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의 '에로스'가 민주주의를 만든다
시민들의 '에로스'가 민주주의를 만든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좌담] 2017년에 6월항쟁을 말하다
시민들의 '에로스'가 민주주의를 만든다
6월민주항쟁 30주년, 그 의미를 찾는 여정을 정리하기 위해 '6월민주포럼'과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이 좌담을 준비했다. 김중배 대기자(당시 50대, <동아일보> 논설위원),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당시 40대, 화가), 박석운 진보연대 대표(당시 30대, 노동운동가), 전민용 전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장(당시 20대, 치과대학생),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박영민 바꿈 활동가가 좌담에 참여했다. 2017년을 기준으로 80대에서부터 20대까지, 세대를 막론한 다섯 패널이 백승헌 변호사('바꿈' 이사장, 당시 변호사 2년차)의 사회로 2시간 동안 '6월항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백승헌(변호사, 이하 사회) :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먼저 6월항쟁 하면 뭐가 떠오르는지. 사적 체험과 사회적, 역사적 체험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인지부터 이야기 나누었으면 한다.

왼쪽부터 백승헌 변호사, 박영민 바꿈 활동가, 김중배 대기자,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전민용 전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장, 박석운 진보연대 대표. ⓒ바꿈


30년 전 6월, 그날들의 기억

박석운(진보연대 대표, 이하 박석운) :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거대한 성과, 위대한 승리를 했다는 점이다. 6월항쟁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7, 8월 노동대투쟁으로 이어지는 정치사회적 공간을 열고, 이어졌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권교체에 실패함으로써 '죽 쒀서 개줬다'는 의미도 있다.(웃음)

김정헌(화가, 이하 김정헌) : 광장에 모였던 것, 특히 故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제일 많이 모였던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구나 하는 사실에 굉장히 흥분했었다. 또, 6월항쟁에 미술이 많이 관여를 했다. 최민화 작가의 '이한열 부활도'가 이한열 열사 장례 행렬 가운데에 딱 놓이고, 만장이 일렬로 쫙 나오는 장면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그때 광장에 모였던 체험이 2017년 촛불항쟁까지 온 게 아닐까 한다.

전민용(건치신문 대표, 이하 전민용) : 치과대학을 다닐 때였다. 시험을 6월10일 무렵까지 본 것 같은데, 그 다음부터는 시험 거부를 결의하고 거리로 나갔다. 의대, 치대생들이 함께 부상자들을 응급 치료하는 길거리 의료팀을 구성했다. 의료인가운을 입고 있으면 어디든 갈 수가 있으니까 그 중에 일부는 연락을 담당했다. 며칠 지나니 가운 입은 사람도 (통행이) 허용 안 되고, 잡혀 가고 그랬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6월 말 무렵에 경찰들도 거의 손을 놓고 집회를 막지 않아서 거리 집회 후 대학로 같은 곳에서는 차량 통행이 안 되고 군중들이 2~30명 씩 모여 길거리 토론회가 열리곤 했다. 거리에서 시국토론을 하는 것을 그 이전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 것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세상이 바뀌는구나…. 

김중배(전 MBC 사장, 이하 김중배) :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이여' 칼럼을 쓰기 전에 사람들이 그렇게들 많이 전화를 했다. 말을 하기 전에 자꾸 운다, 통곡을 하면서. 그런가 하면 칼럼을 내보내고 나니까 영감들이 계속 전화를 했다. 그때는 SNS 없이 '전화부대'라는 게 있었는데, '빨갱이 새끼 하나 뒤진 걸 가지고…'라며 정반대로 나왔다.

전민용 대표가 말씀하니, 6월26일(국민평화대행진)이 상당히 셌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사망한 박채라는 친구하고 돌아다니는데, 최루탄이, 최루탄 폭격이 맹렬했다. 쫓아다니다보니까 좀 피곤해서, 쉬려고 이렇게 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내가 원래 까무잡잡한데, 의대생들이 보더니 "저 양반이 변고가 났나" 해서 "선생님, 괜찮습니까?" 하는 거다.(웃음) 지금도 선하다.

