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민주항쟁 30주년에 돌아보고 내다보며
6월민주항쟁 30주년에 돌아보고 내다보며
[특별 기고]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6월민주항쟁 30주년에 돌아보고 내다보며
1. "내 탓이요" 자세 필요

1987년 6월 항쟁 전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태전개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필자가 발제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내 탓이요"라는 심정으로 우리의 자화상에 엄정한 잣대를 들여 대보자는 심경으로 받아들였다. 좀 더 나은 우리의 미래를 기약하자면 "내 탓"부터 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2. 87년 6월 항쟁 이전의 상황 

1972년의 유신, 전두환 신군부 쿠데타, 광주학살, 5공 군부독재가 극심했던 터라 민주 대 반민주 대결은 너무 당연했고 통일 대 반통일 구도 역시 도식적이었다. 1960년 4월 혁명이 5.16군사쿠데타로 무산된 뒤 계속된 군사독재-유신체제 폭압과 야당에 대한 실망 때문에 역설적으로 재야민주화 운동에게 기대가 몰렸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80년 광주학살 이후, 한국의 군사독재와 미국에 대한 반발이 가져온 체제 거부의식이 학생운동 속에 사회주의권에 대한 편향으로 나타났던 것도 사실이었다. 동시에 민족해방론(NL)이 학생운동 속에서 북한의 정통성-정당성을 인정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많은 제적학생 청년들은 민족해방(NL)론 의식을 지닌 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동시에 러시아혁명 초기 볼세비키 이론이 도입되어 노동해방(PD)론으로 영향을 미쳤다. 청년학생운동의 동향은 사회운동, 종교운동, 지식인운동, 문화예술운동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야만적 탄압이 있었다고 해도 청년학생운동이 분단 상황에서 급진화하는 것은 우려할 일이었다. 비록 청년학생들의 반발과 비난을 듣더라도 중견 이상 선배들의 설득과 견제가 필요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민주항쟁의 지속-유지에만 급급했지 항쟁 성공 이후의 청사진 논의에는 소홀했다. 

재야민주화운동에서는 김대중-김영삼 중심으로 직선제 쟁취를 통한 야권 정권교체만을 대안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대세였다. 재야 사회운동이 올바른 방향성을 가질 때라야, 조직적 힘을 발휘할 때라야 야권의 분열과 파쟁을 막을 수 있다는 인식에는 이르지 못했다. 70년대 이래 다수 재야진영은 김대중 세력과 여러 시국사건으로 함께 고초를 치르면서 심리적 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NL, PD 이론과 논쟁 그리고 직선제 개헌을 통한 정권교체론만 있을 뿐 실현가능한 재야 시민사회의 독자적 대안, 특히 직선제 개헌을 통한 정권교체의 구체적 내용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필자는 1986년 인천민주항쟁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탄압당할 때 그 사무처장으로 수배 당했다가 남영동 대공수사단에 체포되었다.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된 가운데 대공수사단에서 고문살해당한 고 박종철군의 죽음이 은폐조작되었다는 것을 감옥 밖으로 알려 6월항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핀 일이 있었다. 당시 의로운 교도관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서 6월민주항쟁에 불씨를 살릴 수 있었다. 동아일보에서 자유언론운동했다가 유신독재체제의 탄압으로 해직기자가 됐지만 기자의 소임을 감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3. 6.29선언으로부터 87년 13대 대선-총선 패배까지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집단은 3김이 모두 대통령에 입후보할 수 있는 기본전제인 대통령 직선제에 양보하면서 다른 모든 것에 대한 통제권은 그대로 장악했다. 6.29선언이 바로 그 내용이었다. 신군부를 비롯한 기득권세력은 1960년의 4월 혁명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정통성과 정당성에서 열세에 몰려 자신들이 정권을 잃게 될 경우, 사회개혁의 파도에 떠밀려 해방 직후부터 유지해온 특권구조를 잃게 될 것이라고 긴장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민주화운동 진영은 비록 민주항쟁을 통해 군부세력을 거세하지 못한 채 제한된 항쟁의 성과 위에서 민주화를 진행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이 대선과 총선을 관리하는 ‘과도정부’ 역할을 하도록 용인한 것은 최대의 실수였다. 전두환의 퇴진을 관철할 때까지 양김의 연대를 유지하도록 강제했어야했다. 6.29선언이 있자 직선제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는 양김의 철수와 함께 텅 빈 집이 되었다고 했다. 양김의 분열이 맹렬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이른바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도 양분되어갔다. 비판적 지지(김대중 지지)와 후보단일화(김영삼 지지) 그리고 독자후보 진영으로 신속히 분열했다. 

