄졌다는 응답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응답자의 25.8%는 "조치 과정에서 2차 가해가 발생했다"고 답하기도 했다. 피해자가 더 큰 피해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는 셈이다. 

실제 정규직 전환을 사흘 앞두고 인사권자에게 성추행을 당한 성폭력 피해자인 전직 출판사 마케터 탁수정 씨는 피해 사례를 사내에 공론화한 후, 2차 가해를 당했다. 현재 소셜 미디어를 통해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 사례를 모으며 공동 대응을 준비 중이라는 탁 씨는 "피해자가 숨어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며 "숨어야 할 사람은 가해자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성이 자신의 폭력적인 행위를 성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탁수정 씨는 "남성이 같은 직장 여성에게 구애하면, 여성은 이에 공포를 느낄 수 있다"며 "특히 유부남 상사가 미혼 여직원에게 구애하는 경우가 빈번한데, 이 경우 여성은 구애에 응해도, 응하지 않더라도 불이익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성폭력 개선 위한 법 마련해야

출판 노동계는 성폭력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관련법을 개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남녀고용평등법과 국가인권위원회법을 개정해, 성폭력이 발생할 경우 사업주에게 의무적 조치를 강제하는 법안을 도입하는 한편, 보호 사각 지대에 놓인 비정규 노동자까지 보호하도록 관련 조항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권미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남녀고용평등법 일부 개정안은 성폭력 피해자가 요청할 경우, 사업주는 즉시 배치 전환, 근무 장소 변경 등의 조치를 취해 피해자와 가해자를 떨어뜨리도록 강제하고 있다. 아울러 성폭력 사례를 신고한 이에게도 부당한 징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았다. 

노동계는 또 노사정 협의체를 구성해 성폭력 실태를 개선할 실질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기실 이와 같은 대안은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내놓은 바 있다. 지난해 여성가족부는 출판, 병원, 유통 등 여성 노동자 비중이 큰 업종에는 노사정 협의체를 구성하겠다는 업무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이 내용은 올해 업무추진계획에도 담겼다. 하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역시 비정규 노동자 비중이 큰 영화계의 경우, 사업주가 아닌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 운영하는 영화인신문고라는 고충처리신고센터를 만들어 피해자 보호 조치를 취하고 있다. 영화인신문고가 접수한 사건은 영화산업노조(노)와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가협회(사), 영화진흥위원회(정) 추천위원 3인 등 총 5인으로 구성된 중재위원회에서 처리한다. 

하지만 출판 사업주를 대변하는 양대 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인회의는 이 문제와 관련해 특별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한 노조 관계자는 "이들은 이권이 개입된 문제에는 목소리를 크게 내지만, 노동자 성폭력 문제와 관련해서는 단 한 번도 사용자로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김환균 언론노조 위원장은 "저도 위원장 취임 전 (PD 시절) 한 출판계 인사가 (성폭력 가해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걸 들은 적 있다"며 "문화 콘텐츠 생산자는 막연히 행복한 업무 환경에서 일하리라 생각했는데, 믿음이 산산이 부서졌다"고 말했다. 

권미혁 의원은 "출판계가 영세하고 폐쇄적이라 업계 소문을 두려워해 피해자들이 입을 다물어야만 하는 것 같다"며 "더 많은 여성과 남성의 호응을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이대희 기자 eday@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기자가 되면 거지부터 왕까지 누구나 만난다고 들었다. 거지한테 혼나고 왕은 안 만나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