또, (최루탄 때문에) 눈물이 나고 하니까 건물 화장실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잔뜩 있다. 전경들도 들어온다. 그러면 전경들이 그런다. "선생님들, 이렇게(눈 부미면서) 씻지 마세요. 물 뿌리세요."

▲ 국민평화대행진. ⓒe영상역사관


이 말씀을 장황하게 드린 이유는, 일련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에로스효과(Eros Effect)라고 할까. 사랑과 자유와 연대, 공감, 감수성 이런 것이, 말을 나누지 않았더라도,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생긴 거다). 그 연장 확대판이 촛불이라고 생각한다.

김정헌 : 문화예술 쪽에서는 그때가 제일 활발하게. 우리가 그때 막 만들어놓은 '그림마당 민'이라는 전시장이 있었다. 거의 처음하다시피 한 전시회가 '반고문전'인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나자마자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하고 '반(反)고문전'을 열었다. 박불똥이라는 작가가 전경들이 전두환을 붙잡아서 연행하는 그림을 그려서 붙여 놨다.

종로경찰서 대공과와 정보과가 항상 전시장을 드나들며 감시했는데, '반고문전'이 열린다니까 들이닥쳐서 압수해 가려고 했다. 결국 몇 명이 연행당하고, 작품을 자진 철수하는 조건으로 해서…전시를 며칠 못하고 문을 닫고 끝냈다.

또 이애주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부터 해서 그때 활약들을 했다. 이애주가 춤을 췄다. 문화예술이 그때를 전후해서 막 폭발적으로 꽃을 피웠다. 문화예술 계에서는 6월항쟁이 아주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사회 : 저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당시 2년차 변호사였다. 변호사들이 해방이후 처음으로 변호사 이름을 걸고 집단적으로 거리시위에 나섰고, 그러한 활동이 나중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결성으로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는 그 시위에서 최루탄을 맞아서, 수포로 조금은 고생했고 그 상흔이 오랫동안 남아 6월을 기념하기도 했다(웃음).

박영민(세상을바꾸는꿈 활동가, 이하 박영민) : 중학생 때 역사책에서 배운 게 기억이 난다. 역사와 관련된 책에는 다 나오는데, 6월항쟁만 단독으로 나오기 보다는 3.1운동부터 시작해서 이 땅에 이런 항쟁이 있었다는 그런 걸 가르쳐 준다. 6월항쟁에 대해 이렇게 길게 고민해본 건,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를 하면서 사실상 처음이다.

촛불집회 때문에 6월항쟁이 더 새롭게 다가오는 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들 뵙고 인터뷰를 하려고 조사를 하면서 더 느껴지는 게 있다. 대학에서 북한학을 전공했는데,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말을 쓴다. 통일이라는 것을 하나의 사건이 아닌 통일로 가는 노력 전체, 과정 전체를 통일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6월항쟁 역시 그렇게 다가왔다. 항쟁의 당사자였던 선생님들이 6월 어느 날에만 운동을 딱 하고 끝낸 게 아니었지 않나. 과정으로서 항쟁이 뭔지 최근에 고민을 좀 하는 것 같다.

김중배 : 6월 10주년 때(1997년) 서울대에서 강의를 했는데, 서울대 학생들에게 6월항쟁 이야기를 했더니 모르는 애들이 많았다.

박석운 : 그래서 교과서가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저들이 교과서를 바꾸려 하는 것이고. 정권이 바뀌고 교과서가 바뀌면서, 그 뒤 세대는 6월항쟁에 대해 알게 됐다.

사회 : 결국 체험이 어떻게 전승되느냐의 문제인데, 과거를 어찌 기억하는지와 현재와 연결되는 강도가 현실을 끌어가는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에게, 혹은 우리 사회에 6월항쟁은 어떤 의미로 남아있다고 보시나.

