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또 지나갑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입니다. 올해는 두고두고 회자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한 해를, 더 나가 그간의 한국을 정리해버린 시기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만, 그 밖에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출판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표지 너머 책 세상'은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크게 다섯 가지 주제를 꼽아, 이를 정리해 봤습니다. 유쾌한 일도, 생각해 볼 일도 있었습니다. 내년 이맘때는 좋은 이야기만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① <채식주의자>의 성공
-한강이 올해 5월 맨부커인터내셔널을 수상했다는 소식에 그의 전작 <채식주의자>(창비 펴냄) 열풍이 뒤늦게 불었습니다. 한때 1분에 7권씩 팔리는 경이로운 판매기록을 세우며 역대 일간 판매량 기네스를 갱신할 정도였습니다.
어찌 보면, 순수 문학에 관한 관심의 표현이라기보다 외국상의 권위가 판매를 이끌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채식주의자> 열풍을 한국 문학의 부활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장은수 :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문학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일부러 찾지는 않는 독자들이 맨부커인터내셔널 수상을 계기로 서점에 몰려들었습니다.
읽을 만한 한국소설에 관한 갈망이 좀처럼 충족되지 못했던 탓인지, 수상 소식 이후 <채식주의자>는 매우 빠른 속도로 판매되었습니다. 수십만 권의 책이 단기간에 팔려 나갔죠. 관심이 순식간에 집중되고, 강도 높게 유지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하이콘텍스트(high-context, 고맥락) 문화 시대입니다. 새로운 콘텍스트가 매우 빨리 형성되고, 거기에 맞는 콘텐츠가 집중적으로 소비되어 사라집니다. 초연결사회의 전형적인 특성이죠. <채식주의자>의 성공은 현 시대상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따라서 문학이 부활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난 3년 내내 한국 문학의 죽음이 이야기되었습니다. 회복의 기미는 있지만, 올해도 전반적 흐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채식주의자>가 한국 문학에 관한 독자의 관심을 환기하는 기폭제가 되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올해 베스트셀러 중 한국 문학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채식주의자>의 성공 원인을 외국 상의 권위로 봐도 될까요?
장은수 : 클레이 셔키는 인터넷 문화의 특성을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로 정리했습니다. <채식주의자>의 성공은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확 몰려든 후, 화제가 유지되지 못하고 급속히 사라졌습니다. 어찌 보면 일회성 단기 이벤트와도 같았습니다.
안타깝죠. '이 작품이 이렇게 좋은데 뒤늦게 알았다'는 이야기를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읽기가 실천되고 사회적 토론이 이어지면서, 다른 문학작품으로 이어졌으면 더 좋았겠죠. 하지만, 말 그대로 책이 한 차례 소비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홍 : 한 권의 베스트셀러가 탄생하면 주제와 스토리, 작품의 문제의식, 작가의 의도와 세계관이 널리 회자되고 담론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런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 베스트셀러는 단순히 많이 팔린 책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쉽게도 <채식주의자> 성공에는 이러한 현상이 뒤따르지 않았습니다. 오직 권위를 가진 '문학상 수상'이라는 뉴스가 전체를 지배했어요.
사례는 다릅니다만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와이즈베리 펴냄)는 200만 부나 팔렸는데, 이 책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는 미지수입니다. 베스트셀러는 단순히 판매 부수의 획일적인 우열을 가리는 지표가 아닙니다. 그 사회 지적 역량의 일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채식주의자>의 뒤늦은 성공에는 다소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장은수 : 다시 우리 문학의 황폐한 기초를 살펴봐야 할 때입니다. 황현산 선생께서 현대 우리 문단의 등단 구조가 너무 고루하다는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온라인에서 작품을 발표할 수 있고, 독자에게 내 책을 공개할 수 있는데도 여전히 우리 문단은 등단이라는 일종의 '문학고시'에만 갇혔다는 쓴소리입니다.
이제 새로운 방식의 문학 제도를 고민할 때입니다. 실제 새로운 시도도 나오고 있습니다. 기존 계간지와 맥을 달리 하는 <악스트>, <릿터> 등의 문학잡지가 나왔습니다. 독립잡지도 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우리 문학계가 계속 자기 혁신을 이어가길 바랍니다.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인터내셔널 수상에 이 작품을 영어로 옮긴 데보라 스미스의 뛰어난 번역이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홍 : <채식주의자>의 성공에서 중요하게 짚어야 할 건 번역가의 위상입니다. 알다시피, <채식주의자>는 좋은 영문 번역가를 만났기에 맨부커인터내셔널을 수상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존재합니다. 부인할 수 없지요.
