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전'은 투표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기술의 발전'은 투표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프레시안 books]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를 읽고
내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일상기술연구소〉에 문화로놀이짱의 안연정 대표를 초대해 "몸으로 익히는 손노동의 기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문화로놀이짱은 폐목재를 업사이클링해 가구를 제작해서 파는 사회적기업으로 설립한 지 10년이 넘었다. 안연정 대표는 방송에서 "자기 손으로 물건을 직접 만들어 보면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이해하게 되는데, 그런 이해가 삶에 안정감을 준다"는 말을 했다. 자신이 일상에서 소비하는 물건이 순전한 블랙박스로 다가오지 않을 때, 자기 삶을 좀 더 잘 붙들고 있다는 감각이 생겨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케아에 가면 꽤 쓸 만한 4인용 식탁을 십만 원 정도에 살 수 있는 시대다. 금전적으로만 보자면, 자기 손으로 직접 나무를 자르고 붙여 가구를 만드는 일이 경쟁력을 갖기는 쉽지 않다. 기업으로서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만든다면 더욱 그러하다. 문화로놀이짱의 사업이 "어떻게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한가"를 묻는 질문에 안연정 대표는 "누가 만드느냐, 어떻게 만드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둘러 답했다. 그런 사람들이 문화로놀이짱이 만든 물건을 찾고, 그 덕에 작은 규모로나마 지속가능성이 생겨난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속가능성과 시장 경쟁력을 동의어로 받아들인다. 여기서의 시장 경쟁력은 계량될 수 있는 단기적 효용으로 환산된다. 그러나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단기적 효용만을 소비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이들은 단기적 효용 뒤에 숨은 층위를 볼 수 있는 사람이고, 그럼으로써 소비자이자 동시에 '시민'이 된다.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이영준·임태훈·홍성욱 지음, 반비 펴냄)를 읽으면서, 안연정 대표와 더불어 또 다른 친구 하나가 떠올랐다. 제빵을 배우고서야 돈 주고 사먹는 빵에 얼마나 많은 설탕이 들어가는지 알게 되었다던 친구였다. 나 역시 직접 요리를 해먹기 시작하면서 내 입맛에 익숙한 간이 얼마큼의 소금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입맛이 싱거워 지는 변화를 체험했다. 무엇이든 직접 만들어 쓰는 게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친구는 여전히 반지르르하게 구워진 페이스트리만은 사서 먹는 게 낫다고 말하고, 나 역시 외식을 전혀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알고 먹는 것과 모르고 먹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지나치게 값이 싼 식당이 뜻하는 바를 의심할 수 있게 되었음은 알게 된 덕에 일어난 변화들 중 하나다. 알고 쓰는 소비자는 모르고 쓰는 소비자와 다르다. 

그런데 가구나 빵, 한 끼의 식사뿐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소셜 미디어에 관해서도 이 말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첨단의 기술로 집약된 이런 물건(?)을 '알고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를 읽은 덕에 나는 기술을 '안다'는 것이 굉장히 다양한 의미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제빵이나 요리에서처럼 만드는 것과 아는 것이 가까운 분야가 있겠지만, 그 거리가 먼 분야라 해서 아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나는 내가 먹을 스파게티 한 그릇을 만들 듯이 소셜 미디어나 스마트폰을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스마트폰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페이스북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이런 첨단 기술을 만드는 기업이 어떻게 구성되고 움직이는지 얼마간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이해는 어떤 식으로든 차이를 만든다.

거대 기술 기업이 우리 일상을 장악하는 힘은 날로 커지고 있다. 가장 단순한 예로, 페이스북의 알고리듬에 따라 어떤 친구와 더 가깝게 소통하는지가 결정되기도 한다. 페이스북이 무엇을 얼마나 자주 보여주느냐에 따라 내 관심사가 재편되기도 한다. 미국 대선에 페이스북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지에 관한 숱한 사후 논평이 하나 같이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이야기처럼 들렸을 지경이다. 시민은 정치를 통제하고, 정치가 규제로 기술을 통제한다는 게 우리의 보편적 기대일 것이다. 그런데 기술을 모르는 시민이 내리는 선택들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정치가 기술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을까? 

▲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이영준·임태훈·홍성욱 지음, 반비 펴냄) ⓒ반비

우리가 민주주의를 당연한 정치 원리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시민의 통치가 왕의 통치보다 언제나 더 선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다. 선출된 권력은 때로 왕의 권력보다 무능할 수도 악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우리 선택의 결과이므로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진다. 우리 삶의 점점 더 많은 영역이 알지 못하는 기술의 영토로 포섭될수록, 왕의 선한 의지를 막연히 기대하는 것과 다름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기술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왕은 모습을 감추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 기술의 접근성을 민주성으로 착각하게 된다. "기계의 편리함이 기계를 잊게 만드는 아이러니가 21세기 기계의 운명이다."(157쪽)라는 이영준의 말이 기술의 위대함에 감탄하는 것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기술이 스스로를 지우면 지울수록, 기술의 힘은 보이지 않는 만큼 커진다.

이 책은 기술에 관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사회에 관한 이야기이자 경제에 관한 이야기,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덕에 기술을 안다는 것의 지평이 어디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저자들의 생각에 때로 동의하고 때로 반박하며 읽었다. 어떤 지점은 다소 강박적인 윤리의식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산업화시대의 자본-노동 이분법으로 오늘의 노동을 재단하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넘겨버리거나 내가 의견을 보탤 수 없겠다고 두 손 들게 되는 지점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동의하거나 반박할 수 있었던 만큼, 기술을 '알고' 쓰는 일이 감당할 만한 과업으로 여겨졌다. 누군가 충분히 시간을 들여 설명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내가 충분히 시간을 들여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술을 알 수 있다. 그러려면 그 일이 기술 사회를 사는 시민에게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납득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 덕에 좀 더 단단하고 구체적인 납득의 근거를 얻을 수 있었다.
eday@pressian.com 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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