ⓒ바꿈


30년 후 되돌아본 6월항쟁

김정헌 : 개인적으로는 미술의 밑받침이다. 88년에 개인전을 했는데 작가들은 그 전부터 준비를 한다, 1년 전부터. 그때 일기식으로 쓴 노트를 보니, '반고문전' 준비에서부터 '이렇게 내가 농촌하고 관련된 그림을 편하게 그려도 되는가' 이런 자각심도 생겼더라. 일종의 문화적인 각성 같은 걸 6월항쟁 때 몸에 새긴 게 아닐까 한다.

사람이 달라지면 안에서 그때 길러진 에너지가 알게 모르게 작동하는 것 같다. 그 전에는 집회 같은 데에서 노래를 같이 부르는 걸 쑥스러워 하고, 손도 올라가다 말고 그러다 끝났는데, 그 다음부터는 확확 올라갔다. 모르는 사람들하고 섞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뻔뻔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대신 세상을 상당히 용감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행동이 뒤따른 게 아닌가.

김중배 : 이 얘기를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좌담에 오면서 생각을 했다. 나는 4.19혁명 이전에 신문기자가 돼서 4.19혁명과 5.16쿠데타, 5.18광주항쟁, 그리고 6월항쟁을 다 겪은 세대다. 4.19혁명 때는 그렇지 않은 데도 있었지만, 한국 언론 대부분이 시민, 민중들에게 굉장한 지지를 받았다. 신문사 취재하는 사람들이 지프차를 타고, 신문사 깃발을 꽂고 다녔는데 <동아일보>가 제일 환대를 받았다. 나는 <한국일보>에 있었는데 <한국일보>도 그런 지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지금 통한으로 남은 것이, 물론 사회전체가 이렇다하게 저항을 못했지만, 언론은 더군다나 저항을 못했다. 저항의 역사적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부끄럽고, 통탄스러운 흔적이다. 

이 말씀을 구태여 드리는 것은 촛불집회를 하고 정권이 교체됐지만, 실질적인 사회‧정치‧경제학적 ‘기축 기둥’은 거의 박정희 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으로 박정희의 유령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바탕에는 지금도 이것이 기능하고 있는 그런 시대에 살았다. 언론계는 통탄스럽고 부끄러운 시대에서 조금 탈출하려고 하는데 미수에 그쳤다.

(예전에는) 언론이 지금보다 훨씬 부자유스러웠다. 나 같은 사람도 남산에 끌려 다니기도 했다. 그때는 통제를 받고 제대로 보도 못하고, 우리가 정말로 마땅히 내보내야 될 진실을 못 내보내고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 공감대가 일부 사주까지, 이를테면 <동아> 같으면 김상만 씨 정도는 공감했다. 내가 현역(언론인)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잖나. 그런 점에서는 굉장히 달라졌다. 굉장히 퇴행했다.

박석운 : 그 당시 6월항쟁이 나름의 성과를 낸 배경으로는 축적된 모순, 누적된 민심 이반들이 있었다. 광주항쟁이 완전히 진압되고, 그 이후에 학생들의 처절한 투쟁들이 진행됐고,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유화국면'으로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뚫고 이런저런 민주화운동들이 움을 트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1985년) 2.12 총선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86년) 개헌 현판식 때, 5.3인천사태 등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탄압이 계속됐고 저항들도 계속됐다. 저항의 아주 큰 줄기가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 그리고 보도지침에 대한 폭로와 저항, 그러다가 박종철 고문치사가 터졌다. 모순의 강도가 훨씬 더 세지고, 그에 대한 저항도 질적으로 고양되는 과정을 거쳤다. 누적된 민심이반, 그게 (6월항쟁의) 배경이 됐다는 거다.

한편으론 6월항쟁이 그 정도로 전국으로 번지게 된 데에는 미시적으로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많이들 놓치는 부분인데, 6월10일 국민대회 때 초장에 경찰들이 요사이처럼 압도적으로 막았다면 성공하지 못했다. 그날 잠실운동장에서 노태우를 민정당의 다음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지명대회가 있었다. 그래서 주요 경력들이 다 강남에, 잠실운동장 근처를 철통같이 에워쌌다. 그 바람에 시내에 허술한 공간이 생겼다. 분노한 시민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동 가능한 공간이 생긴 거다. 모순의 한 결과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명동성당이다. 초전박살을 당하지 않고 커지면서 세(勢)가 붙었다. 세가 붙은 상황에서 탄압을 당했다. 토끼몰이 당하듯이 해서 명동성당으로 밀려들어갔는데, 김수환 추기경 등 가톨릭에서 방어를 해줬다. 가뜩이나 민심이 이반된 상태에서, 가톨릭과 전면전을 해야 하는 부담이 전두환정권에게 생겼다. 그래서 준-해방구 거점이 형성됐고, 전국적으로 상징적인 공간이 된 거다. 언론에서도 핵심 이슈가 됐다.

