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대타협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사회적 대타협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민미연 포럼] 경제학자 케인스와 영화 <인셉션>이 전하는 당부
사회적 대타협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문재인 정부의 공정거래위원장으로 내정된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인사청문회에서 겸손하면서도 견고한 자세와 답변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질의하는 야당 의원들의 자질부터 검증해야 할 필요가 강하게 느껴질 만큼, 김 후보자는 청문회 안팎에서 격조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제학을 가르치는 김 후보자는 자신이 가장 모델로 삼아온 경제학자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며,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 철학은 케인스에 바탕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 후보자와 문재인 정부는 정부 및 공공의 적극적인 역할이 시급하며 유효하다는 측면에서 케인스의 기조와 철학으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경제학에 문외한이라, 케인스와 문재인 정부의 관계 및 정책 기조에 대해 명확한 평가를 하기는 어렵다. 다만 20세기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케인스의 '영민한 관찰' 중 하나로부터 한국이 얻을 교훈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자들이나 정치 철학자들의 관념들(ideas)은, 그것이 옳든 그르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다. 사실 그 관념들 말고는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별로 없다. 점진적으로 잠식해 들어오는 관념의 영향력에 비해 기득권층의 힘은 크게 과장되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곧장 드러나든 늦게 드러나든, 좋은 것에든 나쁜 것에든, 위험한 것은 기득권이 아니라 사상이다."(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고용, 이자,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1936) 중)

▲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자신의 경제구상을 담은 이른바 '제이(J) 노믹스'를 발표했다. ⓒ연합뉴스


생각과 사유, 관념과 사상의 치명적인 영향력을 모티브로 삼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던 영화가 있다. 많은 분이 본 영화 <인셉션(Inception)>(크리스토퍼 놀란, 2010)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두 번의 중요한 사건을 겪게 되는데, 한 번은 아내를 잃은 것도 모자라 아내를 죽인 범인으로 몰리는 비극이고, 한 번은 누명 쓴 범죄기록을 지우고 아이들과 다시 함께 살게 되는 희극이다. 이 희비극에는 앞에서 언급한 케인스의 통찰이 녹아들어 있다. (주인공에 의해 심어진) 한 줄의 관념을 시작으로 사고를 전개한 뒤, 그에 따라 최종 행동을 결정하는 등장인물들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학자 케인스와 영화 <인셉션>이 한목소리로 전해주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한국은 격차가 몹시 심각하고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며 괜찮은 소득의 계층조차 낮은 삶의 질을 토로하는 고달픈 사회다. 여기에는 다수 국민의 행동 양태를 결정하는 '시작점의 관념들'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배경이 있다.

예컨대, 작은 격차와 고르게 높은 삶의 질로 유명한 복지선진국들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자 사이의 격차가 너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의 해결책을 강구한다. 이것은 '연대임금제'로 불리기도 하고, '산별노조 단체협약'으로 칭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구현하므로 '연대임금제'와 '산별노조 단체협약',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서로 이음동의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연대임금제는 수익이 높은 (대)기업의 노동자들이 그렇지 못한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을 배려하여 급여를 양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노조를 활용하여 노동자들이 급여를 양보함으로써 노동자 간 격차를 축소하는 나라들이 실존하고, 이러한 양보와 연대가 튼튼한 나라들은 골고루 높은 삶의 질로 이름이 높다.

그 대명사로 꼽히는 스웨덴에서, 노동자들이 연대임금제를 현실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은 내 급여를 더 올리는 것보다 노동자 간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관념이 다수 노동자들에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홍기빈 박사의 고증에 따르면, 스웨덴의 노조는 산업 간, 기업 간 임금 격차가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를 해칠 수 있다는 인식에 기초해 노조가 앞장서서 임금 격차를 줄여나가는 행동과 정책을 모색했다. 최연혁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노조 소속의 경제학자들은 노동자의 격차를 줄이지 못하면 사회의 불평등도 해소할 수 없다는 취지에, 노노갈등을 해소함으로써 사회갈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케인스의 통찰에 비추어보면, 노동자 사이의 단합과 연대를 중시하는 관념의 힘이 급여의 양보와 연대임금제라는 너무도 어려운 과제를 풀어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노동자와 노조가 도덕적 정통성을 스스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을 때, 이것이 기업에 대한 거대한 압력으로 작용하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으로 이어졌다는 점 또한 꼭 상기해둘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스웨덴 기업이 내는 세금은, OECD 기업 세금 1등 노르웨이와 별 차이 없는 2등인 상황이고, 한국과 비교하면 스웨덴 기업들은 약 130조 원의 세금을 한국의 기업들보다 더 많이 납부하며 스웨덴 공공복지에 기여한다. 단순화하면 벌이가 괜찮은 노동자들의 임금 양보와 기업 세금의 대대적인 증액을 노사가 주고받은 셈이다.

