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에게 고한다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고한다
[기고] 대법관 제청 불가 사유와 혁신적 대법관 제청 방안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고한다

사법부는 현재 겉으로만 조용할 뿐 안에서는 상반된 두 갈래 움직임으로 몹시 뒤숭숭하고 분주하다. 고위법관들은 퇴임 대법관 2인에 대한 후임 대법관 인선 작업 때문에 마음 졸이며 들떠있다. 반면 소장 법관들은 오는 6월 19일로 예정된 전국법관대표회의 준비로 마음이 분주하다. 법관독립 강화를 염원해온 개혁파 법관들은 조기 정권교체 덕에 희망에 부풀어있다.

행정부의 장관에 비해 세상의 이목이 덜 쏠리긴 하지만 대법관은 임기가 6년으로 긴데다 총13인밖에 되지 않아 임기도 없고 20명 가까운 장관 자리보다 더 중요하면 중요하지 덜 중요한 자리가 아니다. 실은 대법원만 제대로 기능해도 '이게 나라냐'는 장탄식이 나올 수 없다. 현재 진행 중인 대법관 선임 과정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문제는, 대법원장이 '언제' 제청권을 행사할지다


법원과 세상의 관심은 당연히 '누가' 대법관이 될지에 쏠려있다. 하지만 이번에 더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언제' 대법원장이 제청권을 행사할지다. 언제 제청권을 행사하느냐에 따라 누구를 제청할지까지 달라질 수 있는 묘한 상황에 양승태 대법원장이 처해있기 때문이다. 현재 양 대법원장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열릴 오는 6월19일까지 열흘 남짓한 기간 중에 눈 딱 감고 대법관 제청을 해치우는 방안이다. 다른 하나는 대법관 제청 시점을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재조사를 통한 의혹 해소 시점 이후로 늦추는 방안이다.

결론부터 미리 못 박자면 양승태 대법원장은 대법관 2인에 대한 제청권 행사를 6월 19일 이전에 뚝딱 해치우면 안 된다. 통상적인 상황이라면 양 대법원장은 대법관 후보들에 대한 법원행정처의 인사 검증 기간이 종료되는 6월 8일 이후 며칠 내로 두 자리 모두에 자기사람을 제청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양 대법원장이 처한 상황은 전혀 녹록치 않다. 전형적인 내우외환 상황인데다 임기도 100일 밖에 안 남은 처지다. 안팎으로 독립변수가 많아 복잡한 제청방정식을 풀지 않으면 안 된다.

내부적으로 양승태 대법원장은 사법개혁 저지 의혹과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의 최종 책임자로서 일반 법관들의 재조사와 책임 추궁, 개혁 요구에 직면해있다. 오는 6월 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약속해서 간신히 사법파동의 불길을 잡고 시간을 벌었지만 열흘 후로 다가온 전국법관대표회의의 요구내용과 전개방향에 따라서는 자신의 운명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제청권을 행사할 경우 통제할 수 없는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외부의 정치적 환경도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우선 지난 6년 재임기간 동안 서로 음으로 양으로 밀어주던 보수정당이 지난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잃고 분당해서 확실한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게다가 박근혜 탄핵과 조기대선을 거쳐 진보 성향의 문재인 대통령이 들어서서 역대급 지지도와 선풍적 인기를 누린다. 대법관 제청 시 청와대 수용 및 국회 동의 여부를 따져봐야 하는 양승태 대법원장 입장에선 전례 없이 예측하기 어려운 험난한 정치 환경 속에서 제청권을 행사해야 하는 셈이다.

사법파동에 대한 대법원장의 책임

양 대법원장은 탄핵 사태만 없었던들 지금의 불리한 정치 상황이 없었을 거라며 탄핵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을 불러온 것은 박근혜의 헌법무시와 국정농단이었다. 여기에는 양 대법원장도 사법부 수장으로서 책임이 없지 않다. 이를테면 대선 무효 소송을 4년 내내 개시도 않고 직무유기해서 국정농단 정권을 방조한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 대선 효력이 걸려있는 중대한 대법원 단심재판이기 때문에 대법원은 직권으로 증거를 수집하고 증인을 불러서 대선 무효 여부를 6개월 내에 판단했어야 했다.