세 번째는 전두환정권이 계엄을 선포해야겠다는 고민을 하게 만든 동시에, 결국 계엄을 선포 못하게 된 원인이기도 한데 (6월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는 점이다. 당시 나는 노동운동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 뿐 아니라 수도권의 이른바 주요 위성도시들을 다니면서 가담을 하고, 판세를 봤다. 전두환정권은 서울을 방어하기도 급급한 상황이었고, 전체적으로는 무인지경이었다. 전국적으로 동시다발로 들고 일어나니까 이를 모두 다 막기에는 경찰이 부족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방의 도시들도 주요 거점 중심으로 방어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수도권 위성도시들이나 지방의 대도시나 중소도시들은 거의 무인지경 비슷한 상황이 된 것이다. 

▲ 명동시위. ⓒe영상역사관


계엄령을 내리지 못한 게 일각에서는 미국의 개입 때문이라고 하고, 일부 그런 측면도 있다. 하지만 계엄을 선포하고 군인을 투입하면 끝장이 나는, 전면전 내지 엄청난 유혈사태로 가면서 판이 뒤집히는 양상으로 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이 계엄 선포를 검토하다가 못했지 않나 생각한다.

또, 앞서 이한열 장례식을 말씀하셨는데, 이한열 열사 장례는 (노태우의 6.29선언 다음이니까) 6월항쟁의 중간 결과로 봐야 한다고 본다. 열린 공간에서 장례식이라는 계기를 잡아서 국민들이 대규모로 모인 것이고, 6월항쟁의 본질은 그 장례식 이전에 전국적으로 최루탄 맞아가면서 동시다발 내지 각각의 현장에서 많은 민초들이 함께 나서서 열심히 싸웠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저는 6.29까지 투쟁이 들불처럼 번져가는 과정이 1단계, 2단계가 이한열장례, 3단계가 7월~8월의 노동자대투쟁이라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선 과정에서 죽 쒀서 개 주는. 

김중배 : 6월18일 계엄론은 여러 가지 증언과 기록이 있다. 미국이 반대를 했고, 경찰도 군대까지 동원해서 전국을 제압하기 어렵거니와 오히려 더 반발을 살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또 일부 증언들에 따르면, 군 내부에서 별로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계엄령을 하려고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전민용 : 호헌철폐 직선제 서명운동이 5월 무렵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민심이반이라는 게 확인되는… 치과계 쪽도 그동안 침묵하던 분들이 용기를 내어 서명에 많이 참여했다. 그 때까지도 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였는데도 여러 분야에서 꽤 확산이 됐다.

사회 :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명운동 하는 게 운동방식이 되기도 하였다. 집단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지만, 참여자들에게는 혼자 고립돼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생각이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용기를 내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박석운 : 저들(전두환 정권)은 호헌 지지 선언을 조작했지만, 민주시민들은 각계 선언으로 확산돼 가는 그런 게 굉장히 귀했다. 신문에 날 정도였다.

전민용 : <동아>에서 조그맣게 실어 줬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부문별 서명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삶의 어떤 방향에 대한 전망이 생긴 거다. 그전에는 '모 아니면 도' 식으로 평생 비밀 활동을 하고 수배 받고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그렇게 살 건가, 아니면 현실을 모르는 척 적당히 눈감고 살 건가 택일해야 했다면, 부문별 서명운동 과정을 통해서 많은 치과의사들이 참여를 하고, 6월항쟁을 거치면서 대중적으로 확산이 됐고, 이런 동력을 기반으로 부문 운동들이 생긴 거다.