그간 우리는 번역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번역은 단순히 외국어를 자국 말로 옮기는 작업이 아닙니다. 언어는 문화 전반을 담아내는 수용체입니다. 언어에는 역사, 전통, 철학, 심리 등 공동체 전체의 유산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습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국가적으로 가장 먼저 투자한 사업의 하나가 번역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영국이 아니라 일본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역량이 이때 뒷받침됐습니다.
번역을 통해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가치와 사상을 자신의 언어로 체화하는 작업이 이어집니다. 그간 우리에게는 체화의 과정이 부족했습니다. 번역의 중요성을 몰랐기 때문이죠.
<채식주의자>의 성공을 계기로 우리 출판계, 문학계, 나아가 학계가 우리 작품을 외국에 소개할 번역가를 모집하는 데 그치지 말고, 외국 작품을 더 적극적으로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관련 전문가를 적극 양성해야 하겠죠.
장은수 : 핀란드에서는 외국문학의 번역도 핀란드어에 관한 기여로 본다고 합니다. 외국 문학을 번역함으로써 자국어가 더 풍부해지고 세련되게 발전하리라고 생각해 크고 작은 지원을 하는 거죠.
우리도 변해야 합니다. 좋은 문학을 좋은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가를 더 집중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그들 역시 문학의 영역을 작가와 함께 개척하는 존재로 봐야 한다는 걸 <채식주의자>의 수상이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더 많은 독자가 한국어로 전 세계의 모든 문학유산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문학이 풍부해지고, 그에 따라 우리말도 풍성해집니다. 가령, 각종 작가 레지던시에서 작업 공간을 지원할 때, 그 대상에 번역가도 포함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물론, 한국문학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번역가 지원도 지금처럼 꾸준히 진행되어야겠죠.
② 페미니즘 서적 열풍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묻혔습니다만, 한국에서 올해처럼 첨예하게 여성주의 논쟁이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을 계기로 메갈리아 논쟁, 문단 내 성폭력 논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소셜미디어는 우리 사회 모든 국면을 두고 남녀 성대결의 장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출판도 이 흐름을 적극 반영했습니다. <나쁜 페미니스트>(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사이행성 펴냄)가 큰 사랑을 받았고, 맨스플레인을 비판하는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창비 펴냄),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창비 펴냄),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펴냄),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지음, 교양인 펴냄)도 주목받았습니다.
예스24에서는 여성/젠더 분야 서적 판매량이 전년 대비 132.6% 상승했고, 알라딘에서는 무려 전년 대비 3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현상이 이어지리라고 보시는지요?
이홍 : 지엽적으로 보면 ‘여성 해방’으로 표현 합니다만, 좀 더 넓게 보면 종교, 인종, 성별, 빈부, 국가의 차이를 넘어 보편적인 인간 존엄의 가치에 관심을 기울이는 현상이 출판계에 두드러진 것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구조적 불평등과 인권 억압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자는 차원에서 페미니즘 서적 출간 열풍 역시 한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흐름이 또 다른 모순과 대립 촉발의 방편이 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역사적으로 여성에게 가해진 차별과 억압, 이에 기인한 위협 증대의 원인과 전개 방식, 그리고 그 결과는 단면으로 일단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여성 차별에 관한 정확한 시각에 도움을 주는 책이 앞으로도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장은수 : 페미니즘 서적 붐이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민음사 펴냄) 등 최근 몇 년 동안 관련 서적은 꾸준히 출판되었고, 독자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강남역 살인 사건이라는 하이콘텍스트적 사건과 맞물려 관심이 폭발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이민경 지음, 봄알람 펴냄)를 주목했습니다. 무명이었던 저자가 관련 사건에 빠르게 대응하면서 여성이 현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소셜 펀딩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200만 원을 목표 금액으로 펀딩을 시작했는데, 20배인 4000만 원이 모였습니다. 좋은 독립출판 성공 사례라는 점에서도 고무적입니다.
③ 중고서점 호황
-도서정가제 개정안 시행 후 온라인 서점이 중고서점 사업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특히 이를 선도하는 알라딘은 지난 한해에도 분당, 부산, 잠실 등지에 중고서점을 추가로 여는 등 관련 사업에 집중하는 모습입니다. 예스24도 강남점을 열어 중고서점 사업에 진출했죠.
왜 온라인 서점이 이처럼 중고서점 사업에 집중할까요? 사실상 오프라인 서점으로의 우회 진출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하는 이가 많습니다.
이홍 : 독자 입장에서야 더 저렴한 가격에 책을 손쉽게 구입할 경로가 확대되었으니 무조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출판 산업 구조적으로 보면 결코 환영할 만한 현상이 아닙니다.