대법원이 원세훈 국정원장의 대선개입 재판에서 선거법 위반을 인정한 2심 판결을 기어이 파기환송하며 노골적으로 혼용무도 정권을 편 들어준 죄도 결코 가볍지 않다. 실은 사법부의 박근혜 정권 봐주기 판결들은 박근혜 정권이 탄핵당할 때 일제히 함께 탄핵 당했다고 봐야 한다. 양 대법원장은 본인이 직접 판결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다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처럼 제왕적 대법원장이 이끄는 사법부에서는, 정권의 명운이 걸린 중대사건이 대법원장의 뜻에 반해서 처리될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대선무효소송 직무유기와 원세훈 재판 파기환송에 대해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오는 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로 귀결된 사법파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까지 양 대법원장은 사법개혁 저지 의혹 및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하여 법원행정처 처장과 차장의 사표를 수리하며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양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와 사법행정의 최종 지휘감독권자로서 어떤 경우에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지난 4월 18일자 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더라도 양 대법원장은 국제인권법연구회 탄압 목적으로 실시된 법관연구회 중복 가입 해소 조치가 많은 반발을 불러와 일주일 만에 철회하지 않을 수 없다는 법원행정처장의 사전보고를 받았다. 당연히 전후 사정을 소상하게 파악했겠지만 당시 탄압 시도의 전면 중단을 지시한 흔적이 없다. 


같은 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양승태 대법원장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이탄희 판사를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발령 냈다 일주일 만에 철회할 당시에도 법원행정처장한테 자세한 전말을 보고 받고 후속조치를 재가했다. 이때도 무리하게 회유하다 실패한 속사정을 죄다 들었겠지만 누구 하나 문책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진상조사위의 법원행정처 서버 조사요구를 법원행정처장이 거부할 때도 대법원장한테 사전에 보고하고 협의했을 게 틀림없다. 만약 양 대법원장이 그때 법원행정처장의 서버조사 거부방침을 말렸더라면 지금처럼 법관대표들의 블랙리스트의혹 재조사, 즉, 법원행정처 서버컴퓨터 조사요구에 시달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양 대법원장은 사법파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모면할 길이 없다.

대법원장, 관행대로 대법관 제청권을 행사할 자격과 권위를 잃었다

법원행정처가 일선법관들의 사법개혁 요구를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지난해 12월과 금년1, 2월은 촛불시민혁명이 가장 힘차게 진행된 기간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법원행정처 고위판사들의 인식세계에는 제왕적 존재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촛불시민혁명의 정신이 침입하지 못했다.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할 욕망으로 눈이 멀었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법원행정처는 지난 겨울 법관독립 강화 방안에 초점을 맞춘 학술대회 개최를 막기 위해 학술대회 주관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와해 및 축소 공작을 기획했다. 국제인권법연구회의 기획총무, 이탄희 판사를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발탁해서 연구회 약화와 학술대회 연기를 획책하다 이탄희 판사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촛불혁명 기간 중에 촛불민심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사법파동을 일으킨 양승태 대법원장의 법원행정처에 가중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지난3월 25일자 법관 설문조사 결과는 절대 다수의 일반법관들이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행정시스템의 모든 측면을 철저하게 불신하고 발본적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알려준다. 특히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과 법관인사에 이의를 제기하는 판사가 인사 불이익을 받을 것으로 예상한 법관이 무려 88.2%에 달하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주요사건에서 대법원판례에 도전하거나 주요사건에서 정권에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가 인사 불이익을 받을 것으로 예상한 법관도 각각 47%, 45.3%나 됐다.

501명의 법관이 응답한 설문조사결과는 양승태 대법원장 아래서 일반법관들이 소신을 갖고 사법행정을 비판하거나 주요사건을 재판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런 참담한 조사결과에 응당 책임져야 한다. 설령 사법개혁 저지 의혹과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지지 않았더라도 양 대법원장은 이번 설문조사 결과만으로도 늘 하던 방식대로 대법관 제청권을 행사할 모든 자격과 권위를 상실했다고 판단된다.

대법관 후보 추천위, 허수아비로 설계돼 있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대안이 무엇인가? 양승태 대법원장이 대법관 제청 자격이 없다면 후임 대법원장에게 제청권을 넘겨줘야 하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도 100일 넘게 대법관 2자리가 공석으로 남게 된다. 대법원의 재판 지연으로 국민피해가 커지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미 대법관 제청 절차가 많이 진행돼 36명의 후보에 대해 인사 검증과 의견 수렴이 사실상 끝난 상태다. 지금에라도 곧바로 대법관 후보 추천위원회를 구성하면 며칠 내로 제청 절차를 마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일단 대법관 후보 추천위가 구성되면 그 후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대법관 후보 추천위의 후보 심사과정과 3배수 이상 최종추천후보 확정 과정이 남아있지만 지금까지는 단1회 회의로 이 절차가 종료될 만큼 허울 좋은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법령과 제도가 그렇게 설계됐고 그렇게 운영돼 왔다. 우선 대법원장과 뜻을 같이하는 '대법원장의 사람들'이 총10명 위원 중 6명이다. 추천위는 과반수로 결정하기 때문에 대법원장의 뜻에 맞는 후보가 최종 추천 명단에 반드시 포함되게 돼있다. 더욱이 대법원이 만든 대법관후보추천위 규칙에 따르면 대법원장은 추천위에 직접 적합한 후보를 천거할 수 있고 이 경우 추천위는 부적격 사유가 없으면 무조건 최종추천후보 명단에 포함시켜야 한다.

