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김은 왜 "우매한 짓" 저지르지 말자고 다짐했나
양김은 왜 "우매한 짓" 저지르지 말자고 다짐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42> 6월항쟁, 스물네 번째 마당
2017.03.08 08:34:31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6·26 평화 대행진,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지탱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다

프레시안 : 1987년 6·26 평화 대행진의 의의가 무엇이라고 보나.

서중석 : 6·26 평화 대행진은 전국 주요 지역이 거의 망라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시위 형태가 달랐기 때문이긴 하지만 1919년 3·1운동에서도, 1960년 4월혁명에서도 이렇게 한날한시에 전국 각지에서 들고일어나지는 않았다.

3·1운동 때 방방곡곡에서 각계각층이 일제의 억압 통치에 반대하고 목이 터져라 독립 만세를 외치지 않았나. 그것을 통해 그동안 일제가 선전했던 것이 거짓임을 한순간에 폭로했다. 그것처럼 6·26항쟁 때에는 학생과 여러 계층, 직종으로 구성된 시민, 노동자, 농민이 함께 들고일어나서 군부 독재 타도, 민주 헌법 쟁취, 직선제 쟁취를 외쳤다. 그것을 통해 군부 독재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고 따라서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지탱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줬다.

6·26 평화 대행진 때 대도시는 대도시대로, 중소 도시는 중소 도시대로 시내 중심가가 마비됐다. 6·10 국민 대회와 6·18 최루탄 추방 국민 결의의 날 때처럼 6·26 평화 대행진 때에도 경찰력은 도처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6·26 평화 대행진에 맞서 경찰이 전두환의 직접 지시에 의해 시위를 초동 단계에서 꺾어버리려 초강경 진압 정책을 썼는데도 그랬다. 6·26 평화 대행진은 전두환 정권이 엄청난 규모의 시위에 경찰력으로 대처하는 데 역부족임을 명백히 보여줬다. 시위를 초동 단계에서 눌러버리려던 전두환의 의도가 산산조각 난 것이다. 직선제 개헌을 비롯한 민주화 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전두환이 마지막으로 혹시나 하고 품었던 기대는 그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프레시안 : 평화 대행진이라는 이름과 거리가 있는 모습도 일부에서 나타났다. 그런 부분을 어떻게 봐야 할까.

서중석 :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이 보도한 대로, 6월 26일 시위가 대규모이긴 했지만 과격함은 적었고 시위대는 전반적으로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전체적으로 6·10 국민 대회에 비해 시위 규모가 훨씬 커지고 시위 횟수, 발생 지역 등이 늘어났는데도 방화나 폭력 사태는 줄어들었고 시위 양상은 덜 과격했던 것으로 경찰은 분석했다. 시위대의 이러한 모습은 이날따라 유난히 과격하고 폭력적이었던 경찰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화염병을 사용하거나 파출소 또는 전경 버스를 불태운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경찰의 과잉 폭력 진압에 맞서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6·26 평화 대행진 후 경찰은 서울 2139명을 비롯해 전국에서 3467명을 연행했고 경찰 관서 29곳, 시청 등 관공서 4곳, 민정당 당사 4곳과 경찰 차량 20대가 불타거나 파손됐으며 경찰 573명이 다쳤다고 발표했다. 국본(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은 "위대한 민주 승리의 날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며 현 정부는 이제 국민의 뜻에 승복, 국민이 원하는 바대로 새 헌법에 의한 정부 이양 일자를 구체적으로 밝히라고 촉구했다. 바짝 긴장해서 당사 정문과 후문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비 병력을 평상시의 3배 이상 늘렸던 민정당은 학생들이 쳐들어오지 않고 비교적 평화롭게 6·26 평화 대행진이 끝나자 어색한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6월 27일, 28일에도 시위는 계속됐다. 27일에는 광주, 목포, 군산, 익산, 대구, 마산, 청주, 부평, 부천, 안산, 서울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28일에도 광주, 목포, 군산, 부산, 마산에서 시위가 벌어지는 등 호남과 영남의 민주화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충주, 제천에서도 시위가 있었고 서울에서는 개신교 목회자와 신도들의 시위 및 민가협 회원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28일 미국 워싱턴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이날 1000여 명이 백악관 앞에서 기도를 한 후, "직선제 쟁취" 등을 외치며 백악관에서 1.6킬로미터쯤 떨어진 국무부까지 도보 시위를 했다. 징과 꽹과리로 분위기를 띄우며 4시간 동안 시위를 이어갔다.