중고서점과 같은 2차 시장이 탄탄하게 성장하려면 신간이 유통되는 1차 시장이 건강하고 활발해야 합니다. 신차 시장이 무너졌는데 중고차 시장만 활성화된다면 자동차 제조 회사가 멀쩡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한국의 출판 시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현 상황은 기형적이라고 볼 수 있죠.
온라인 서점의 중고서점에 의구심이 가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들 중고서점이 신간 시장을 침투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나옵니다. 정식 도매상이 아니라 마트, 도서관, 학교 등 비 서점 거래를 하는 벤더 업체가 출판사에서 새 책을 싸게 구입한 후, 이를 곧바로 (온라인 서점의) 중고서점에 내놔 이득을 취한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신간이 편법적으로 중고서점 시장에서 회전된다는 거죠. 물론 확인이 필요한 가설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보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장은수 : 도서정가제가 신간 도서의 구매 비용을 일정 정도 높였는데, 그에 관한 풍선효과로 인해 온라인 서점이 운영하는 대형 중고서점이라는 새로운 유통 형태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중고서점 시장에 진출했을까요? 미리 오프라인 서점 사업에 진출한 겁니다. 우회상장에 가깝다고 봅니다.
오는 2019년이면 서점 사업이 중소기업 보호 업종에서 제외됩니다. (예스24, 알라딘과 같은) 큰 기업도 서점 사업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의 중고서점은 2년 후를 대비한 선투자로 보입니다. 온라인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은 매우 다르기에, 사전 준비하는 거죠. 더불어 좋은 상권 위치를 선점하고, 오프라인 독자의 구매 습관도 체크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장기적 O2O 전략이라고 할까요?
-골목상권 침해 논란이 커질 것으로 우려되는 대목입니다. 이미 기존 중소 중고서점이 큰 타격을 받는다는 지적이 큽니다.
장은수 : 맞습니다. 한국의 중고서점 시장이 대기업이 참여할 정도로 크지 않습니다. 골목상권 침해 문제는 앞으로 더 커질 겁니다. 일단 알라딘은 발매 12개월 이전의 책은 앞으로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만, 더 지켜봐야겠죠.
이홍 : 대형 중고서점은 결국 규모의 경제를 추구할 것이 분명합니다. 유통기한 규제를 포함해, 더 면밀한 규정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④ 초판본 열풍
-올해 출판계 주요 트렌드가 옛 서적의 복간입니다. 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時>(윤동주 지음, 소와다리 펴냄)는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인터넷서점 3개월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고요, 미스터리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엘릭시르 펴냄)는 무려 100년 전 발매된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 <쌍옥적>을 초판본 형태로 공개했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작가의 작품이 초판본 형태로 나왔죠.
책이 단순히 읽기 대상을 넘어, 수집의 목적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 같습니다. 두 분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홍 : 초판본 부흥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하나의 관점으로만 해석하기 쉽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출판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으로 봐야 합니다. 전통과 권위의 상실이 지속되는 시대에 반하여 옛것을 복고하는 경향이 특히 문화 분야에서 뚜렷해졌습니다.
본래 문화 콘텐츠는 생명력이 깁니다. 시간이 지나더라도 당대에 새롭게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100년 전에 나온 책이라손 치더라도 소멸할 이유가 없죠. 이에 더해, 초연결사회에 들어 콘텐츠의 라이프 사이클이 매우 짧아졌습니다. 옛 책이 끝없이 재해석될 여지가 커졌죠. 이 흐름을 타고 초판본이 재조명받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옛 디자인이 새롭게 각광받는 현상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새로운 편집과 새로운 (옛 스타일의) 디자인도 초판본 부흥의 원인이겠죠.
장은수 : 초판본 부흥은 리에디션 전략입니다. 리에디션 전략은 판권 재계약 시기에 옛 책을 새롭게 디자인해 새로 독자를 창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초판본 열풍이 새로운 현상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초판본이 큰 인기를 누렸을까요?
저는 책이 단순한 읽기의 대상을 넘어 수집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제 책을 대체할 읽기 수단이 넘쳐납니다. 모두가 스마트폰으로 새로운 정보를 읽습니다. 우리 주위에 읽을거리가 넘쳐나죠.
그러니 출판계에는 책을 단순한 읽기 수단을 넘어서는 콘텐츠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습니다. 이에 종이책만이 가진 고유한 속성에 관한 탐구가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초판본 재디자인은 물성을 극단적으로 강화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미 한 세기도 더 전에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는 앞으로 책도 공예품에 가까워지리라고 했습니다. 초판본 열풍은 그 단초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예쁜 책이 인기를 누리는 현상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꾸준히 책을 새롭게 시험하는 실험적 서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장은수 : 책도 아니고 문구도 아닌 서적이 많이 나오죠. <5년 후 나에게>(포터 스타일 지음, 정지현 옮김, 토네이도 펴냄)와 같은 독특한 다이어리가 올해 인기를 끌었습니다. 노트와 책 사이에 존재하는 서적이죠. 콘텐츠를 담았습니다만, 정보성에 중점을 둔 기존의 책과 달리 활동성에 초점을 뒀습니다. '읽기 플러스'라는 가치를 실천한 예입니다.