사회 : 6월항쟁 때까지는 승리의 경험이 정말 희귀하였는데, 귀한 승리의 경험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자부심으로 이어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참여한 분들일 수록 승리만큼이나 6월 항쟁의 한계 내지는 미완성의 문제를 많이 지적하고, 특히 정권이 유지되었다는데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이 6월항쟁 이후에 성립된 '87년 체제에' 대해 긍정적 의미화 함께 극복을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이한열 장례식. ⓒe영상역사관


87년 체제의 의의 그리고 한계의 극복

전민용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말도 있고, 앞서 박영민 씨가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말도 했지만, 민주주의도 과정으로 봐야 한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로도 완성될 수가 없다. 깨어 있는 시민들에 의해서 시기마다 계속 고민하고, 판단하고 합의하고 이러한 과정을 끊임없이 유지해나가는 그런 형태, 그런 구조 자체가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87년체제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박영민 : 막연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이렇게 했어야지. 왜 그렇게 못 했데'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이야기를 더 들어볼수록 그게 미완성 혹은 한계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과정으로서의 항쟁을 겪고 있다. 87년 광장에 있던 사람에게 '두 발자국 밖에 못가는 건 미완이야'라고 하는 게 민주주의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책임은 분명 그것을 목격하고, 미래를 그리는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김중배 : 동의한다. 민주주의에는 종착역이 없다. 하지만 항쟁의 시대를 살았던 내 입장에서는 그 당시부터도 미완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당시 국본에서 내건 지침을 보면 '노동자‧농민‧도시‧빈민' 여기부터 나온다. '재분배 문제'를 제기하고, '노동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자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나온다. 그러니까 (7, 8월)노동자대투쟁의 주제들이 국본의 강령 속에 이미 있었던 거다. 사실은 국본이 그걸(강령)을 이루지 못한 거다. 

87년체제의 극복이라는 이야기, 그것도 일리가 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87년체제의 극복이 아닌 붕괴되는 모습을 명백히 봤다. 극복하기는커녕 그 체제도 유지하지 못하면서 무슨 극복을 이야기하느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87년체제가 공고해야 한다' 그런 의미는 아니다. 물론 극복해야겠지만, 붕괴됐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했던가. '촛불'이 나서서 그 국면을 넘어섰지 않은가. 87년체제를 그나마 회복시킨 거라고 본다. 그것을 토대로 가야한다.

김정헌 : 전민용 원장이 앞서 이야기를 했는데 '모든 혁명은 항상 미완으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완성인 혁명이 어디 있겠나. 김중배 선생께서 초반에 에로스효과라고 한 말씀이 87년체제가 극복했거나 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촛불혁명까지 계속해서 가고 있다.

ⓒ바꿈


박석운 : 6월항쟁을 미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절반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내 관점에서 절반의 승리밖에 되지 못한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권에서) 이른바 '일반 시민'과 노동자 간에 굉장히 입체적인 이간책을 썼다. 여론을 조작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패륜 집단, 집단 이기주의, 폭력투쟁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수법으로 항쟁의 확산을 차단한 거다.

두 번째는 대선 과정에서 사회운동, 정치 운동하는 진영에서 전략적인 실수를 했다. 당시에 나왔던 후보 단일화, 비판적 지지론, 독자 후보론… 이게 다 틀린 거였다. '권력 분점을 매개로 한 선거연합'으로 갔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나도 그런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고민들이 굉장히 '천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정치인들 중심으로 이 문제를 접근함으로써 대사를 그르친 거다.

절반의 패배가 만든 것은 결과적으로 노태우, 군인 출신의 대통령의 집권과 3당 야합, DJP연합과 같은 야합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중간에 故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실패를 잉태하게 된 과정이었다고 본다.

절반의 승리로 인해서 그 뒤에 일어났던 일이 노동운동 내지는 민중운동, 부문 운동이 활성화되고 그 뒤에 또 경실련,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운동이 활성화되는 것, 30년간의 여러 사회운동의 기반을 만든 것이다.

