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 "학림 사건, 신군부 고문으로 날조"
진실화해위 "학림 사건, 신군부 고문으로 날조"
28년 만에 누명 벗어…"사법부의 반성 있어야"
진실화해위 "학림 사건, 신군부 고문으로 날조"
전두환 정권 초기 대표적인 공안 사건이었던 '학림 사건'이 수사기관의 고문과 협박에 의해 꾸며진 것으로 드러났다. 학림 사건은 1981년 당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26명이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7일 "전두환 전 대통령과 신군부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정권 안정을 위해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 및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 관계자들을 탄압했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정부는 이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법 구금하고 고문해 공안 사건으로 날조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수사 과정에서 수사관들은 물 고문, 전기 고문, 구타 등 가혹 행위를 통해 진술을 강요하고, 수사 종료 후에는 멍든 흔적을 없애려고 경찰병원에서 멍을 제거하는 치료를 받게 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또 "서울지방경찰청은 불법 구금과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이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고 경찰의 수사 결과 그대로 법원에 기소했으며, 법원 역시 피고인들이 법정 진술 등을 통해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음에도 이를 심리하지 않고 무기징역 등 유죄를 선고했다"고 성토했다.

진실화해위는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국가가 피해자와 가족에게 사과하고 재심 등의 조처를 할 것"을 권고했다.

누명 벗은 이들 "민주주의는 싸워가면서 조금씩 발전하는 것"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를 들은 당시 사건 관련자들은 같은 날 명동성당 앞 민들레영토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환영의 뜻을 밝혔다.

▲ 1981년 '학림 사건'으로 옥고를 지렀던 이태복 전 장관 등 전민노련, 전민학련 피해자들이 진실화해위의 결정을 환영하는 성명을 낭독하고 있다. ⓒ프레시안

이태복 전 장관, 이선근 민생연대 대표, 박문식 제원회계법인 대표, 민병두 전 민주당 의원, 신철영 전 국민고충처리위 위원장 등 당시 학림 사건의 누명을 썼던 이들은 "우리가 주장했던 적극적인 반독재민주화투쟁론은 이후 1980년대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기본노선으로 자리잡았다"라고 평했다.

이들은 "(2004년 6월에) 이미 민주화명예회복심의위원회 등에서 민주화유공자로 명예회복이 이뤄진 바 있지만 공권력을 통한 인권 유린 및 사건 조작에 대한 사법적 조치와 반성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진실화해위의 이번 결정이 진실 규명의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라며 진실화해위의 재심 권고에 따라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 이태복 전 장관. ⓒ프레시안
당시 무기징역형을 받고 7년 4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던 이태복 전 장관은 "(진실화해위 발표로)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셈인데 당시 사법부가 저질렀던 반민주적 행위에 대한 반성 역시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당시 수사관이었던 이근안, 김수현이나 담당검사였던 안강민 변호사 등과는 이미 인간적으로 화해와 용서를 한 바 있으며 재심 결정을 통해 징벌을 요구하거나 할 생각은 없다"라면서 "다만 역사적 진실 면에서 볼 때 이번 (진실화해위의) 결정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박문식 대표는 "민주주의는 고착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싸워가면서 조금씩 전진하는 것"이라며 "용산참사 등 불행한 일들로 민주주의의 후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앞서서 싸워주시는 분들로 말미암아 조금씩 발전이 되면 (학림 사건처럼) 30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진실을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라고 말했다.

학림사건, '서울의 봄'에서 '고문 조작'까지…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전국은 민주화 열기로 들썩였다. 하지만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이듬해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광주 시민을 무참히 학살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 끝나고 민주화 운동은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학림 사건'은 당시 민주화 운동의 새 진로를 모색하던 학생들과 운동가들이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을 결성하면서 촉발됐다. 1980년대 초반 서울대 운동권 세력은 정부와의 정면 충돌을 피하고 장기 저항을 준비하려는 '무림'과 정면 대결을 주장하는 '학림'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선근, 박문식, 이덕희, 홍영희 등 학림 소속 대학생들은 신군부와 마찰을 피했던 학생 운동 조직의 노선이 광주의 비극을 불렀다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학생 조직 결성을 꾀했다. 이들은 1980년 전민학련을 결성하고 이태복 전 장관(당시 광민사 대표)이 만든 전민노련과 함께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듬해 1981년 6월부터 경찰은 전민학련 관련자 400여 명을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 영장 없이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해 구금했다. 8월부터는 전민노련 관련자 300여 명도 강제로 연행했다.

연행당한 이들은 짧게는 19일에서 길게는 78일까지 불법 구금당한 채 고문과 가혹행위 속에서 진술을 강요당했다. 당시 '고문 기술자'로 악명이 높았던 이근안 경감을 포함한 수사진은 수시로 물 고문과 전기 고문 등을 가하며 이들에게 국가를 변난할 목적으로 운동 조직을 결성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결국 반국가단체의 '수괴'로 지목된 이태복 전 장관은 1심과 2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최종심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나머지 피고인 25명도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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