대법원장은 관행적으로 빈자리마다 3명의 후보 명단을 추천위 회의 당일에 제출해 왔다. 추천위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이들 모두를 최종후보로 추천해야 하므로 추천위의 역할은 다른 후보들 중에서 구색을 맞출 1인을 표결해서 추가하는 것밖에 없다. 단 한 번의 회의로 추천위 활동이 싱겁게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대법원장은 자신이 직접 천거한 후보 3인이 모두 최종추천명단에 올라와 있으므로 가장 입맛에 맞는 1인을 제청한다. 한마디로 추천위는 완전히 허수아비로 설계돼 있다. 대한변협이나 동료판사 등 대법원장이 아닌 사람이나 단체가 추천한 후보들은 모두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 대법관추천위를 구성하고 나면 이런 형식적 절차가 기다릴 뿐이다.

대법관 제청권 행사, 이렇게 하라

그래서 말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금 당장 대법관추천위 구성 등 더 이상의 제청 절차 진행을 중단시켜야 한다. 전통적 방식에 의한 대법관 제청권 행사를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 그 대신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가장 혁신적인 방식으로 대법관 제청권을 행사해야 한다. 나는 양 대법원장이 법원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런 전제아래 나는 양 대법원장이 사법정의와 사법개혁에 앞장서는 마음으로 모든 기득권과 사심을 내려놓고 다음과 같은 수순과 방식으로 대법관 제청권을 행사하는 파격을 선보이길 기대한다.

첫째, 판사블랙리스의혹의 철저한 재조사를 위해 법원행정처 서버와 기획조정실 PC 조사를 허용하고 대법관 제청시점을 블랙리스트 의혹해소 이후로 미루겠다는 방침을 국민들에게 밝힌다. 블랙리스트 의혹해소에 필요한 재조사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대법관 제청이 크게 지연되지는 않는다.

둘째, 오는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가 대법관 제청의 원칙과 기준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도출해서 이미 인사검증이 끝난 36명의 후보 중 가장 부합하는 후보 2인을 추천해 줄 것을 공개적으로 요청한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파격으로 보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제3공화국 시절에는 헌법에 따라 법관 대표들로 구성된 대법관추천위원회가 같은 기능을 수행했었다는 사실을 적어둔다.

셋째, 전국 각급법원의 법관들을 명실상부하게 대표하는 이번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천거된 대법관후보가 가장 적합한 대법관후보라는 믿음으로 전국법관대표회의 천거후보 2인만을 대법원장이 추천위에 직접 천거할 방침임을 밝힌다. 다시 말해서 대법원장의 직접 천거권한을 다른 후보들에 대해서는 행사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넷째, 추천위 내부에서 전국법관대표회의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할 수 있도록 대법원장 몫 법관 추천위원 1인을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천거하는 법관으로 지명할 방침임을 밝힌다. 이 법관추천위원은 추천위 회의에서 전국법관회의가 어떤 원칙과 기준으로 최종후보 2인을 선출했는지 다른 추천위원에게 설명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게 된다.

사법부의 새 역사, 선택은 양승태 대법원장의 몫이다

내 귀에는 이쯤에서 법관들과 정치권, 시민들과 언론의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들리는 듯하다. 사실 양 대법원장이 기득권과 사심을 내려놓기로 결심하면 위에서 제시한 수순과 방침을 따르는 게 크게 어렵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우외환 국면에서 가장 확실하게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법원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만약 양 대법원장이 이렇듯 사심 없는 구상을 실천에 옮길 경우 양 대법원장은 9회 말 역전 굿바이 홈런으로 대미를 장식한 꽤 멋진 대법원장으로 한국사법사에 길이 남을 게 틀림없다.

다행히 양 대법원장 입장에서는 제청 후보 0순위, 임종헌 법원행정처차장이 사법개혁 저지 의혹으로 이미 사퇴한 마당이라 이런 선택을 할 때 특별히 눈에 밟힐 후배 법관도 없을 것 같다. 만약 양 대법원장이 오직 법원과 사법부 구성원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 하나로 위와 같이 제청권을 행사한다면 얼마나 신선하고 감동적일지 생각만 해도 절로 신이 난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새 역사를 향해 성큼 큰 발을 내딛을 획기적인 계기로 작용할 게 틀림없다. 물론 선택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양 대법원장의 몫이다. 부디 국민과 법관들의 기대를 잊지 않기 바란다.

- 전국법관회의란?


전국법관대표회의에는 명실상부한 전국의 법관 대표 101명이 모인다. 모두 각급법원의 직급별 판사회의에서 선출된 법관 대표들로서 배석판사, 단독판사, 지법부장, 고법부장이 골고루 있다. 여기에 법원장 몇만 보태면 제3공화국 헌법의 대법관 추천 회의보다 더 강력한 전국 법관 대표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필자)


▲ 양승태 대법원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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