한편 6월항쟁 10주년 토론회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했지만, 6월민주항쟁과 7․ 8월노동자대투쟁을 합해서 통합적으로 87항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거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대투쟁은 토대의 변화를 일으킨 효과가 있다고 본다. 노동 운동이 여러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성을 지니면서 사회 진보에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다들 주목을 하지 않지만 이번 촛불대항쟁은 조직된 노동자들인 민주노총 대오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 87년 6월항쟁으로 생긴 정치적 숨 쉴 공간을 뚫고 누적된 노동 모순들이 폭발하면서 노동대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있었다면, 이번 촛불대항쟁의 성과로 생기는 정치적 공간에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가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해야 한다. 

사회 : 30년은 물리적으로 한 세대라는 의미도 있지만, 현실 속에서 30년을 맞이하는 2017년 다시 시민의 힘으로 동시에 87년체제를 통해 성립된 제도 틀안에서 , 반민주적인 권력을 교체하였다는 의미가 겹치기도 한다. 때문에 아무래도 6월항쟁과 촛불항쟁을 동시에 겪은 세대에서는 이 둘의 연속성이나 연관성을 항상 염두에 두게 되는 것 같다.

6월과 촛불항쟁, 그 연속성에 대하여

박영민 : 시민들이 만들어낸 항쟁이라는 점에서 유관할 수는 있지만, 이번 촛불에 대해서는 그 숫자와 헌정 최초 탄핵이라는 것 외에는 개인적으로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동안 얼마만큼 헌정이 잘 지켜졌던가. 파업이 제대로 되지도 못했고, 기본권이 지켜지지도 않았다. 한 번도 헌법 내에서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고 난 후 헌정 질서를 되찾아야 한다고 얘기하니까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다.

전민용 : 87년에 박종철, 이한열이 있었다면 이번 촛불의 가장 큰 동력은 세월호 참사와 쌓여 있던 사회경제적 모순이라고 본다. 그 희생이 사람들의 감성을 잡아두었다가, 계기를 만나 폭발을 한 것이다. 

87년에는 자기 과제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거대한 군사독재 정권의 타도가 시급했고 모두 다 쉽게 공감했다면, 이번에는 다양한 요구가 많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페미니즘. 비정규직 이야기도 나왔고, 여러 차원에서 사회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주인 의식이 확장되고 있는 거다.

또 한편에서는 합리적 보수와 진보가 만났다. 합리적 보수층 역시 '이게 나라냐' 이런 생각을 갖게 됐고, 그들이 같이 모여 광장을 형성한 것이다. 그리고 광장의 뜨거움과 제도의 냉철함이 만나 선출된 살아 있는 권력을 감옥에 보냈다. 이렇게 이중적인 부분들이 모여서 결과를 만들어 냈는데, 세계적으로도 유례없고 새로운 역사를 만든 건 아닐까 생각한다.

김정헌 : 나는 즐겁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왜 이렇게 즐거울까…. 촛불집회에서, 가장 추운 날이었던 거 같다. 그날도 한복 입은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런데 옷이 너무 추워보였다.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멋진 아주머니 한 분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그 학생들에게 줬다.

나는 그 촛불집회에서 가장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 그럼 그 아이들이 30년 후까지 기억을 할 것이다. 그때 촛불시위 나도 나갔는데 하고. 자신이 인지가 떨어지더라도 부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30년 후에도 기억을 상기시키고 소환할 수 있다고 본다. 이번 촛불시민혁명은 감성혁명으로서, 그야 말로 90%는 완성된 것이라고 본다.

박석운 : 87항쟁과 촛불항쟁이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부터 이야기하자면, 평화시위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87항쟁 때는, 사실 (엄격한 의미의) 평화시위만은 아니었다. 투석하기도 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지 않으면, 우리도 돌 던지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보면 평화시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평화로웠다.