우선 김영삼 중심의 통일민주당이 김대중 지지 세력인 평화민주당의 분열로 양분되었다. 전두환-노태우 세력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의 주력은 김대중을 지지했다. 야당을 분열시켰다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노태우-김영삼-김종필-김대중 4자가 입후보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4자입후보 필승론’을 내세웠다. 그 논리는 경북, 경남, 충청, 호남 4대 권역으로 나뉘어 대결하면 단결력이 우세한 호남이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었다. 그러나 양김의 분열로 사기가 떨어지고 실망한 야당 지지자들과 젊은 유권자들은 패배를 예감하고 선거를 외면하고 있었다. 대선이 끝날 즈음 여권의 부정선거 시비가 일어났지만 국민여론이 외면했다. 양김과 민주화운동 진영이 반쪽이 났는데 선거관리를 맡은 과도정부 전두환 정권이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국민은 정권교체의 기회를 줘도 분열을 일삼는 야당과 민주세력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13대 대선으로 한국은 정확하게 네 조각으로 분열했다. 이 분열 위에 소선거구제 국회의원 선거로 다시 분열을 제도화했다. 이렇게 지역분열구도를 완성했다. 4월 혁명이 5.16군사쿠데타로 무산된 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26년 동안 온갖 희생과 투쟁으로 성취한 6월 민주항쟁의 결과를 대선-총선 패배와 지역분할구도로 귀결시켰다. 87년 대선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후유증을 남겼다. 1) 그동안 위태롭지만 하나의 대오를 이뤄 투쟁해왔던 민주화운동 진영이 영호남, YS-DJ 진영으로 분열했다. 그리하여 급진세력을 제어할 힘을 잃었다. 2)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와 기득권세력의 주요 보루인 영남에서 민주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획득할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3) 7~80년대 동안 제도 야권에서 주도권을 장악해왔던 YS가 영남에서마저 기반이 흔들리자 여당인 민정당과의 합당을 모색하게 되었다. 4) 군부 기득권세력이 다시 쿠데타로 집권할 가능성은 사라졌지만 냉전 기득권의식이 잔존할 수 있는 토양이 유지되었다.

4. 6월 민주항쟁 승리와 정치적 패배

필자는 1987년 13대 대선 패배를 경북 김천교도소에서 맞았다. 함께 수감되어있었던 청년학생 출신 수감자 40여명은 분노와 허탈 속에 빠졌다. 그들은 맨 주먹으로 감방의 시멘트벽을 쳐서 살갗이 벗겨지곤 했다. 이렇게 6월항쟁 승리의 성과는 배신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더 두려운 것은 이들 청년들도 감옥 안에서 NL과 PD 논쟁을 벌이면서 한 치의 양보 없이 분열하고 있었다. 양김의 분열과 다름없이 이들 청년들의 분열도 미래 불안의 불씨로 떠오를 것을 필자는 예감했다. 필자도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으로 특별사면되어 석방되었다. 바깥세상은 이미 13대 총선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대선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분신항쟁으로 맞서고 있었다. 석방된 필자는 이들 분신 사망한 학생-노동자들의 장례 위원장 노릇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곤혹스런 것은 장례식에 김대중, 김영삼 야당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장면이었다. 자신들의 분열과 패배로 그 젊은이들이 세상을 등졌다는 것에 참회의 뜻을 표하는 것이기보다는 재야인사들로부터 13대 총선의 지지를 얻기 위해 참석하고 있다는 점이 참기 힘든 모욕으로 생각되었다.

13대 총선은 전 국민을 4등분으로 쪼개놓은 지역분열 그대로 여소야대, 즉 여당인 민정당보다는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의 야권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이 여소야대가 6월 항쟁의 성과로 선전되기도 했다. 이른바 국회의 여소야대 구도에서 거둔 성과로 전두환을 비롯한 5공 군부세력에 대한 ‘광주청문회’가 열렸다. 노태우 세력는 전두환이 주도한 광주학살에 대한 면죄부를 노렸으며 청문회를 계기로 5공 신군부 세력 속에서도 전두환-노태우 세력의 분화가 일어났다. 