4월혁명 시기 야당과 6월항쟁 시기 야당

ⓒ오월의봄

프레시안 : 그동안 6월항쟁 당시 주요 시위 등을 쭉 살펴봤다. 6월항쟁 시기에 야당이 한 역할, 어떻게 평가하나. 4월혁명 시기 야당과도 비교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4월혁명 때 지방에 있던 민주당원들은 여러 군데에서 시위를 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 광주 등에서 그랬다. 그렇지만 중앙당 쪽은 분위기가 달랐다. 중앙당에서도 4월 6일 딱 한 번 시위를 하긴 했다. 그렇지만 그 시위가 커진 건 학생, 시민들이 따라붙었기 때문이지, 야당이 시위를 그렇게 적극적으로 할 의사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4·19 그날 민주당 간부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다만 민주당 신파의 거두인 곽상훈 등 몇몇 사람이 '이거 해방 직후 같은 사태로 가는 것 아냐' 하는 식으로 걱정하는 모습을 써놓은 글은 있다. 4월 25일 시위, 그리고 이승만이 하야를 발표한 26일에 있었던 시위에도 민주당 중앙 간부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은 어떤 신문 보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4월혁명 때 민주당은 중앙당에서 한 번 시위를 하고 지방 몇 군데에서 그 지역 당원들이 열심히 시위를 한 걸 제외하면 사실상 외면했다. 가장 중요한 시위인 4월 19일 시위 그리고 4월 25일, 26일 시위에는 충분히 참여할 수 있었는데도 외면했다. 그렇기 때문에도 민주당은 정권을 거저 얻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게 민주당을 무력하게 한 요인이 됐다.

6월항쟁의 경우 민주 대연합이라는 말 그대로 야당(통일민주당)이 국본에서 주요 간부직에 더해 상임집행위원 같은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었고 국본의 모든 중요한 회의에 야당 관계자들이 참석해 의견을 나눴다. 그렇지만 6월 10일 시위에 적극 나선 걸 제외하면 어느 경우나 야당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고 신중론을 주장했다. 특히 학생들이나 시위대가 폭력 투쟁을 해서 군이 출동할까봐 몹시 두려워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6월항쟁에서 야당이 분명히 민주 대연합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역기능과 순기능이 동시에 있었기 때문에 야당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기가 어려운 면이 많다. 다만 6월 24일 영수 회담 직후 김영삼이 회담 결렬을 선언한 것은 전두환과 노태우, 민정당을 아주 당황하게 했다. 6·26 평화 대행진을 분열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직선제 개헌으로 가는 데 김영삼의 결렬 선언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평가를 해줄 수 있겠다.

그리고 1986년 10월, 11월에 그랬던 것처럼 이 시기에도 정권 쪽에서 군이 출동한다는 소문을 특별한 사람들을 통해 흘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대중 쪽에 그랬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이희호 글에도 나오는 것처럼 6월항쟁 시기에 김대중 집에서는 자료를 은밀히 땅에 묻는 일도 있었다. 군이 출동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와 그랬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좀 더 대담하게 사태를 지켜보는 태도를 취했다면 안 그랬을 텐데, 과거에 워낙 당하고 해서 마음이 다급했던 것 같다. 그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것에 대해 이희호는 한겨레에 연재한 '이희호 평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1987년 6월) 18일부터 불길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지요.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소문이었어요. 동교동 우리 집으로 제보 전화들이 계속 왔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남편을 체포한다는 정보를 청와대에 파견 나가 있던 고위급 장교가 알려주기도 했지요. 우리는 수첩이랑 자료들을 비닐봉지에 쓸어 담았지요.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꽃나무를 옮겨 심는 척하면서 그것들을 마당 화단에 묻었어요. 1980년 5월 17일 밤이 다시 오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날 군인들이 오지 않았어요." '편집자')

국민에게 충격 안긴 노태우의 6·29선언

프레시안 : 다시 돌아오면, 1987년 6월 24일 김영삼이 영수 회담 결렬을 선언한 후 전두환과 노태우는 6·26 평화 대행진 상황을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직선제로 가기로 합의했다. 초강경 진압으로도 6·26 평화 대행진을 누르지 못했으니 전두환과 노태우는 뭔가 반응을 보여야 하지 않았나.