87년보다 이번이 훨씬 평화로운 양상으로 진행이 될 수 있던 이유가 국회가 여소야대였다는 점도 있다.  민심이 확인이 되면, 해결할 수 있는 길이 꽉 막힌 것이 아니라 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가 이번 촛불항쟁은 기본적으로 조직된 대오의 투쟁과 미조직 시민들의 합세가 상승작용을 해서 성공한 거다. 87년 당시에는 노동자와 일반인들을 이간질해서, 투쟁의 확산이 성공적으로 저지가 됐다. 하지만 이번에서는 거꾸로 조직대오가 주축이 됐고, 여기에 미조직 시민들이 합세함으로써 이간질을 당하지 않았다. 이 부분들이 종전과 달라진 그런 측면이다. 그 결과로 박근혜를 파면시켜 교도소로 보내고, 이재용도 구속시키고, 정권 교체까지 가는 성과를 냈다. 이 부분들이 종전과 달라진 점이다. 물론 항쟁의 승리가 어떻게 '촛불항쟁 시즌2'를 통해서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지, 진화·발전해 갈지가 과제다. 하지만 1차적으로 촛불항쟁은 우리 현대사에서 거의 유일한 성공한 항쟁이다. 1단계 항쟁은 성공은 한 것이다.

사회 : 6월항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짧지 않았던 기간 진행된 촛불을 유지,강화시키는 가장 큰 동력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제도적으로 보면, 87년체제가 제대로 된 선거를 만드는 데 있어서는 진일보했지만, 선거를 통해서 성립된 정권이라는 이유로 그 정권이 반민주적 행태를 보일 때 제어해내지 못한 측면도 있다. 이번 촛불은 선거 시기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일상 시기에도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로 확장된 측면이 있다.

또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가장 크게 4월의거, 광주항쟁, 6월항쟁 그리고 이번 촛불시민혁명이 큰 획을 그었다고할 것이다.

당시로서는 성과와 한계가 항상 병존하였지만 긴 역사에서 본다면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조금씩 진보해 왔음이 분명하다. 이번 촛불에서 보여준 특징과 성과 중 하나는 반민주적이고 부패한 정권에서 권력을 박탈하는 과정을 제도 내에서 해결했다는 것이다. 또한 다단순시 대의제 안에서만 된 것이 아니라 직접 민주정과 대의제 사이의 결합을 통해서 했다는 점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승리 경험이라 생각이 든다.

이런 성과와 의미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에 느꼈듯이, 이번 촛불항쟁 역시 상당 부분에 있어 여전히 미완이고 새로운 과제를 많이 던져줬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10년 간 어떤 부분에 집중할 것인지 미래 전망 혹은 미래 의지를 다져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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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10년, 6월항쟁 40년…앞으로의 과제는

김중배 : 정권이 교체됐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를 바탕에서 이끌고 있는 소위 '기층 권력'은 전혀 교체되지 않았다. 이것을 문재인 정부에서 다 교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갈 수 있는 토대, 바탕은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다들 유행가처럼 다들 4차 산업혁명 노래를 부른다. AI(인공지능)을 비롯한 시스템이 들어오면서, 다음 세대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떤 직업이 없어지는가. 하지만 나 같은 아마추어가 보기에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게 대격변인데, 여기에 맞는 시스템, 기술적 격변에 대응하는 사회시스템에 대한 구상이 전혀 없다. 

그런데 시간이 별로 없다. 그것들을 일거에 다할 수는 없지만, 토대를 쌓아가야 되지 않나. 그래서 앞서 에로스효과를 의도적으로 꺼냈다. 왜냐. 나는 이번 촛불집회에서 제일 많이 따라다닌 곳이 중‧고등학생들이었다. 이 중학생들이 '중학생 혁명당' 이름을 딱 내걸었더라. 우리는 87년 체제를 말하지만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에 신자유주의의 본궤도가 깔렸다. 중학생들도 학원가기 바쁘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틀에 넣고 쥐어짜는 이 와중에, 저 애들이 어떻게 해서 혁명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일부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뉴-노말(New Normal), 신자유적인 문명이 비정상을 새로운 노말이라고 규정하는 이런 상태였는데, 그걸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가. 뉴-노말로써 내면화된 소위 '내면 헌법'이 있지 않은가. 정부가 어떻게 하더라도, 내면 헌법이 증발되거나 승화해서 중학생혁명당처럼 에로스로 바뀔 수는 없을까.(웃음) 