국제적으로는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 등장이후 미소 양대 강국 사이에 진행된 데탕트, 탈냉전사태는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에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참여했고 북한이 외교적 고립을 겪는 계기가 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은 수세적이었던 남북관계에서 북한의 연방제 안에 대해 국가연합제 안에 근거해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안했다. 노태우 정권은 남북고위급회담을 갖고 남북관계의 기본지침이 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이처럼 남북관계가 순항할 것이 예상되는 가운데 소련과 중국이 남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남북한은 1991년 유엔에 동시에 가입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이 남한과 수교하는 것을 전제로 미국과 일본도 북한과 수교할 것을, 다시 말해서 4대국교차승인을 할 것으로 기대됐으나 미국과 일본은 북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북한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을 붕괴시켰듯이 북한에 대해서도 체제붕괴를 기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북한은 핵개발에 착수했다. 다시 한반도에 전쟁위협이, 그것도 핵전쟁위협이 시작되었다. 

노태우 정권의 등장으로 위기감에서 벗어난 기득권세력은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러시아-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수립, 수출경제의 비약적 확대, 남북관계에서의 우월적 위상 확보에 고무되자 두 개의 전선에서 공격적 입장으로 선회를 시도했다. 첫째, 여소야대의 의회구도를 만들어 보수대연합을 통한 기득권세력의 확대를 시도, 민주화운동으로 성장한 민주진보세력의 확장을 차단하고자 했다. 13대 총선에서 김대중 평민당에 이어 제3당으로 추락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6월 항쟁 이전의 야권 주도세력의 위치를 당시의 정치구도에서는 실현할 수 없는 처지였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통합을 통해 여권 보수대연합에서 정권장악을 시도하려했다. 첫째, 거대 민주자유당의 출현은 민주화운동으로 제기되었던 개혁-진보 의제의 후퇴를 강요했고 보수-공안세력의 재강화를 가져왔다. 둘째, 남북관계에서도 세계유일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의 강경노선에 맞춰 점차 대북강경노선이 강화되었다. 전쟁이 아닌, 군비경쟁과 외교를 통해 소련방과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해체시킨 미국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관철시켜나갔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봉쇄노선을 강요했다. 

5. 6월 민주항쟁과제, 촛불시민혁명으로 계승

1997년의 김대중 정권과 2002년의 노무현 정권, 두차례 민주정권 집권은 남북관계와 내정개혁에 진전을 보이는 듯 했지만 집권경험의 부족과 극우보수진영의 반격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곤 했다. 그래도 노무현 정권으로의 계승은 김대중의 노련한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였다고 보겠다.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그의 진솔한 품성에 대한 대중적 애정이 젊은 세대들 속에 깊이 뿌리박기도 했지만 국정운용의 미숙성은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러나 민주정권 10년이 지나고 이명박-박근혜 두 보수정권은 김대중-노무현 두 개혁 진보정권의 모든 치적을 부정하고 지우는데 노력을 경주했다. 남북관계의 파탄과 부의 편중에 따른 사회불안의 극대화로 나타났다. 최순실 국정농단과 부정부패의 만연은 2016~17년의 촛불시민혁명으로 나타나 박근혜의 탄핵과 구속, 문재인 개혁진보정권의 등장으로 귀결되었다. 1600여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촛불시민혁명은 비폭력평화운동으로 전개되어 전 세계가 놀라고 찬탄하는 사회운동으로 기록되었다. 우리에게 이 같은 능력이 있다는 것에 우리 자신을 따듯한 눈으로 평가할 여유가 생겼다. 부상자 한 명, 구속자 한 명 없이 권력자를 권좌에서 내려오도록 만든 시민혁명이 성공했던 것이다. 아직도 진행중인 이 시민혁명이 어떻게 매듭지어질 것인지 세계가 우리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과제를 2017년 평화시민혁명이 이어받아 실현하고 있는 중이다. 개헌과 선거법개정을 비롯한 제도개혁도 중요한 과제다.

무엇보다 중요한 흐름은 6월 항쟁 때와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현재 세력변환이 진행 중이다. 미국의 일극체제가 다극체제로 진행 중이며 분단된 한반도의 남북도 외세에 의해 일어났던 분단을 어떻게 남북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해 나갈까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북핵 위기를 대결과 전쟁 없이 해소해 나가는 지혜가 무엇보다 가장 긴요한 지혜일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 해방과 분단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와 산업화--지난 한 세기 이상 겪은 고난과 담금질이 강인한 인내와 지혜를 우리로 하여금 터득하도록 만들었다. 지난 촛불시민운동의 비폭력 평화시민혁명이 그것을 보여주었다.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한국위원회 운영위원장은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도 함께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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