서중석 : 6월 29일 오전 9시를 조금 지난 시각,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6·29선언으로 알려진 특별 선언을 발표했다. 핵심 요지는 이렇다. 첫째, 여야가 합의해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선을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현토록 해야겠다. 둘째,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해야겠다. 셋째, 김대중도 사면 복권돼야 한다. 넷째, 기본적 인권을 신장해야겠다. 다섯째, 언론 자유를 창달해야겠다. 여섯째, 자치와 자율을 보장하고 지방 의회를 구성해야 하며 교육 자치도 실현해야 한다. 일곱째, 대화와 타협의 정치 풍토를 마련해야 한다. 여덟째,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미래형으로 돼 있는 건 전두환한테 진언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첫째에서 다섯째까지는 그동안 야당과 민주화 운동 세력이 끊임없이 주장한 사항으로, 대개가 1972년 유신 쿠데타 이전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여섯째 지방 자치의 경우 지방 자치 단체장 선거는 언급하지 않았다. 즉 제한적인 지방 자치만 얘기한 것이다. 일곱째와 여덟째는 해석하기에 따라 박정희 유신 체제나 전두환·신군부 체제에서도 주장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중 여덟째는 파시스트들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노태우의 6·29선언은 그다지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게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폭넓게 확장하고 발전시키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15년 전의 민주주의 수준으로, 유신 쿠데타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야당과 민주화 운동 세력, 그리고 국민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전두환 군부 독재 체제가 내세웠던 것과 정면으로 배치됐기 때문이다. 이 선언의 핵심인 대통령 직선제는 그동안 전두환과 노태우, 민정당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던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장기간 혹독한 탄압을 받아왔던 사람들한테는 대단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안 : 양김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이 선언이 공표됐을 때 언론은 노태우가 독자적으로 결단해 6·29선언을 내놓은 것으로 보도했다. 민정당 핵심 당직자는 물론 청와대 수석비서관들도 이 선언이 공표되기 직전에야 알았다고 보도했다. 그렇지만 특별 선언 내용을 잘 읽어보면 사전에 전두환과 합의 또는 교감을 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양김은 크게 환영했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는 "오랫동안 많은 국민이 피와 땀과 눈물로 싸워온 결실이라는 점에서 늦었지만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고 말했다. 6·29선언에 대해 각별히 많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김대중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의장이었다. 김대중은 내방객들을 응접실에 두고 혼자 안방에 들어가 특별 선언 발표를 지켜봤다. 그러고 나서 "이제 이 나라의 정치가 새로운 장을 실현해나갈 조짐을 보게 됩니다"라고 소감을 밝히고 "민주화가 될 수 있도록 국민과 협력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지 대통령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특별 선언 이틀 후인 7월 1일 전두환은 노태우의 시국 수습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 6·29선언 소식을 전한 경향신문 1987년 6월 29일 자 1면. ⓒ경향신문



초미의 관심사가 된 김대중 출마 문제…양김 "80년과 같은 우매한 짓 하지 않겠다"

프레시안 : 6·29선언에서 언급한 직선제 개헌 문제는 김대중 사면 복권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나.

서중석 : 6·29선언이 나온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김대중의 대선 출마 여부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86년 11월 5일 김대중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현 정권이 수락한다면 비록 사면 복권이 되더라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천명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내외신 기자들도 그 문제에 대해 아주 강하게 물어봤다.

그러한 질문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김대중과 김영삼은 7월 1일, 전두환이 특별 선언을 수용한다고 밝힌 그날 오전 민추협에서 "두 사람의 단합을 염원하는 국민의 뜻을 우리는 결코 어기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 선언했다. 이날 김영삼은 "김 의장과 나는 국민과 세계에 약속한 네 가지 사항을 분명히 지킬 것"이라며 그 내용을 설명했다. 네 가지는 "▲현 정권의 일관된 정책은 두 김 씨를 갈라놓는 것이지만 우리는 절대 흔들림 없고 한 치의 간격도 없이 단합하며 ▲민주화가 될 때까지 또 그 이후에까지 협력하며 ▲우리는 절대로 표 대결로 싸우지 않겠으며 ▲(19)80년과 같은 우매한 짓을 하지 않으며 국민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한다"는 것이었다.

1980년과 같은 우매한 짓을 하지 않겠다, 이렇게까지 얘기한 것이다. 1979년 12·12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신군부가 1980년 5·17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탈취하던 그 시기에 양김이 어떤 짓을 했는지를 양김 자신들처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이 네 가지는 똑같은 내용이라고 봐도 좋다. 하도 사람들이 안 믿으니까 네 가지로 나눠 그걸 반복해서 거듭 약속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김영삼이 이렇게 네 가지 사항을 얘기하자 김대중은 "김 총재의 설명대로 우리는 단결할 것이며 우리는 이제 정치의 마지막 봉사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마흔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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