김정헌 : 우리나라의 양당 제도에 의해서 끊임없이 여야로 편이 갈라져서 있는데, 이게 고쳐지면 조금 나은 삶이…. 자신의 가치로 소수가 모였지만, 그것이 하나의 정당이나 대의활동을 할 수 있어야 기본적인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 텐데, 그걸 아직도 만들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 촛불혁명을 계기로 그런 부분까지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촛불혁명을 만들어 준 최순실과 정유라를 잊지 말아야 한다.(모두 웃음) 

박석운 :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당장 눈앞에는 당면한 적폐청산 과제가 많이 있다. 검찰 등 권력기관의 개혁이 첫째고, 둘째는 언론 개혁이다.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다른 모든 개혁을 만드는 개혁, 기본적 개혁으로서 중요하다. 그런데 검찰개혁은 될 것 같지만 언론개혁은 잘 안 보인다. 현재 갑갑한 국면이 벌어지는 주요한 배경이, 언론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것에서 기인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본다.

정치개혁도 굉장히 중요한데,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등 선거제도개혁은 선거법개정 방식으로는 쉽지 않고 개헌을 통해서만 가능할 지도 모른다. 결선투표제, 18세 투표권 등도 정치개혁의 문제다. 또 노동개혁과 민생개혁, 재벌개혁 과제나 세월호 문제나 원자력발전소 같은 안전 사회 문제… 이런 것들이 당면 개혁과제에 속한다.

향후 10년, 20년을 이야기한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진보 정치. 지금 문재인 정부의 개혁이 굉장히 위태롭다. 원인은 진보정치가 헤매고 있어서다. 제대로 개혁하게 하려면, 진보정치가 역할을 제대로, 대오를 갖추고 해야 한다. 또 하나는 분단 모순이다. 분단 적폐 청산인데, 평화와 자주 통일. 이 두 부분이 중기적으로 중요한 과제가 된다고 본다.

전민용 : 일단 헌법에 직접 민주주의 요소들이 들어가면 좋겠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세계사적인 문제들, 예를 들어 4차 산업혁명, 기후 변화, 또 지역적‧국지적으로 벌어지는 갈등들에 대해서도 우리나라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대안을 가져야 한다.

대안적 사고를 하려면 새로운 가치와 방향에 대한 훨씬 더 유연한 생각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진보정치도 좁은 틀에서 현재 우리가 진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뿐만이 아니라, 2030 세대가 생각하는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들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깊어지고,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박영민 : '민주주의'에서 민의 개념은 항상 달랐다고 생각한다. 범위가 확장되고, 깊이가 달라질 때도 있었다. 10년 후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가치가 발견돼서 '이것도 민주주의에 포함된다고?' 하며 놀랄 수 있을 거다. 예를 들어, 30년 전에 동물권이 나올 거라고 누가 상상을 했겠나. 10년 후에는 더 많은, 더 넓은 '민'들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조금 더 다양한, 시각을 넓히려는 노력을 이 사회 전체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김중배 : 이미 뉴질랜드에서는 강에 인격을 부여했다. 히말라야 빙하도 그렇다. 자연에 대해서 존중하는, 인간과 동일시하는 걸 녹색당 같은 곳이 해야 한다. 반대로 지금부터는 '적색당'이 될 수 있는데, AI 시스템이 들어왔을 때 로봇에 과세를 해야 한다. 원천적으로 AI 로봇을 소유할 수 있는 건 막대한 자산가 밖에 없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니까 소요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 : 어떤 도전이 끝나면 비로소 새로운 도전을 알게 된다. 촛불 역시 우리가 해결할 많은 숙제를 남겨주었다. 말씀해주신 여러 과제들을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논의할 시기가 지금이 아닌가 한다. 긴 시간 귀한 말씀하여주셔서 감사하다. 모두 건강하셔서 10년 후 , 또 30년 후 촛불과 6월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 나누길 소망한다. 
kakiru@pressian.com 다른 글 보기