복각본 시집이 인기를 끈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합니다. 책의 감촉 즐기기, 책의 소장 자체가 목적이 되는 서적이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겁니다.
이홍 : 저는 이와 같은 팬시형 도서 붐은 일시적이라고 봅니다. 지속성을 갖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새로운 유행에 의해 대체될 수 있습니다.
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영향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출판계에 미친 영향을 짚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군 이래 최악의 불황이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 유독 책이 안 팔린다는 하소연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올해 <대통령의 글쓰기>(강원국 지음, 메디치 펴냄), <대통령의 말하기>(윤태영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그럴 때 있으시죠?>(김제동 지음, 나무의마음 펴냄) 등 현 시국과 직·간접적으로 엮인 책은 발매시기를 가리지 않고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대통령의 글쓰기>는 2년 전에 나왔음에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에만 10만 부가 넘게 팔렸죠.
앞으로 현 시국을 진단하는 책이 꾸준히 나오리라고 봅니다. 두 분께서는 어떤 책을 기대하시나요?
장은수 : 대체로 책 소비는 평일 구입 후 주말에 읽는 식으로 이뤄집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 후 사람들이 평일에는 뉴스 보고, 주말에는 광장에 나가느라 책을 못 본다고들 하죠. 출판계 사람들이 이번 시국 들어 전반적인 판매량이 기존보다 20~30% 정도 줄었다고들 하는데,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책이 나오겠느냐는 더 생각해봐야 할 주제입니다. 일단 촛불민심을 고도화하는 책이 나와야겠죠.
이번 정국으로 우리 시민 사회가 생각보다 건강하게 자랐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들이 앞으로 여러 미디어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키워갈 것입니다. 현재의 사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를 어떻게 만드느냐는 구체적 고민이 제기될 테고, 책은 빠르게 이를 수용해 시민 사회를 뒷받침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책은 현 정국에서 불거진 여러 문제에 관해 오래 전부터 이야기했습니다. 지난 2~3년간 'OO사회' 'XX세대'와 같은 내용의 사회학적 책이 매우 많이 나왔습니다. 이번 촛불집회가 단순히 박근혜 대통령 탄핵만을 이야기하는 차원을 넘어, 그간 우리 사회에 누적된 모순을 비판하는 데 이르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간 책이 군불을 지폈다고 볼 수 있죠. 이미 사람들은 책을 통해 우리 사회를 깊이 성찰했습니다.
이홍 : 출판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룹니다. 이미 현 세태를 설명할 책은 충분히 나와 있습니다. 현 사태를 넘어서며 우리 사회는 어떻게 가야 할 것이냐에 관한 집단 지성이 발동할 겁니다. 앞으로 현 정국에 관한 책은 이 목소리를 충실히 전달하면 됩니다.
찬물을 끼얹자면, 이번에 촛불을 든 많은 이가 책을 열심히 읽어 이른바 '의식화'했다고 보진 않습니다. 이번 국면에서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한 매체는 소셜미디어였습니다. 지난 70~80년대 운동권 세대와 지금 촛불시민은 다르죠.
만에 하나 이번 촛불 정국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내 삶의 문제를 토해낸 채 끝나버린다면, 더 절망적인 미래가 오거나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체념에 빠져드는 분위기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판 역시 이를 반영해 위축될 것입니다.
장은수 : 어찌됐든 1987년 이후, 억압적인 집단 정체성 추구 사회가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의 발견이 이뤄지기 시작했죠. 개별 주체가 원하는 지식, 교양을 출판이 받아들여 1990년대 들어 대중 출판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X-세대가 원하는 책이 그 시대에 맞춰 쏟아졌죠.
아직 완결되지 않았습니다만, (1987년부터 올해까지 이어진) 이처럼 거대한 시민혁명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끼칩니다. 개인의 완성이 될지, 또 다른 새로운 주체를 호명하는 계기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30년간 이어진 사고혁명, 사회혁명이 촛불정국이라는 거대한 분출구를 맞아 겉으로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이제 책을 만드는 학자, 편집자, 작가의 역할은 이 분출구에서 다음 세대, 다음 사회에 우리가 갖춰야 할 교양, 지식, 삶의 태도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출판계 사람들의 분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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