이와 같은 노사 간의 거래는 첫째로, 단순히 고소득 노동자들을 질타하거나 혹은 무작정 양심에 호소하여 양보와 연대를 요구해서는 실체 있는 진전이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둘째로, 고소득 노동자들의 이타적 행동이 세금과 복지를 통해 결국 그들은 물론 국민 전체를 위한 복지로 돌아와 모두에게 이롭다는 사고가 확산되어야 노동자들이 양보와 연대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내 수입을 늘리는 것보다 그것을 양보해서 노동자 사이의 연대를 강화하는 게 중요하다는 도덕적 측면의 관념 하나와, 노동자 간 양보와 연대가 튼튼해야 기업의 복지 기여가 확대되며 급여 양보를 금전적으로 보상받음은 물론 국민 전체의 살림살이도 나아진다는 경제적 이득 측면의 관념 하나가 조화를 이루며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을 때, 그러한 관념의 힘이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에는 희미해져야 할 관념들과 긴히 확립돼야 할 관념들이 무척 많다. 지면의 제약이 있으니 그중 가장 중차대한 것 하나만 꼽는다면, 우리에겐 더 많은 수입 대신, 더 많은 여가와 더 경감된 노동 강도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이 시급하다.

지난 5월 9일 치러진 19대 대선을 복기한다면, 각 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노동시간 단축(과 그에 따른 고용 창출)을 공약했다. 그러나 그 어느 후보도 고임금 일자리의 대부분은 노동시간을 줄일 때 수입도 줄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것은 대선 후보들이 한결같이 ‘국민을 위한 불편한 진실’을 비겁하게 외면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한국 국민의 지배적 관념이 '그들 자신을 위한 불편한 진실'을 전향적으로 수용하고 삶의 질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소통을 하기에는 많이 미진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만약, 수입이 감소하더라도 가족과 보내는 시간과 휴식을 늘리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한국 사회에 실로 지배적이라면, 부질없는 인생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야말로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너무나 귀중한 것이라는 가치관이 가득하다면, 정치와 노동자와 기업은 고임금 노동자의 수입을 줄여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사회적 타협의 과제를 두고 허심탄회한 대화에 임할 수 있을 터이다. 이 소통의 자리에서 우리는 기업의 공공복지 기여를 증대시키기 위한 논의는 물론 '연대임금제'와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대해서도 정말로 그것을 실현하는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

노동시간과 고임금의 동반 축소는 격차를 축소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일자리를 늘려 노동강도를 경감시키는 데도 필수이고, 영세 자영업을 줄여 최저임금을 무리 없이 전격적으로 인상하는 데도 꼭 놓아야 할 징검다리다. 여기에서 복지와 연결 지어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면, 복지와 삶의 질 선진국들은 여성의 경제활동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각종 복지 제도와 직장 문화를 통해 제거하고 있고, 이 덕분에 짧은 노동시간으로 남성의 벌이가 줄더라도 부부의 수입을 더 한 가구 단위의 소득을 고르게 상향시키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성의 독립적인 경제활동 참여는 여성의 자존감과 행복감을 그 자체로 증진시키는 것에 더하여, 남성의 가족 부양 부담을 덜어내어 남성에게도 혜택을 준다. 결국 이것은, 돈보다 소중한 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 관념, 자유로운 개인 시간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관념의 강력한 확산이 한국의 숱한 고질병들을 해결하고 골고루 잘 사는 선진국으로 향하는 기초이자 시작점이 된다는 의미이다.

한국의 일자리는 장시간의 노동시간과 비인격적인 노동여건 속에 고소득을 올리는 일자리와 똑같이 장시간을 일하며 자존감을 해치는 노동환경에 시달려도 근로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자리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이 비루한 일자리 여건을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타협이 절실하다고 이미 오래전부터, 비록 겉핥기지만, 논의되어 왔다. 이제 변죽은 그만 울리고 앞선 국가들에서 이루어낸 내실 있는 사회적 타협을 한국에서도 성공시키려면 그를 위한 사유와 가치관의 확립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에서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정확하게 진단했다. 양보와 타협, 연대와 배려에 기반한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불평등을 해소해 나가자고 호소했다. 사회적 대타협은 경제 각 주체들이 모두 짐을 나누고 힘을 모아야 하며 정부의 의지만으로는 어렵다는 현실 인식도 진솔하게 내비쳤다.

사회적 대타협을 성공으로 이끄는 요소 중 하나는 솔직함이다. 정부도, 노동자도, 기업도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의 장에 들어서야 한다. 나는 문 대통령의 인품과 결연한 사명감을 믿어 의심치 않는 국민의 한 사람이지만, 격차 해소를 위한 대통령의 의지와 솔직함은 조금 더 보완이 필요하다.

양보와 연대는 특히 고임금 노동자에게 있어 눈앞의 수입이 줄어드는 타격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면 임금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문제인식이 공론화되어야 한다. 양보와 타협, 연대와 배려와 같은 윤리적 관념을 강조하는 것은 수입 감소의 솔직한 공론화에 큰 도움이 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단지 도덕적 당위를 앞세우는 사회적 타협은 결실을 맺기 어렵다.

당장의 수입은 줄어들지라도 직장 내 인간다운 환경과 여유로운 여가를 누리게 되어 오히려 이들의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는 희망의 미래상이 선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양보와 연대 속에 격차를 줄였을 때, 그 희생의 참여자들에게 어떠한 실리가 생기는지에 대해서도 뚜렷한 관념이 확고해야, '화끈한 양보'가 이뤄지고, '튼튼한 연대'가 구축되며, '한국을 바꿀 만한 사회적 타협'이 성사될 수 있다. 숭고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서 국민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할 값진 사회적 타협의 기적이 현실로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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